소설리스트

혼불 (132)화 (132/348)

#132

선오는 반닫이 함 속에 숨어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 불을 지른 건 나인데. 그런데 갑자기 왜….

“나는 모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윤원중은 아까부터 껄껄 웃으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저도 선배님께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허허, 나는 모른다니까. 젊은 사람이 말귀가 어두운가?”

상대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동료를 불렀다.

“채 주임!”

“네, 수석님! 부르셨어요!”

곧바로 활기찬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이 동네에 사는 귀재는 몇 명이지?”

“음, 제가 한 바퀴 싹 조사해 봤는데 이 분 포함해서 네 명이었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때부터 선오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윤원중 씨. 당신이 말을 안 하면 근방에 사는 모든 귀재를 죽일 겁니다.”

이 목소리는 틀림없이….

“아, 근데 이 집에 꼬마 한 명이 사는데… 그러고 보니 걔가 없네? 할아버지, 손주 어디 갔어요? 할아버지 손주 하나 있잖….”

말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채 주임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어? 잠깐만. 혹시 그 꼬마가 불 지른 거 아니에요? 걔도 귀재 맞죠?”

손주 이야기가 나오자, 윤원중이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내가 질렀소.”

“네? 아까는 모르신다면서… 아니, 그나저나 애 어디 갔냐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하시게. 나 같은 금치산자가 무슨 애를 키운다고?”

“네? 제가 그때 똑똑히 들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수석님, 저거 거짓말이에요. 애초에 걔 아니었으면 저는 이 사람이 윤원중인지도 몰랐을 거예요. 처음엔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그 애가 본인 할아버지가 아프다면서….”

윤원중이 껄껄 웃으며 채 주임의 말을 잘랐다.

“우리 집엔 잡귀뿐이었소. 이거야 원, 당신 보아하니 뜨내기 나자구먼. 그러니 귀신과 인간도 구분 못 하지.”

채 주임이라 불린 사람이 발끈하여 “뭐라고요?” 하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선 목소리가 “그만하고, 넌 청장님께 가 봐라.” 하고 채 주임을 방에서 내보냈다. 수석이라 불린 사람이 낮게 물었다.

“윤원중 씨.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말 당신이 불을 질렀습니까?”

“그래! 이 지긋지긋한 세상, 다 불태워 버리고 싶어서 내가 질렀다!”

윤원중의 고함을 끝으로 바깥이 조용해졌다.

온통 침묵, 침묵이었다.

선오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 즈음이었다.

끼이이….

함이 열리며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이 싸늘한 눈으로 이불을 두른 선오를 내려다보았다.

“…….”

선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죽인 채 검은 복면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복면인은 눈만 내놓고 있었는데, 눈가 근처에 피가 튀어 있었다.

“…….”

그때였다.

“주련아.”

마당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검은 복면인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복면인은 다시 선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주련아, 다 죽였니?”

찰나의 순간, 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주련아?”

“…….”

검은 복면인이 다시 선오를 쳐다보았다.

“네. 다 죽였습니다.”

철컥.

그대로 함이 닫혔다.

“…….”

그 후로는 온통 암흑이었다.

***

바깥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타는 냄새가 났다. 선오는 함을 빠져나왔다. 집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범람한 것처럼, 피가 흥건했다.

“…….”

선오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멍하니, 윤 노인의 가슴에서 꽂힌 잭나이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워 있는 윤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피가 꿇어앉은 선오의 무릎을 적셨다.

“이런… 이건 사인검(四寅劍)(십이지간 중에서 호랑이를 뜻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된 검.)이야. 사인검에 찔려서 죽으면, 미련과 원한이 있어도 귀신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어.”

덧붙여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나가자고, 시시가 다급하게 말했다.

윤 노인을 바라보던 선오가 칼자루를 잡더니, 꽂힌 칼을 확 잡아 뺐다.

“…….”

선오가 안광이 텅 빈 눈으로 칼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놈들이 올 거야… 놈들이 와!’

선오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기준아, 응… 아빠야….”

윤원중의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기준이가 누구인지 선오는 알고 있었다. 윤원중은 가끔 밤마다 울면서 부르짖는 이름이었다.

“…….”

선오는 윤원중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칼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선오가 웩, 헛구역질했다. 손목에서 시시가 고함을 쳤다.

“뭐 하고 있어! 불이 더 커지기 전에 어서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

흐릿한 눈으로 선오를 올려다보던 윤원중이 힘없이 밀었다.

“어서, 어서 가거라. 어디로든 가서, 모든 것을 잊고 살아라….”

선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온통 뿌옇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 집의 문이 다 활짝 열려 있었다.

쪽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선오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선오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선오는 쌓인 눈밭을 달려 나갔다. 곧바로 집 뒤편으로 올라가는데,

“선… 오… 야….”

희미한 흐느낌에, 선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책… 읽… 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아래에서 누가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선오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돌아왔던 길을 헐레벌떡 내려갔다.

“하… 하하… 하하…!”

그러다 발목이 접질려 비탈을 그대로 굴렀다. 수살귀는 품에 책을 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선오가 숨을 몰아쉬며 수살귀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래, 괜찮아. 가자! 같이 가자… 이제부터 나랑 가자!”

수살귀를 잡아끌려던 선오가 휘청하며 넘어졌다. 선오의 손이 수살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중심을 잃은 것이다. 선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당황하여 수살귀의 몸을 더듬더듬 만졌다. 이상했다. 몸의 왼쪽은 만져지는데 몸의 오른쪽은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선오가 허둥지둥 자세히 수살귀의 몸을 바라보았다. 수살귀는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 선오는 책을 뺏어서 홱 내던졌다. 그러자 책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부적이 눈에 띄었다. 부적의 정체는 귀신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부였다. 몸에 천도부가 붙은 수살귀는 형체가 조금씩 투명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놈들한테 당할까 봐 전부 편하게 보냈다더니, 윤원중이 부적을 붙였어. 이건 순전히 귀신의 의지로 버티고 있는 거야. 가기 전에 너를 보고 싶었는가 봐.”

시시가 담담히 말했다.

“이거… 이거… 안 돼… 잠깐만….”

선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부적을 덮었다. 시시가 알려 줬던 대로, 부적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몇 번을 획을 떠올리고 감았다가 떠도 부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미친 듯이 부적을 매만지던 선오가 손목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 이거… 왜! 왜 안 돼…!!!”

선오가 당황한 눈으로 시시를 바라보았다. 손목에서 시시가 말했다.

“윤원중이 모든 진력을 쏟아부어서 쓴 부적이야. 평소에 썼던 부적보다 몇십 배는 강해. 네 힘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 정도로는 깰 수 없다.”

선오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금 선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 오… 야….”

한결 흐릿해진 수살귀가 선오가 내던진 책을 다시 주워 왔다.

“잠깐만. 가면 안 돼.”

“책… 읽… 어….”

“안 돼. 안 돼! 아니야.”

이 부적만 깨뜨리면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어! 선오가 부적에 몇 번이고 손을 갖다 댔다. 그러나 종국에는 이를 악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수살귀의 가슴팍을 쥐어뜯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나한테 본향의 표식이 있다고 했잖아! 본향이 나를 아낀다고 했잖아-!!!”

선오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수살귀의 몸을 끌어안았다.

툭, 눈밭 위로 책이 떨어졌다.

품 안에는 어느덧 텅 찬 바람만 맴돌았다. 감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발치에 떨어진 책 한 권뿐이었다. 선오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책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윤선오

언젠가 종이 위에 이름을 써 두었을 때, 그 옆에서 나란히 누워 선오가 제일 아끼는 책에 수살귀가 남긴 낙서였다. 이지도 없는 멍청한 잡귀는 제가 쓴 글씨를 그대로 흉내를 내서 써 놓았다. 글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악필이었다.

“왜…!”

선오가 책을 끌어안고 눈밭에 푹 엎드렸다.

“왜…!!!”

검은 뱀 시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향의 표식이 있다고 했잖아….”

뼛속까지 엄습하는 무력감이었다. 눈밭 위에 엎드린 선오의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다. 기도하듯이 손을 움켜쥐었다. 수살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귓속에 속삭인 말이 맴돌았다.

선… 오… 야….

잘… 있… 어….

“미안해….”

잡귀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라도 지어 줄 걸 그랬다. 이름만이라도 지어 줬어야 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못되게 굴지 말았어야 했는데. 머리를 쓰다듬게 놔뒀어야 했는데. 책을 가져다주면 고맙다고 해야 했는데…….

“미안해….”

너는 왜 하늘로 안 가고 이 땅에 남았느냐고, 이유를 한 번은 물어봤으면 좋았을까. 선오가 스르륵 고개를 들고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선오는 제 손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뽑아 온 사인검이었다.

“네가… 나한테 부적을 깨는 법을 알려 주지만 않았어도….”

그럼 애초에 집 밖에 나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오두막에 가서 불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텐데. 그럼 놈들이 할아버지를 찾아낼 일도 없었을 거고, 부적 깨는 방법을 몰랐으면 잡귀를 붙잡지도 않았을 거고, 만약에 그랬다면…!

손목에서 뜨끈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내 탓을 하는 거냐?”

시시의 눈이 납작해졌다.

“네가 빌었잖아.”

검은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다 들었어.”

아.

그랬다.

“그때 정말로 진심이었지?”

“…….”

“그래서 그런 거다. 크크크.”

“…….”

“다 너 때문이라는 거다.”

“…….”

“거봐라, 본향은 역시 너의 편이지?”

“…….”

크크크… 시시는 선오를 비웃고 있었다.

선오는 시시를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채도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목에서 쏟아지는 뜨끈한 피가 새하얀 눈밭 위에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선오는 비틀거리며 어두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 그러네….”

선오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추위 때문도, 공포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증오였다.

자기 자신을 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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