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오늘 임효문은 오후 출근이었다. 그러니 여유 있게 출근해도 되건만, 임효문은 아침 일찌감치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출근하기에 앞서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임효문은 잘 다린 정장을 입고 평소처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약속 장소는 본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종로 한복판을 통과하는 버스는 이 무렵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인해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만원 버스에 꾸역꾸역 몸을 끼워 넣은 임효문은 본청보다 두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시간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한 임효문은 입구에 서서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상대를 기다렸다. 십 분쯤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임효문이 환하게 웃으며 번쩍 손을 들어 보였다. 싱글벙글한 임효문과 달리 상대의 표정은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오우! 칠칠아, 여기야!”
재겸이 불퉁한 눈빛으로 임효문을 흘겨보았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재겸과 임효문이 만난 곳은 영화관이었다.
어제 두 사람은 본청 3층 휴게실에서 ‘지는 사람이 영화 보여 주기’라는 조건으로 프렌즈팡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보나 마나 임효문의 승리였다. 의욕만 앞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재겸은 7만 점보다도 훨씬 낮은 점수인 ‘5만 점’을 기록하면서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고, 약속대로 임효문에게 영화를 보여 주게 되었다.
임효문은 안 그래도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다며, 이튿날 바로 영화를 봐도 되겠느냐 물었다. “그러든지.” 재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표값이 얼마냐고 물어본 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임효문에게 슥 내밀었다.
‘그럼 재밌게 봐라.’
‘…….’
재겸은 영화를 보여 준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황당해하던 임효문은 ‘영화를 보여 준다’라 함은, 표값을 지불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재겸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임효문과 따로 약속을 잡고, 밖에서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으면 내기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결국 팔자에도 없는 영화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로의 스케줄을 맞춰 보았더니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오후 출근이었다. 덕분에 약속 시각을 맞추기가 수월한 상황이었고, 재겸은 하는 수없이 속전속결로 약속을 이행하게 되었다.
아침잠이 많은 재겸은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후회가 막심했다. 이 시간에 영화관에서 회사원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임효문과 재겸, 둘뿐이었다. 두 사람이 이른 시간에 만나게 된 이유는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이야말로 영화관의 황금 시간대’라는 임효문의 지론 때문이었다.
난생처음 극장에 온 것이었지만, 아침잠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재겸은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신기하고 뭐할 것도 없이 그저 시큰둥했다.
“칠칠아, 그럼 우리 표부터 끊자.”
푹 삶은 시래기처럼 시들시들한 재겸과는 달리, 아침형 인간인 임효문은 아주 기운찼다. 재겸은 임효문을 따라 터덜터덜 발권기 앞으로 갔다.
“야. 돈은 내가 낼 테니까 표는 네가 끊어.”
“어? 왜?”
“나 영화관 처음 와 봐서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
재겸이 카드를 건네자, 임효문이 놀란 표정을 했다.
“뭐? 너 영화관 처음 와 본다고?”
“시골에 살았어서 극장이 없었어.”
재겸은 짐짓 태연하게 둘러댔다. 결국, 표 끊는 건 임효문이 하게 되었다. 무인발권기 앞에 선 임효문은 화면을 띡띡 눌러 가며 예매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려고 하는 영화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고객님, 이 영화는 저희 영화관에서는 상영을 안 해서…….”
“예?!”
당황한 임효문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전날에 상영 시간표를 보고 왔는데? 임효문이 허둥지둥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악! 여기가 아니라 다른 영화관인데 착각했다!”
임효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르륵 주저앉더니, 탈색모를 마구 쥐어뜯었다. 임효문이 보고 싶어 한 영화는 다른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였다. 종묘 근처에만 해도 영화관이 서너 군데나 있어서, 바보같이 영화관을 착각하고 말았다. 일부러 상영 시간에 맞춰서 나왔기 때문에, 지금 바로 다른 영화관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제시간 안에 입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임효문이 이마를 긁적거리며 재겸의 눈치를 살폈다.
“아 어쩌지? 칠칠아, 그냥 다음에 만나서 볼까?”
“장난하냐? 아침부터 사람 불러내 놓고. 그냥 아무거나 봐.”
“근데 아무거나 봤다가 재미없으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재미없는 영화 찍은 사람들도 먹고는 살아야지.”
재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
아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재겸은 영화가 재미가 있건 없건 그 여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약속을 이행하는 거다.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허탕을 치고 돌아가기는 싫었다. 게다가 약속을 미룬다는 건 다음에도 임효문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으래… 뭐 그럼, 오늘은 그냥 아무거나 보자.”
재겸이 워낙 완강하여, 임효문은 결국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궁색하게 뜻을 굽혔다. 어차피 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를 못 보는 마당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냥 제일 빨리 시작하는 영화로 아무거나 예매했다.
“영화는 네가 보여 주니까 팝콘은 내가 살게.”
임효문은 매표소 옆에 딸린 매점으로 가서 팝콘 세트를 사 왔다. 커다란 통에는 캐러멜 팝콘과 일반 팝콘이 반반씩 섞여 한가득 들어 있었다.
“팝콘 맛있다! 칠칠아, 먹어 봐.”
팝콘을 입에 넣자마자 재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언젠가 정주가 전자레인지로 팝콘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었다. 한 통 전부 혼자서 몽땅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이거 또 살 수 있냐?”
“엉? 팝콘? 당연히 살 수 있지. 근데 왜?”
“메… 아니, 동생한테 사다 주려고.”
메산이에게도 영화관 팝콘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음, 그럼 퇴근할 때 사 가는 게 낫지 않나? 눅눅해지잖아.”
“아 그런가.”
“근데 칠칠아, 너 동생 있었어? 몇 살인데?”
재겸은 살짝 당황했다.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어… 뭐… 걔도 대충 웬만큼 먹었을걸…?”
재겸은 팝콘을 와그작 씹으며. 임효문의 뒤를 졸졸 따라서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상영관 내부는 어두워서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계단을 못 보고 발이 걸려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가 임효문의 등짝에 코를 박았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임효문이 화들짝 놀라서 “깍!”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입구 근처에 앉아 있던 영화관 관객들이 “어잇 깜짝이야!” 했다. 임효문이 “죄삼다. 죄삼다.” 하고 미친놈처럼 사과를 했다. 재겸은 임효문의 꼬라지가 웃겨서 조용히 입술을 씹었다.
두 사람은 좌석 번호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재겸은 임효문이 하는 행동을 눈치껏 따라 했다. 컵 홀더에 슬쩍 음료를 꽂아 두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도 풀어서 앞쪽에 걸었다. 영화관은 어둡고, 서늘하고,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임효문이 손을 들더니 스크린 앞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야. 칠칠아. 저기 귀신 있다.”
스크린 앞쪽에 웬 잡귀 하나가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거의 꺾다시피 하여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 놀랍진 않았다. 어둡고 서늘한 곳이라면 잡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게다가 영화관은 원래 귀신이 많은 장소였다. 임효문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은밀히 귓속말했다.
“영화 다 보고, 이따 나갈 때….”
처리할까? 하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쟤는 영화 볼 거면 뒤에 가서 보지, 왜 저기서 불편하게 저러고 보냐.”
재겸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에 임효문이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임효문은 이상한 얘기를 들은 것처럼, 기묘한 낯을 하고 있었다.
“왜?”
“어? 어… 아니….”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침잠이 많은 재겸은 애시당초 영화가 시작되면 눈을 붙이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어쨌든 극장에 와서 함께 영화를 보는 것으로 약속은 지킨 셈이고, 영화를 볼 때 자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영화관 의자는 아주 푹신하고 편안해서, 딱 앉자마자 눈 붙일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된 순간, 재겸은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임효문이 되는 대로 예매한 영화는 공교롭게도 가상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었기 때문이다.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재겸은 어느샌가 빨려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때는 조선 중기.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폭정을 자행하고, 폭군 곁에는 간신이 넘쳐나니 바야흐로 난국의 시대였다.
극 중 주인공은 왕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인영군’으로, 인영군은 폭정 아래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반정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인영군은 뜻이 맞는 신하들을 모아서 세력을 키워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인영군은 ‘이현’이라는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현은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제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재야에 묻혀 지내는 선비였으나, 누구보다 박학다식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이현의 학식과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인영군은, 그의 능력을 높이 그를 참모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현은 인영군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이현은 인영군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인영군이 그릇된 길로 향할 때 간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매섭게 질책을 하기도 했다.
“손자가 병법에서 이르기를,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보다 싸움 없이 굴복시키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승냥이 떼나 다름없는 하찮은 이들을 적수로 받아 주지 마십시오. 소인과 싸우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분명 소인일 것입니다. 어찌 군자가 소인과 다툼을 하겠습니까?”
재겸은 어느새 팝콘을 먹는 것도 잊고 영화에 몰입해 있었다.
“대감, 대감께서는 군자가 되셔야 합니다. 소인(小人)은 얕은 개울물과도 같아서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도 비분강개하나, 군자(君子)는 너른 하해와도 같아서 그 어떤 풍랑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헌데 대감께서는 어째서 하잘 것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계십니까?”
재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윤태희 생각이 났다. 윤태희가 시비를 걸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 이현은 인영군의 책사인 동시에, 재겸의 책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