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36)화 (136/348)

#136

윤태희는 워낙에 의뭉스러운 놈이라, 모든 말과 행동에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배고파서 들렀다 간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윤태희는 말이 없어졌다. 임효문이 이런저런 말을 붙여도 ‘네, 그러네요.’, ‘그렇죠.’ 하며 조용히 대꾸하기만 했다.

‘호출이 와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천천히 먹고 와요.’

대충 식사를 끝마친 윤태희는 인사를 남긴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 냅킨 몇 장을 뽑아서 입을 닦더니, 테이블 아래에 있던 쓰레기통에 휙 내던지고는 가게에서 나갔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는데 긴장감이 일시에 풀렸다. 재겸은 맘 놓고 돈가스를 싹싹 비웠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카운터로 갔다. 손님으로 왔으니만큼, 임효문은 계산을 하기 위해서 지갑을 꺼냈다. 그때, 직원이 애매한 웃음을 흘리더니 임효문에게 뭐라 뭐라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임효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수석님이 수표 내고 가셨다고?”

임효문과 재겸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얼마나 내고 가셨는데?”

직원이 브이 자를 그리듯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20만 원?!”

임효문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돈가스 정식은 인당 만원인데… 직원의 말에 의하면, 윤태희는 수표에 서명해서 건네더니, “잘 먹었습니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그대로 휙 나갔다고 했다.

“…….”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재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임효문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안 되겠다며, 원래 음식 가격에서 제하고 남은 돈을 줄 테니, 대신해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재겸은 임효문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

“돈 돌려줘도 안 받을걸.”

돈은 있는 사람이 쓰는 거다. 지가 내고 싶어서 냈다는데 왜….

“칠칠아. 그럼 수석님께 잘 먹었다고 꼭 전해 드려. 알겠지?”

임효문이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알았어.”

***

나례청 로비에 이르러 임효문과 헤어진 재겸은 제1팀 사무실로 출근했다.

“어? 재겸이 일찍 왔네?”

재겸은 팀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정장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그런 다음에는 구두를 벗고. 데스크 아래에 놔둔 고양이가 그려진 슬리퍼를 꺼내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괜히 자리 정리도 한 번 하고, 양치 도구를 꺼냈다. 슬리퍼며 양치 도구며 전부 며칠 전부터 갖다 놓은 물건들이었다.

제1팀 팀원들은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우르르 화장실로 가서 양치를 했다. 그래서 재겸도 양치 도구를 가져다 놓고, 식사 후에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일찍 출근했으니까 양치를 해도 되겠지 싶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사무실과 같은 층에 있는 남자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앞에 선 재겸은 거울을 보며 양치를 했다. 칫솔질을 끝내고 입 안을 헹구기 시작하는데, 거울 안에서 문이 열리며 윤태희가 슥 들어왔다. 입안을 헹구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놀라서 살짝 사레가 들렸다. 저 새끼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툭툭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윤태희는 소매를 걷고, 넥타이를 어깨 위로 걸치더니 손을 씻었다.

“식사 잘했어?”

윤태희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어.”

양치질을 마친 재겸은 칫솔에 남은 물기를 탁탁 털었다. 그때, 머리 근처로 갑자기 손이 확 다가왔다. 재겸이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

윤태희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팔을 뻗어 페이퍼 타월을 뺐다. 윤태희는 별말 없이 등을 돌리더니 그대로 문을 열었다.

“야.”

재겸이 윤태희를 불러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쳐다보았다.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재겸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손에 묻은 물기를 셔츠에 대충 닦아 내며,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임효문이 고맙다고 전해 달래.”

문을 당기다 멈춰 선 윤태희는 그대로 팔을 내리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마치 박자를 맞추듯 구두 앞코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가 했다. 그렇게 얼마간 발치를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자라면 치가 떨리게 싫다더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가 봐?”

재겸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거울을 통하지 않고, 맨눈으로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아침 일찍 나와서 영화도 보고, 같이 밥도 먹으러 다니고. 의외야.”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재겸을 향해 다가왔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장기 말 하나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아?”

쾌적하고 넓은 화장실은 조용했다. 재겸은 말없이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재겸과 마주 선 윤태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임효문도 같이 굴려 보려고?”

내내 말이 없던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쩌다 한 번 어울린 것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그리고 애초에 본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라고 한 건 너야.”

“나는 본청 생활에 적응하라고 했지, 뒤에서 남몰래 붙어먹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윤태희는. 재겸이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다정한 인간이었다. 분하지만 그런데 참으로 웃긴 것은 윤태희가 그렇게나 다정한 인간인 동시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상대에게 최대의 모욕감을 줄 수 있는지를 제일 잘 아는 놈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야.”

재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믿지 못하게 하랬다고,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줄 몰랐네.”

“내가 어디서 누굴 만나든, 하나하나 다 너한테 보고해야 하냐?”

“누구한테는 그렇게 어려웠던 게, 남들한테는 이렇게나 쉬운 일이라는 거 참 재밌어. 기분 잡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윤태희가 검지를 뻗어 재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오만하고도 무례한 손길이었다. 타의로 턱을 치켜들게 된 재겸이 눈을 내리뜨고 윤태희를 내려다보았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재겸의 낯에 결국 금이 갔다.

“…기어오르지 말랬어.”

재겸이 윤태희의 손을 확 쳐내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개같이 이죽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란 얘기야.”

“네 앞가림이나 잘 해. 난 제대로 구분하고 있으니까.”

윤태희의 눈을 쳐다보며, 재겸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공과 사를 구분 못 했으면, 넌 방금 나한테 뒤지게 맞았어.”

“…….”

윤태희는 말없이 재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기울여 재겸에게 입을 맞췄다. 예고 없이 와닿은 입술의 감촉에 재겸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윤태희가 벽에 손을 짚더니 그대로 따라왔다. 겹쳐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쪽, 하는 소리가 선명하고 적나라하게 울렸다.

“…….”

코끝이 닿은 상태에서 눈이 마주쳤다.

“때려.”

보란 듯한 도발에, 재겸은 눈을 꾹 감았다. 그래, 이 입맞춤은 그러니까, 마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은 거다. 상처를 주고 짓밟으려는 윤태희의 방식이고, 싸움의 일환인 거다. 내가 윤태희의 뺨을 때리듯이, 그것과 같은 행위인 거다.

문득 영화 속에서 봤던 책사의 말이 떠올랐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보다, 싸움 없이 굴복시키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아니. 안 때려.”

윤태희가 멈칫할 때였다.

“네 말대로 이런 거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크게 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내뱉는 숨결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다는 걸, 윤태희에게 들키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넌, 네가 나한테 뭐라도 되는 것 같냐?”

재겸은 스르륵 눈을 들어 올렸다.

“착각하지 마.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무반응. 재겸은 임효문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윤태희의 눈에 자신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를 바랐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윤태희가 그러하듯이.

“네가 그랬지. 각자 할 일만 잘하면 된다고. 네 말이 맞아. 나는 목패를 되찾아서 너한테 네 이름을 돌려줄 거야.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이뤄 내고,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이뤄 내면 되는 거야.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있잖아.”

또렷한 시선이 윤태희를 아프게 투창처럼 찔렀다.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뭔 짓을 하든 신경 안 써.”

그 말을 끝으로 재겸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윤태희는 한참 만에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느리게 제 뺨을 쓸어 보았다.

윤태희는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솨아아, 세면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태희는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갖다 댔다. 하나의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불현듯, 자신이 저번과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았다. 분명히 그 자리에서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번에 또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면 안 됐다.

지난 십 년간 윤태희는 방향을 놓친 적이 없었다. 목표는 언제나 명확했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윤태희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 윤태희는 지금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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