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41)화 (141/348)

#141

“싫으면 훼방 놓지 말고 꺼져, 씨발 새끼야.”

명료한 발음, 놀라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에, 타투남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윤태희는 타투남의 손에 들려 있던 재겸의 모자를 확 잡아채듯이 뺏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재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윤태희는 재겸의 손목을 끌고 사람들이 넘쳐나는 라운지로 나왔다. 음악 소리가 시끄러웠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재겸은 그때까지 말문이 막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을 손목을 놔주더니, 슬쩍 고개를 빼고 왔던 곳을 쳐다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놀랐어?”

놀랐냐고? 재겸은 어이가 없었다. 단순히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목걸이를 되찾았다더니, 그새 귀신에 쓰였나 의심이 들 정도로 당혹스러웠었다.

그러니까, 윤태희는 방금 전에 일부러 남색가 흉내를 낸 건가?

“넌… 가끔 진짜….”

재겸이 인상을 쓰며 뭐라 중얼거렸다. 그런데 음악 소리가 워낙 커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에 윤태희가 귓가를 갖다 대자, 재겸이 말했다.

“넌 가끔 진짜 미친 새끼 같어.”

굳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가 본인 욕을 적확하게 듣게 된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고 웃었다. 목소리가 몹시 심각하게 들린 탓도 있었다.

“근데, 너 술 마셨어?”

“응, 조금. 왜?”

“술 냄새가 지독해.”

가장 큰 이유는 목걸이의 주인이 끼얹은 술 때문일 것이고, 주는 술을 간간이 홀짝였더니 배 속이 뜨거웠다. 어느덧 숨결에서 술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은근한 열기에 뒤섞인 취기가 몸을 천천히 휘감아 올라오고 있었다.

“정화부에서 곧 올 거야. 오면 바로 나가자.”

재겸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재겸과 마주 보고 서 있던 윤태희가 갑자기 아까처럼 재겸에게 어깨 동무를 했다. 재겸이 물었다.

“뭐, 뭐야. 왜 그래?”

“뒤에서 여기 보고 있어.”

뭐? 재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윤태희의 말대로 타투남이 바 근처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서서 이쪽을 보며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진짜 일행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걸까. 아니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어쩌면 고자질하는 중인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턱을 잡아 쥐었다.

“돌아보지 마. 티 나니까. 태연하게.”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를 가깝게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쟤 갈 때까지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

윤태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려니, 몹시 어색했다. 긴장한 재겸이 또다시 저도 모르게 타투남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옮겨서 재겸의 뺨을 돌리게 했다.

“돌아보지 말고.”

“아직도 안 갔어?”

“응.”

그때, 갑자기 조명이 붉게 변하더니 파티장 안이 훨씬 더 어두워졌다. 재겸은 주변을 곁눈질했다. 재겸은 제 어깨를 두르고 있던 윤태희의 팔을 슬쩍 떨쳐내고, 윤태희와 마주보고 섰다. 재겸은 윤태희의 목을 확 끌어안았다.

“…….”

윤태희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저 새끼 보라고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윤태희는 재겸에게 안긴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

“…….”

큰 음악 소리가 둥, 둥, 발끝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윤태희가 먼저 남색가 흉내를 냈으니까, 장단을 맞추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계속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고 했으니까….

의심을 피하고자 조금 더 내밀한 모습을 보여줘서 속이려는 거다.

“지금은? 갔어?”

재겸이 은밀하게 물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대답이 없었다.

“야. 갔냐니까.”

그때, 아래로 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윤태희가 재겸의 등을 꽉 끌어안는가 싶더니, 고개를 기울여 재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

재겸은 살짝 당황했다. 목덜미에 숨결이 와닿는 느낌이 선명했다.

“야.”

재겸이 슬쩍 윤태희를 밀어냈다.

“야. 윤태희….”

윤태희가 순순히 밀려나며 눈을 떴다.

“응.”

재겸이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있잖아, 너…….”

그때였다.

“저 사람이에요!!”

난데없이 울려 퍼진 날카로운 고함에, 윤태희와 재겸이 동시에 목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삿대질을 하며 윤태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또라이 새끼랑 합석하고 나서,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아까 전에 윤태희가 접근했었던 반지 주인이었다. 그의 곁에는 터질 듯한 양복을 입은, 우락부락한 가드 두 명이 서 있었다.

“…….”

아 씨발.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매만졌다.

“죄송한데 주머니 안에 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험악한 인상의 가드가 성큼 다가왔다.

“…….”

윤태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손바닥을 들어 접근을 저지했다.

“아, 알겠어. 알겠어.”

윤태희가 눈을 위로 굴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주면 되잖아. 주면.”

윤태희는 깔끔하게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이 당황한 얼굴로 상대와 윤태희를 번갈아 응시할 때였다.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윤태희가 갑자기 고개를 훽 틀더니, 곁에 선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근데 오늘이 며칠이지?”

뜬금없는 질문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뭐?”

“오늘 며칠이야?”

이번엔 또 무슨 흉내를 내는 건가 싶었다.

“6월… 14일….”

재겸은 가드 쪽을 힐끔, 보았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맞네, 6월 14일이었지.”

윤태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내가 정신이 없어서, 날짜 지나는 줄을 몰라.”

윤태희가 미소를 짓더니, 가드와 목걸이의 주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윤태희가 갑자기 엉뚱하게 딴소리를 해대자, 가드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단 주기나 하시죠.”

“그래, 알았어.”

윤태희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가드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손에 올려진 것을 쳐다보던 가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건네받은 것은 목걸이가 아니라, 조그마한 수은 건전지였다.

“이게 뭡니까?”

“내 마음.”

윤태희가 능청스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선물이야.”

가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왜냐면 오늘은 6월 14일이니까.”

보다 못한 목걸이 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그게 대체 뭐 어쨌다는 거예요?”

윤태희가 갑자기 재겸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물러서더니 재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호를 주듯이, 허리를 꽉 쥐었다 놓는 악력이 느껴진 것은 찰나였다.

윤태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술유월계미삭 열사흘정축.

재겸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윤태희가 은륜의 시한을 종료합니다.”

쾅——!!!

주변에 있던 술병과 조명이 펑, 하고 터지며 일시에 폭발했다. 사람들이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파티장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기공 파에 떠밀리듯 휩쓸려, 뒤로 나자빠졌던 재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난데없는 힘이 재겸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뭐 해? 뛰어-!!”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끌려가듯 다리가 움직였다. 재겸은 잡아끄는 힘에 사람들을 정신없이 헤집고 달리기 시작했다.

“야! 잡아!!!”

한발 늦게 가드들이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윤태희와 재겸은 앞길을 막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밀쳤다. 둘이 달려나간 궤적을 따라 테이블이 넘어지고 술병이 깨지면서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밟으며 뛰어올랐다. 입구에 있던 가드들이 연락을 받았는지 뒤늦게 둘을 향해 뛰어들었다. 재겸은 발로 뻐억, 걷어차고 길을 열었다. 진입로를 막고 있던 난간을 휙 뛰어넘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바깥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야성 같은 밤거리로 뛰쳐나온 두 사람은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달리던 재겸은 어느 샌가부터 윤태희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다. 큰 도로변을 내달리는데, 뒤에서 윤태희가 “왼쪽!” 하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왼쪽으로 꺾자마자 좁은 주택가 골목이 펼쳐졌다.

잠시 달리다 보니 어느덧 막다른 길이었다.

뒤에서는 가드들이 쫓아오고 있었고, 앞에는 성인 키만 한 담벼락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재겸은 화단을 밟고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었다. 윤태희도 풀썩 뛰어내렸다. 다세대 주택, 비좁은 골목 틈으로 숨어들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이렇게 뛰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윤태희는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뒤쫓는 기척이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재겸이 헉헉, 숨을 들이켜며 물었다.

“갔어?”

“응, 갔어.”

재겸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윤태희는 담벼락에 등을 기댄 상태에서 무릎을 짚고 호흡을 정리했다. 그러다 둘이 눈이 마주쳤다.

“…….”

“…….”

숨을 몰아쉬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꾸물꾸물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항력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흡….”

하관을 틀어쥐고 숨결을 가다듬던 윤태희도 입술을 꾹 깨물고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이상하게 짜릿했다. 재겸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난 네가 진짜로 목걸이를 돌려주려는 줄 알았어.”

“설마.”

둘은 못된 장난을 저지른 철없는 소년들처럼 한참 동안 그렇게 큭큭큭 어깨를 떨며 웃었다. 웃음기에 젖어있던 재겸이 불현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씹새끼가 너 장난하냐? 놀랐잖아.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재겸이 주먹으로 윤태희의 어깨를 퍽, 후려갈겼다. 아프지는 않지만 얼얼했다. 윤태희가 어깨를 틀어쥐고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신호 줬잖아. 그런 것치고 달리기가 엄청 빠르던데?”

“야, 근데 거기 다 범인들일 텐데 그거 써도 괜찮아?”

윤태희가 마지막에 쓴 물건은 은륜지였다.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제구였다. 언젠가 산에서 이영신이 썼던 물건으로, 당시에는 폭발력이 엄청났다.

“괜찮아. 귀기를 적게 응축한 거라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을 거야.”

폭발하는 소리만 클 뿐, 살상력은 적었다. 마치 풍선이 터진 것과 같은 이치였다. 범인을 상대로 이영신이 썼던 것처럼 강한 은륜지를 썼다간 분명 징계를 받을 것이다.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목걸이는?”

윤태희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영롱하게 빛났으나 그 화려함은 마치 독버섯과도 같은 간특함이었다. 딱 봐도 느껴지는 기운이 악했다.

“차는 내일 가지러 와야겠는데.”

“그럼 집에는 어떻게 가?”

“콜택시 불러야지.”

둘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택시를 기다렸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윤태희는 주택가 창문에 붙은 천막 아래로 재겸을 이끌었다. 둘이 딱 붙어 서야만 간신히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어느새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늦은 밤 주택가는 조용했다. 문득 얼마 만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웃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비가 오니 윤태희의 향수 냄새가 축축하고 짙게 풍겼다. 윤태희는 반걸음쯤 떨어져, 한쪽 어깨에 비를 모조리 맞고 있었다.

재겸은 무심한 손길로 윤태희의 팔꿈치를 슬쩍 잡아당겼다.

“너 어깨 젖어.”

윤태희는 순순히 끌려왔다. 투둑, 툭, 빗방울이 천막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윤태희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륵 앉았다.

“힘드네. 술 괜히 먹었어.”

윤태희가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재겸은 수그리고 앉은 윤태희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슬쩍 입을 열었다.

“…야.”

“응.”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윤태희의 목소리가 뭉개졌다.

“있잖아. 너….”

“응.”

주저하던 재겸은 허리를 반쯤 굽히고 앉더니, 손을 뻗어 윤태희의 이마를 짚었다. 재겸의 손길에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세웠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야, 너 열 나.”

아까 윤태희를 안아 주었을 때, 목덜미에 와닿았던 이마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술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긴가민가했지만, 혹시나 어쩌면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너 어디 아파?”

이마에 와닿은 손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던 윤태희가, 스르륵 손을 들더니 제 이마를 짚은 재겸의 손을 겹쳐 쥐었다.

“아니, 안 아파….”

그리고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윤태희는 겹쳐 쥐고 있던 재겸의 손을 뺨 언저리로 끌어내려, 재겸이 제 볼을 쓰다듬도록 했다.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윤태희는 재겸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재겸이 흠칫하며 손을 빼려고 할 때였다. 그러나 윤태희가 겹쳐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는 탓에, 손을 빼내기가 어려웠다.

“힘들어.”

손바닥에 와 닿는 입술의 움직임과 윤태희의 축축한 숨결에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등골에 아지랑이처럼 무언가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더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재겸이 잡힌 손에 힘을 줬다. 손을 놓으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순순히 떨어지는가 싶더니,

“네가 내게 다정할 때마다… 나는 삶의 희열을 느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태희가 겹쳐 쥔 손 위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제 이마를 부딪쳤다. 마치 기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랑 밥 먹어….”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뭐?”

“가끔은 차도 마셔 주고… 내가 시시한 농담을 하면, 재미없어도 웃어 줘….”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가끔은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 조수석에….”

윤태희는 제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발로 험하게 짓밟아서, 무례하게 비벼 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대로 꺼뜨렸노라 믿었다.

그렇게나 불씨를 꺼뜨리려고 애를 썼는데도, 고작 이런 사소한 손길 한 번에 너무나 손쉽게 되살아났다. 부슬비에 젖은 축축한 마음속에서도 들불처럼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는 것. 종국에는 전부 불태우고야 마는 것.

“그리고….”

재겸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말을 흐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윤태희가 말했다.

“아니,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겹쳐진 손등 위로 툭,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래,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연약하던 빗줄기는 어느새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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