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42)화 (142/348)

#142

그날 재겸은 윤태희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윤태희는 대답했다.

‘아니, 안 아파.’

그러나 다음날, 윤태희는 병가를 내고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덕분에 제1팀 사무실 분위기는 하루종일 우중충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윤 수석을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윤태희가 직접 ‘아파서 집에서 쉬겠다’라고 말한 적은 이번이 최초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윤태희는 평소 자주 지각을 하고, 걸핏하면 스케줄을 제멋대로 바꿔 대서 근태가 그리 성실한 편은 아니긴 했지만… 이번처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병가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강이빈의 대타로 현장에 나섰던 윤태희는 혹독한 열병을 겪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던 차에 독한 술을 마셨고,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쫄딱 맞았으니 몸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윤태희는 그 다음날도 병가를 냈다.

윤태희가 자리를 비운 지 이틀째,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재겸은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윤태희에게 연락해볼까 말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뚜렷한 용건이 없으면 상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필요 이상으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재겸은 어쩔 수 없이 윤태희가 걱정되었다.

만약 그날 같이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윤태희가 아프든 말든 뭔 상관인가 싶었을 것이다. 아니, 걱정되더라도 최소한 티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겸은 윤태희와 몇 번 충돌한 이후로, 두 번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 은륜지를 터뜨리고 나서 둘이 함께 도망쳤을 때, 그때만큼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살짝 물렁해졌다.

그래서 재겸은 저의 손등에 이마를 묻고 있던 윤태희를 모질게 밀어내지 못했다. 그날따라 윤태희는 어딘가 깨질 것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게다가 비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살짝 풀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살짝 미련이 남아서, 전처럼 지낼 수 있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랑 밥 먹어. 가끔은 차도 마셔 주고, 내가 시시한 농담을 하면 재미없어도 웃어 줘. 그리고 오늘처럼 가끔은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그러나, 그와 별개로 윤태희가 대체 저에게 뭘 바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언제는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넌 내 장기 말이라는 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둥 입에 칼을 물고 퍼부어 대더니… 이렇듯 윤태희의 태도가 오락가락하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재겸은 휴대폰을 꺼내 윤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윤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민하던 재겸은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야갱찬냐.넌억덯게그렣게약해바졋서.」

야, 윤태희. 너 몸은 좀 어때? 넌 어떻게 신체가 그렇게 약하니?

「울희집에와.메사니한테치료바더.너ㅅ싹.나사」

아프다니 걱정이다. 우리 집에 와서 메산이에게 치료를 받는다면 금방 나을 텐데.

「아님은ㅇ너애집어딘데..약수갇다줌ㅏ.」

정 몸이 아파서 오기 힘들다면 집 주소를 알려 줘. 메산이한테 약수 받아서 갖다줄 테니. 직접 치료받지 않아도 그걸 마시면 금방 나을 거야.

……와 같은 사려 깊은 행간을 담아서 메시지 전송을 완료한 재겸은 부엌으로 가서 국그릇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야, 메산아.”

식탁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있던 메산이가 똘망똘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재겸이 코를 긁적거리며 국그릇을 내밀었다.

“여기다 시원하게 토 한 사발 해 봐.”

“니예?”

재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윤태희가 아프대. 정화부에서 받은 약수도 안 통하고, 지금 다 죽어 간다나 봐… 아무튼 윤태희에게 줄 약수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네에? 윤 도령님께서 편찮으셔요? 어쩌지요!”

그러자 메산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기꺼이 국그릇을 받아 들었다. 메산이는 오 분쯤, 명상에 빠져 있다가 뿌에엑, 토를 했다. 재겸은 굴러다니던 물통에 메산이의 토… 아니, 이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약수를 옮겨 담은 뒤, 소파에 앉아 윤태희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윤태희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

이튿날 저녁,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윤태히」

“…….”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던 재겸은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건너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멀쩡한 것을 보니 다 나았나? 재겸은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 보았다. 몸은 좀 어때. 근데 너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사람이 생각해서 문자 보냈더니 답장도 안 하고 사람을 우습게 아는구나. 하긴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지. 다시 너랑 전처럼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등신이었다. 됐고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항시 명심하길 바란다…

[나리야.]

다행히 할 말을 정리하기 전에 윤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리야.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종종 쓰던 호칭에, 가시 돋친 말을 장전하고 있던 재겸의 기세가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왜.”

[어디야?]

“왜?”

[아직 출발 안 했으면 같이 출근할까. 지금 대문 앞인데.]

뭐?

재겸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 보니 정말로 윤태희의 세단이 와 있었다. 성큼성큼 조수석 앞으로 갔더니 지잉, 소리와 함께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윤태희가 상체를 슬쩍 숙이더니, 재겸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안녕, 사흘 만에 보네.”

“…….”

“별일 없었어?”

“어.”

재겸은 시큰둥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다시는 네 차에 타지 않겠다는 선언은 어느새 없던 일이 되었다. 윤태희는 그대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가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슬쩍 곁눈질해서 윤태희를 훔쳐보았다. 얼굴이 좀 상했는지, 살짝 까칠해 보였다.

“…….”

잠시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재겸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아픈 건 어때.”

윤태희는 앓아누웠던 이틀간 마음 정리를 했다.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속마음을 숨기는 것은 윤태희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지난 십 년간 해왔던 일이었으므로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대로 묻었노라 생각한 감정은 그대로 켜켜이 쌓여서 열병으로 자라났다. 가장 큰 문제는 윤태희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재겸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 능숙한 윤태희는 자신의 감정에 미숙했다. 그래서 윤태희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엄격하던 윤태희에게 있어 첫 패배였다. 한 걸음 물러선 윤태희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내가 당장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당장 너에게 원하는 것은……

너와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가끔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일. 너를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오는 일.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하는 일, 그리하여 복수에 성공함으로써 너를 실패하는 일.

나는 정말 그 정도면 될까. 정말 그 정도면 될까…?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윤태희는 답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될 거라고, 윤태희는 믿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너를 실패했으므로.

“밥 먹었니?”

그런 마음가짐으로, 윤태희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안 먹었어.”

“그럼 나랑 같이 식사할까.”

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윤태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말은 윤태희가 건넨 화해 신청이었다는 것을. 차 끌고 데리러 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긴 했는데, 윤태희도 나랑 전처럼 지내고 싶은 게 틀림없다. 서로 한동안 냉전 상태로 지냈는데,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생각을 고쳐먹은 건지, 그새 철이 든 건지….

어쨌든 얼굴 붉히는 사이보다는 잘 지내는 편이 좋았다. 재겸은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었다.

“마음대로 해.”

재겸이 한참 만에 대꾸했다

***

차를 대고 가게 앞에 선 윤태희가 가게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돌쇠네 백반’

아까 전, 윤태희는 재겸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그에 재겸은 본청 근처에 팀원들과 몇 번 가본 식당이 있다고 그리로 가자고 했다. 사실 윤태희는 재겸이 아무거나 괜찮다고 할 것이라 예상하고, 점찍어둔 식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파스타와 화덕 피자를 파는 곳이었는데, 재겸이 선뜻 가고픈 식당이 있노라 의사를 밝혀온 터라 흔쾌히 핸들을 틀었다.

그리고 재겸이 말한 식당은 종로 2가 구석에 있는 다 허물어져 가는 백반집이었다.

“…….”

가게는 한눈에 보기에도 꽤 허름했고 연식이 있어 보였다. 돌쇠네 백반은 제1팀 팀원들의 단골집이었으나, 윤태희는 팀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 초저녁부터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 번 와 봤다는 말이 사실인지, 재겸은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태희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벽면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대부분이 생선구이로, 메뉴가 꽤 단출했다.

“뭐 잡숴.”

가게 사장이 물통과 수저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사장은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다. 입청 이후로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밥을 먹었던 재겸은 이제는 제법 주문을 잘할 수 있게 됐다.

“굴비 백반 하나랑 꽁치구이 백반 하나 주세요.”

메뉴판을 쳐다보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평소 비린 걸 싫어해서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다른 거 먹을래, 라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일 때였다.

“넌 뭐 먹을 거야.”

재겸이 윤태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내 것도 같이 주문한 게 아니라, 두 개 다 본인 메뉴…….

재겸의 먹성을 아는 윤태희는 ‘그걸 다 먹을 수 있겠어?’라든지, ‘혼자서 백반을 두 개나 먹는다고?’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럼 전 뚝불 하나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윤태희는 물컵에 물을 따라서 재겸의 앞에 놔주었다. 재겸은 물을 마시며 벽 한 쪽에 붙은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이 시간대마다 방영하는 저녁 연속극이 한창이었다. 재겸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자, 윤태희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물었다.

“드라마 보는 거 좋아해?”

“응.”

“드라마 제목이 뭐예요?”

윤태희가 물었다. 재겸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금싸라기 내 사랑.”

“…….”

재겸은 저 드라마 내용을 소개해 주었다. 입청하기 전에는 매일매일 챙겨보던 연속극이었다. 윤태희는 잠자코 재겸이 말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사이, 다양한 밑반찬과 함께 재겸이 주문한 생선 백반이 먼저 나왔다. 윤태희가 딸려 나온 공깃밥을 밀어 주며 말했다.

“먼저 드세요.”

“알았어.”

재겸은 공깃밥 뚜껑을 열고 밥 한 숟가락을 크게 펐다. 그리고 굴비 대가리를 뚝 떼서 그 위에 올렸다. 물을 마시며 재겸이 먹는 것을 지켜보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얼어붙었다.

“잠깐만. 잠깐만….”

윤태희가 황당한 얼굴로 재겸의 첫술을 제지했다.

“왜?”

수저를 들던 재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생선 머리를… 머리를 왜 먹니.”

윤태희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거 원래 먹는 거야. 어두육미(魚頭肉尾) 모르냐?”

“…….”

생선은 머리가 제일 맛있고 육고기는 꼬리 쪽이 제일 맛있다는 옛말이 있긴 했다. 없는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호방하기 짝이 없어서, 윤태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먹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보통은 생선 대가리를 먹더라도 거기서 살만 발라 먹지 않나?

“그걸 그렇게… 통째로 씹어먹는다고?”

“응. 왜?”

“…그게 씹히긴 해?”

재겸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꼭 씹으면 다 먹혀.”

“…….”

예전에는 생선이 귀해서 머리도 그냥 먹었다. 고기보다 먹기 힘든 게 생선이었다. 재겸은 훈계를 마친 뒤 식사를 시작했다. 커다란 가시를 들어내더니, 작은 잔가시들은 발라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을 낸 뒤 그대로 밥에 올려서 통 크게 먹었다. 그런 재겸을, 윤태희는 턱을 괴고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 고양이야?”

“뭐?”

“농담이에요.”

뒤이어 뚝불이 나왔다. 윤태희도 식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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