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재겸은 얼굴에 쓴 탈을 벗어 던지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대로 깊은 호수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날렵한 입수로 잠잠하던 호수의 표면에 거센 파문이 일어났다.
재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남생이는 입수하는 순간의 충격으로 인하여 거센 물보라에 휩쓸렸다. 그대로 멀리 떠밀려 나갔다가, 이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남생이는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고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요?”
금세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은 재겸이 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생이는 재겸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일단은 윤태희부터 찾아야 했다.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역시나였다. 저 멀리, 마치 물속에서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윤태희가 보였다.
재겸은 곧바로 윤태희를 향하여 잠영했다. 양팔을 넓게 휘저으며 윤태희에게 다가갈 때였다. 갑자기 호수 바닥에서 덩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나더니 그대로 재겸의 발을 칭칭 휘감아 묶었다. 물속에서 남생이가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요! 이것이 제가 말한 그 덩굴입니다요!”
덩굴이 끌어당기는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발목을 잡힌 재겸이 컥, 하며 기포를 뱉었다. 윤태희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재겸은 발목에 휘감긴 덩굴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빨로 끊으려고도 해 보고, 손에 귀기를 실어서 잡아당겨 보았으나 무용했다. 가죽처럼 질긴 덩굴은 꼼짝도 안 했다.
점점 숨이 모자랐다. 재겸이 이를 악물 때였다.
“겸아,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재겸의 얼굴이 삽시간에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
그리운 검은 도포 자락이 물속에서 부드럽게 나부꼈다. 세월의 톱니에 갉아 먹혀서, 이제는 기억 속에서조차 흐릿해진 지 오래인 목소리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과거일 뿐이고, 지나간 기억일 뿐이라고 남생이가 말했었다.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뛰어들기는 했지만, 재겸은 이 순간 너무나 손쉽게 무너졌다.
“주인님! 무엇을 보시든 전부 허상입니다요! 명심하셔야 합니다요!”
어깨에 매달려 있던 남생이가 애타게 소리를 질렀으나, 재겸의 움직임은 어느 순간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성미 고약한 제자야.”
묘정이 눈앞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단 하루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당신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허상일지언정 당신이 내게 나타나 용서를 빌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신은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꿈결 속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
물속에서 휘날리는 도포 자락을 보며, 재겸은 멍하니 생각했다.
묘정,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었어……?
***
소년이 눈을 떴을 때는 깊은 밤중이었다.
소년은 몽롱한 눈을 끔뻑거리며 서까래가 얽힌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전까지 뭘 했는지, 언제 잠이 든 건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제법 깊이 잠들었던 것 같다. 머리가 멍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더라….
소년은 차근차근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조반을 챙겨 먹고 묘정과 산에 올랐었지. 그리고 정오쯤 마을로 내려가서 고을 현감이 있는 관아에 들렀었다. 현감의 외동아들이 며칠 전부터 흉몽을 꾸고, 헛것을 본다고 하여, 현감은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묘정을 불러들여서 일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을 봐주고 그 대가로 삯을 받아 왔다. 그리고 또….
‘…….’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소년이 어느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소년이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가 흠칫 입을 틀어막았다. 지레 놀라서 옆을 힐끔 내려다보자 단정하게 누워 잠든 묘정의 얼굴이 보였다.
낭패였다. 해시(亥時)(21시~23시 사이)에 냇가 앞에서 관아에서 봤던 여자애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묘정 몰래 나가려고 묘정이 잠들기를 기다리며 잠든 척을 한다는 게 그만 진짜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까 낮에 관아에 갔을 때, 소년은 관노의 딸인 서말이를 만났다.
묘정이 일을 해결하러 현감의 가족이 거처하는 내아로 건너갔고, 그 사이 소년은 관아를 구경하며 묘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너른 관아 마당 한쪽에는 관노들이 기거하는 관노청이 있었는데, 관노청 누마루 위에서 여자 관노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거기서 저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또래 아이, 서말이를 보았다.
서말이는 바느질을 하던 도중에 무언가 심부름을 받았는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노청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소년은 슬그머니 서말이에게 갔다.
‘저, 저기….’
서말이가 의아한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
‘응? 뭔데?’
‘그게… 저기, 나 바느질 좀 알려 주라…….’
소년은 숫기 없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나는 스승과 단둘이 사는데 우리 둘 다 바느질을 할 줄 몰라서, 옷이 해지거나 떨어지면 그대로 입고 다니거든. 그리고 얼마 전에 둘이서 검술 수련을 하다가 내가 옷고름을 베어 버린 일이 있는데, 그때 벤 옷고름이 너덜거려서, 바느질로 붙여 주고 싶어서….
묘정은 언제나 똑같은 검은 도포만을 입고 다녔다. 오늘 입고 온 것도 바로 그 옷이었다. 묘정은 별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소년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옷고름을 붙여 주고 싶다고?’
이야기를 들은 서말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옷을 가져다주면 자신이 직접 바느질해서 옷고름을 붙여 주겠노라 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방법만 알려 주면 내가 직접 할게.’
그에 서말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얘, 세상천지 사내 애가 무슨 바느질을 한다니?’
숙맥인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괜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사, 사내라도 바느질할 줄 알면 좋지, 뭐….’
서말이는 흐흐 웃더니,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 알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 소년이 시무룩한 기색으로 “알겠어…….” 작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얘, 그러면 말이야. 이렇게 하자.’
서말이는 해시에 냇가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다.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나와서 바느질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소년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해서, 소년은 늦은 밤 서말이와 만나게 되었다.
소년은 묘정의 옷고름에 이왕이면 멋진 자수를 놓아서, 깜짝 선물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바느질을 배우러 나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잠든 척을 하다가 몰래 나오려고 했는데…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몸이 곤하여 깜빡 잠이 들고 만 것이다. 어느덧 때는 깊은 한밤중이었다. 소년은 고민에 빠졌다.
아씨. 어쩌지? 지금이라도 나가 볼까?
소년은 곁에 누워 있는 스승을 내려다보다가,
‘묘정… 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다행히 묘정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소년은 손바닥을 들어 묘정의 얼굴 위를 훠이훠이 저어 보았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창호지로 덧댄 문을 열고 나왔다. 소년은 마루 한쪽에 걸어 두었던 묘정의 옷을 챙겨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냇가 근처에 도착하자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묘정의 옷을 품에 안고서 냇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바느질 잘하는 애야….’
오늘따라 달빛이 밝아서 밤이 환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서말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기다리다가 먼저 가 버린 건가 싶어서 소년이 이마를 긁적거릴 때였다. 커다란 바위 뒤에서 웬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얘! 왜 인제야 오니?’
소년이 파드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댕기 머리를 곱게 땋은 서말이가 작은 봇짐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서말이가 샐쭉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기다려도 안 오길래 인제 가려고 했어.’
‘어… 깜빡 잠들어서….’
소년이 살짝 상기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서말은 봇짐 속에서 여러 실타래와 반짇고리 함을 꺼냈다. 소년은 달빛 아래서 서말에게 바느질을 배웠다.
‘자. 이렇게 여기에 먼저 집어넣고, 이 밑으로 쑥 빼서는….’
밤이 어둡기도 하고, 손길이 워낙 서툴러서 소년은 계속 바늘에 찔렸다.
‘아 씁… 따거워, 썅.’
소년이 작게 욕을 뱉으며 손가락에 맺힌 피를 빨아 먹었다.
‘아 거참. 몇 번을 알려 줬는데도 그걸 못 하니? 그냥 내가 해 줄게.’
‘아냐. 내가 할게.’
소년은 서말에게 꾸중을 들어가며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둘은 바느질을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소년은 인간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 데다가 여자를 유독 어려워했기에 서말이 말을 건넬 때마다 쩔쩔매며 대답을 했고,
서말은 “너도 귀신 볼 줄 알아?”, “너는 그럼 박수인 거니?”, “그럼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거야?” 하면서 온갖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나저나 네 아버지 말이야. 참 훤칠하시더라. 아까 관아에 잠깐 오시고 나서부턴 다들 네 아버지 얘기만 하고 있어. 참으로 멋지신 분이라고 말이야.’
서말이 발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소년은 어색하게 대꾸했다.
‘아버지 아니야. 내 스승이야.’
‘뭐?’
서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하긴, 좀 젊어 보이긴 하더라.” 했다.
‘그럼, 네 스승님은 여적 장가도 안 드시고 너랑 둘이서 지내시는 거니?’
‘어….’
‘정말? 영영 상투 안 트신다니? 딱 봐도 혼기가 지나신 것 같든데….’
‘그러게….’
‘곁에 네가 붙어 있으니, 사람들이 애 딸린 홀아비인 줄 아는 거 아니니?’
‘…….’
계속되는 질문에, 소년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