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겸아.’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묘정이 마당에서 목소리를 냈다.
‘어제 도포를 걸어 두었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구나. 혹시 보았느냐?’
소년은 시치미를 뚝 떼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묘정은 한참 동안 옷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간밤에 산짐승이 내려와 옷을 물어 간 모양이구나. 하는 수 없지, 아끼는 옷이었건만….” 하고 중얼거렸다.
소년은 못 들은 척하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검은 도포는 묘정이 아끼는 옷이니 더더욱 제 손으로 기워 주고 싶었다. 바느질에 능한 서말이라면 반나절도 안 되어 자수를 완성했겠지만, 소년은 이제 막 바느질을 시작한 초심자였다. 목표는 초록색 나뭇잎 모양으로 된 자수를 놓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흘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
점심에는 마을에서 혼례가 열린다고 했다. 소년은 묘정과 함께 혼례를 보러 가기로 했다. 혼롓날은 마을 잔치나 다름없었다. 혼례가 열리는 곳으로 가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묘정은 소년을 쑥 들어서 담장 위에 앉혀 주었다.
‘우리도 온 김에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가자꾸나.’
키가 큰 묘정은 뒷짐을 지고, 담장 너머로 혼례식을 구경했다. 혼례복을 입은 신랑·신부가 발그레한 얼굴로 맞절을 했다. 담장 위에 앉아 있던 소년은 불현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묘정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도를 떠돌아다니는 생활 속에서도 묘정은 어딜 가나 시선을 받는다. 가끔 쓰개를 뒤집어쓴 여인이 밤중에 찾아오기도 했다.
묘정도 혼인을 해서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묘정에게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나 때문에 애 딸린 홀아비 취급을 받으니까….
‘묘정, 묘정은 왜 혼인 안 해?’
아주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묘정이 되물었다.
‘음? 나 말이냐?’
‘응. 혼기 한참 지났잖아.’
잠시 말이 없던 묘정이 이내 삐죽 웃으며 짓궂게 대답했다.
‘그야 딱 보면 모르겠느냐? 내가 혼인을 했다가는 눈물을 흘리며 앓아누울 여인이 수십 수백이기에 그들의 무사를 빌고자 내 상투를 안 튼 것이란다.’
‘…….’
소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묘정이 슬쩍 헛기침을 했다.
‘혼인은 혼자서 하느냐, 짝이 있어야 하지….’
묘정은 아주 잘생겼고, 훤칠하고, 성격도 다정하니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명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년은 질투가 났다. 소년은 묘정과 저 사이에 이렇다 할 끈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묘정이 가정을 꾸린다면 더이상 자신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었다. 왜냐면 저는 묘정의 가족이 아니므로. 그때는 떠나야만 한다.
묘정이 만약 여인과 혼인을 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더 이렇게 함께 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가끔 얼굴 보러 가는 정도이려나….
날 때부터 혼자였던 소년은 문득 쓸쓸해졌다.
***
바느질을 배운 지 사흘째, 마침내 나뭇잎 자수가 거의 완성되었다.
‘고맙다. 이제부터는 혼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어.’
소년은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꿍쳐둔 엽전 한 냥을 꺼냈다.
‘에이. 됐다, 얘.’
서말이에게 엽전을 건네자, 서말이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받아. 고마워서 그래.’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횃불 떼가 나타나더니, 관아의 나졸들이 너덧 명 튀어나왔다. 서말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서말이 네 이것이. 밤중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바느질을… 이 아이가 바느질을 알려 달라고 하여….’
나졸들은 서말이와 소년을 관아로 끌고 갔다.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관아는 곳곳에 불을 밝혀 놓은 상태였다. 현감은 눈을 치뜨고 소년을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둘이서 뭔 작당을 한 것이지?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소년과 서말이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바느질을 배운 것이라 말해도 현감은 믿지 않았다, 서말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소년을 다그쳤다.
‘그날 불러들인 네 아비라는 자가, 필시 무얼 본 게지? 그래서 너에게 귀띔을 해 주었고, 너는 그것을 서말이에게 일러바치려고 한 것이지? 그렇지?’
소년은 현감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바느질을 배우려 만난 것이라고 대답하니, 현감이 분개하여 소년의 뺨을 철썩 때렸다.
‘집어치우지 못할까! 사내놈이 무슨 바느질을 하느냐.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짝, 소년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
‘하찮은 핏줄이 어디서, 틀림없이 네 아비에게 뭔 소리를 들은 것이지? 뒷얘기를 흘려 서말이를 구슬렸구나! 내 앞길에 무슨 흉화를 몰고 오려고…….’
소년이 살기 어린 눈을 뜨고 현감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뭔데 나를 때려.’
묘정도 나를 때린 적이 없는데….
갑자기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머리가 부스스 솟아오르며 소년이 희번덕한 눈으로 현감을 쳐다보았다. 집채만 한 분노가 몰아닥치더니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소년의 몸 주위로 정체 모를 붉은 안개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갑자기 명치를 중심으로 뭔가 딱딱하게 뭉치는 듯하더니, 이내 그것이 알처럼 툭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년이 나졸들의 손을 단숨에 떨쳐 냈다.
‘여봐라, 묻지 않느냐? 네가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느냐.’
소년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 이놈, 최씨 대주(大主)(무속 신앙에서 집안의 남자 주인을 이르는 말)야. 감히 누구 그릇에 손을 대느냔 말이다.’
어느덧 소년의 눈에서는 섬뜩한 이채가 돌고 있었다.
‘흉화를 몰고 온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내 친히 흉화를 내려 주마.’
관아 마당을 밝히고 있던 모든 횃불이 일시에 꺼졌다. 어느새 소년의 눈에서 보이는 것은 흰자뿐이었다. 나졸들이 식겁하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흉화를 내려 주랴? 그래, 다음 추수철부터 이 고을에는 매년 흉년이 들 것이고 네 가문은 대를 잇는 족족 홍역과 괴질에 걸려 죽어 나갈 것이다. 밤마다 피눈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내 그리하겠다. 모든 집이 역병을 피해 가도 네놈 집만은 거쳐 갈 것이다. 내 도와주마. 내 그리해 주마.’
‘뭐… 뭐라고…?’
‘네 이놈, 최씨 대주야. 무어가 그리 두려워 벌벌 떠느냐? 왜, 이 아이가 귀신을 본다 하니 네 더러운 내력을 읽은 줄 알고, 그래서 혹 서말이가 네 씨라는 것을 일러바쳤는가 싶어 벌벌 떤 것이냐? 이 몸 수위에서 내 모를 줄 알았느냐?’
‘…….’
‘어디 그뿐이겠는가? 네 이놈, 최씨 대주야. 아니면 네가 네 형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러바칠까 두려웠느냐? 집안 장손에게 비상(독약)이 담긴 약을 올리고, 그 목숨을 앗아 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지? 그렇게 벼슬길에 올라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탐관질을 해 대니 어찌 집에 우환이 들지 않겠는가? 내 그걸 곱절로 얹어서 되돌려 주겠다.’
‘…….’
‘뭘 그리 놀라느냐? 이 어리석은 인자(人子)야. 이 아이가 한 말은 참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자는 무엇도 털어놓지 않았어. 허물을 숨기고 싶었다면 입을 다물 것이지, 제 발 저려 감히 누굴 건드리느냐? 네가 정녕 치부를 숨기고 싶었다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좋다, 내가 전부 밝혀 주마.’
소년이 불현듯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현감을 바라보았다.
‘네 이놈. 인제 보니 이 벼슬자리도 고관대작에게 금괴를 바쳐 얻었구나?’
최씨 현감의 낯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현감은 어느새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다.
‘그, 그걸 어떻게… 당, 당신은… 대체… 누… 누구….’
현감의 질문에 소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그래, 네 눈이 보기엔 내가 누구 같으냐? 무엇으로 보이느냐?’
‘…….’
‘여봐라, 최씨 대주야. 묻지 않느냐.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
‘왜 말이 없느냐? 그래, 정 모르겠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친히 알려 주마.’
붉은 안개에 휩싸인 소년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현감에게 성큼성큼 다가서기 시작했다. 현감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헉, 허억… 오, 오지 마…….’
흰자위를 뜨고 다가온 소년이 마침내 현감에게 손을 뻗을 때였다.
‘그만!’
날카롭게 제지하는 음성이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 뒤에서 소년의 목덜미를 확, 잡아챘다. 흰자위를 뜨고 현감을 바라보던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묘정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는 눈에 힘을 주고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
‘…….’
묘정이 몹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좌정(坐停).’
그 순간, 섬뜩하게 돌아가 있던 흰자위로 동공이 제 자리를 찾았다. 소년을 감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일시에 흩어졌다. 갑자기 이상한 탈력감이 들더니, 오금에서 힘이 탁 빠져나갔다. 소년이 그대로 기절하여 쓰러질 때였다.
‘큰 죄를 지었나이다.’
묘정이 그대로 땅 위에 엎드리더니, 현감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이를 바르게 이끌지 못했으니 모든 게 소인의 불찰이며,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제 아이는 허깨비에 씌어서 가끔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고는 합니다. 방금 전에 제 아이가 한 말은 전부 거짓이며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묘정이 고개를 들더니, 주변 나졸들과 관노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저 역시 내력을 보고 들을 줄 아는 박수라서 압니다. 전부 허언입니다. 뚫린 입으로 허튼 말을 뱉었으니 부디 못 들은 것으로 여기시고 잊으시지요.’
‘…….’
‘사흘만 시간을 주시면 당장 이 고을을 떠나겠나이다. 백성을 살피는 현감께서는 부디 노여움 푸시옵고, 너그럽게 덕을 베푸시어 치정 하십시오….’
‘…….’
묘정이 엎드려 땅에 이마를 박았다. 관노들이며 나졸들이며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현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감은 벌벌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다, 다, 당장… 당장 이곳에서 나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