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벌써 몇 판째 선오가 이겼다.
‘또 장군이에요.’
기분이 좋아진 선오가 웃으며 말했다. 하루종일 윤 노인과 장기를 두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장기에 몰두했더니 악몽은 어느 순간 휘발되어 더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린 지경이 되었다.
어느덧 바깥에서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윤 노인은 찬 거리를 사 오겠다며 집 밖으로 나갔다.
윤 노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선오는 방 안에서 잡귀들이랑 놀았다. 잡귀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대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라면 문을 두드릴 일이 없으니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평상시 선오였다면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거나 몰래 밖으로 나갔을 테지만, 웬일인지 오늘따라 선오는 바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얌전히 방 안에 누워서 책을 들여다 보았다.
‘얘. 선오야.’
그때, 손목에 있던 시시가 말을 걸었다.
‘원래는 끼어들 생각이 없었는데, 안 되겠어.’
‘응?’
‘지금 많이 위험해서 말이지’
‘뭐가?’
‘너 정말 이대로도 괜찮겠어?’
선오가 눈을 깜빡이며 시시를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으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좁은 세상, 이 쓰레기장이 너의 안식처냐고 묻는 거야.’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눈을 납작하게 떴다.
‘평생 이곳에서 안온할 자신이 있어?’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지 말랬어. 이젠 말 잘 들을 거야.’
‘본향의 표식이 아깝구나. 정말로….’
시시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넌 겁쟁이다.’
선오가 다시 책을 들여다보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난 겁쟁이야.’
***
마침내 재겸이 번쩍 눈을 떴다.
발목을 휘감고 있던 덩굴은 어느덧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덩굴에서 풀려난 재겸은 그대로 헤엄쳐서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과거 속에 잠든 윤태희는 평온하고도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멱살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으나, 윤태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재겸은 곁에 있던 남생이를 쳐다보았다. 물 속이라 뭐라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남생이는 용케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재겸에게 그랬던 것처럼 윤태희의 귀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윤태희는 깨어나지 않았다.
“주, 주인님! 아무래도 이 자에게는 남은 숨이 없는 것 같습니다요.”
남생이의 말에 재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뭐?
재겸은 황급히 남생이를 밀어냈다. 윤태희의 뺨을 마구잡이로 매섭게 내리쳤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재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절박하게 손을 휘둘렀다. 윤태희의 고개가 몇 번이고 세차게 돌아갔다. 입술이 터지며 먹물이 퍼지듯 물속에 피가 번져 나왔다.
재겸이 다시금 손을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혹시 이 애는 지금… 깨어나기 싫은 게 아닐까?
불현듯 머릿속을 비집고 떠오른 생각에 재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너는 그 잠에서 깨기 싫을지도 모른다. 죽지 않는 나와는 달리, 너는 이대로 모든 걸 잊고 행복한 기억 속에서 삶이 끝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어차피 죽지 못하니까 상관없지만, 널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너에겐 더 좋은 일이 아닐까? 너를 다시 깨우는 것이 어쩌면 내 이기심은 아닐까.
왜 나를 깨웠느냐고 나를 원망하면 어쩌지. 고통을 잊고 과거 속에서 행복한 너를 다시 이 지옥으로 불러들이는 게 아닐까. 나에게 널 깨울 권리가 있을까.
과거 속에서 행복한 너를 깨우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어쩌면, 너의 낙원을 망가트리는 게 아닐까…….
윤태희의 뺨을 후려치려던 손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윤태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재겸은 몇 번이고 뺨을 후려쳤던 손을 뻗어서 윤태희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천천히 윤태희에게서 멀어졌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마침내 물 위로 솟아올랐다. 푸학, 재겸이 괴롭게 기침을 토하며 물을 뱉었다. 재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가의 물기를 훔쳐냈다.
“저대로 두고 떠나실 것입니까요?”
뽀르르 뒤쫓아온 남생이가 재겸의 어깨에 달라붙어 물었다.
“…….”
눈가를 닦던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숨결이 진정되었다.
비로소 재겸은 모자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채운 재겸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잠든 윤태희를 향해 헤엄쳤다. 재겸은 윤태희의 코를 쥐고,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재겸은 윤태희에게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재겸은 오늘의 숨을 과거의 선오에게 불어 넣었다.
돌아와라.
이 지옥으로…….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깨워야겠다. 내 이기심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 이 삶을 끝내려면 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주와 메산이에게 약속했으니까. 너를 집에 초대하겠다고. 그러니까 나는 너를 깨울 거야. 너를 깨워서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물어봐야 해.
나의 내일에는 네가 있었어.
그러니까 나는 너를 오늘로 데려올 것이다.
윤태희에게 숨을 나눠준 재겸은 곧장 바닥으로 헤엄쳤다. 호수 밑바닥에는 윤태희의 창포검이 떨어져 있었다. 재겸은 창포검을 집어 들고 검집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철컥거리며 흔들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재겸은 눈을 감고 속엣말로 되뇌었다.
‘은기. 기묘. 철천지.’
닫혀있던 검집이 열렸다. 재겸의 눈도 스르륵 열렸다. 잘 벼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겸은 단단하고 또렷한 눈으로 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가 할 일은 너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
‘윤태희’를 윤태희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재겸은 칼자루를 쥔 손아귀에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귀기를 실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잠잠하던 물속에서 물살이 일더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처럼 요동했다.
호수의 표면이 파도처럼 물결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시작된 파문은 점점 퍼져나가 마침내 호수 전체를 집어삼켰다. 어느덧 검을 쥔 손아귀를 중심으로 거대한 나선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재겸은 호수 밑바닥을 향하여 귀기 실린 검을 횡으로 힘껏 휘둘렀다.
콰콰쾅——!
검에서 떨어져 나간 무형의 귀기가 벼락처럼 호수 바닥에 내리꽂혔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동굴 전체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어마어마한 귀기는 호수의 지반을 가르며 땅과 땅 사이로 절벽처럼 거대한 틈을 만들어냈다. 호수 바닥이 사선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동굴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
대문을 쾅쾅 두들기던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았다. 엎드려 책을 읽던 선오는 사라락, 책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방문 손잡이가 덜걱덜걱 흔들렸다.
꼭 누군가 잠긴 문을 열려는 듯했다.
그에 잡귀들은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선오도 왜인지 덜컥 겁이 났다. 선오는 읽고 있던 책을 내팽개치며 곁에 있던 수살귀를 부둥켜 안았다.
‘무, 무서워.’
그러자 손목에서 시시가 물었다.
‘왜? 뭐가 무서운데?’
‘문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선오가 어깨를 떨며 말했다.
‘어쩌면 ‘놈’이 온 걸지도 몰라.’
선오의 말에, 시시가 물었다.
‘놈이라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놈이 올 거라고.’
선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진 전부를 빼앗아 갈 거고, 모든 것을 망칠 거야.’
‘…….’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시가 눈을 감았다.
‘선오야.’
시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이곳이 네 낙원이라면, 그래서 이 좁은 쓰레기장에 틀어박혀 살기로 했다면. 이제부터 너는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창문이 조금만 흔들려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다.’
‘…….’
‘네가 이 좁은 쓰레기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윤원중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리며 벌벌 떠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거야. 정말 그래도 괜찮아?’
‘…….’
선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오야. 네 말처럼 놈이 온 걸지도 몰라. 그래,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어쩌면 너의 운명. 너의 불행. 너의 나락.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무서운 거지?’
‘…….’
‘문을 연 것을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려운 거지? 그렇지?’
‘듣고 싶지 않아. 그만 말해.’
그러나 시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맞아. 너는 문을 연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 수도 있어. 그때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반대도 똑같아. 넌 오늘 문을 열어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평생 후회할 거다.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한, 넌 문밖에 서 있는 게 뭐였는지 영영 알 수 없을 거야.’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알겠어? 원래 ‘후회’라는 건 그런 거야.’
‘아니야! 전부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선오가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그만해!’
괴로워하던 선오는 내팽개쳤던 책을 다시 펼쳤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 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시의 목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테, 테오는 바다에 가고 싶었습니다… 에, 에메랄드빛 바다로 가서, 그래서….’
서둘러 다음 장을 넘길 때였다. 페이지 사이에 뭔가 꽂혀 있었다. 누군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사진이었다. 선오가 멈칫하며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뭐지?’
별 생각 없이 사진을 뒤로 돌려보았다. 그런데, 사진 뒤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
선오의 눈이 서서히 커질 때였다. 갑자기 글자가 뭉개지더니 시야가 어그러졌다. 이상하게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선오가 이마를 틀어쥐며 고개를 숙였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근데 친구는 몇 살이에요? 박제가 된 기분은 어때 재겸아 나라면 유쾌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사활을 걸었어 영원히 닳지 않는 목숨을 바쳐서 내가 널 이기게 해줄게 나례청은 무너질 거야 내가 부술 거니까 나자 그만 두면 나 좀 좋아해주나 모든 것이 ‘그’를 만난 이후부터였어요 꼭 세상이 힌트를 주는 것 같았어 너라고 너를 따라가라고 그는 사실 몰락의 인도자였던 겁니다…….
선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귀를 틀어막았다. 핏대를 세우고 악을 썼다.
‘아니야…!! 아니야!!’
귀를 막아도, 낯설면서도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켜 들렸다.
‘가!! 가란 말이야…!!’
제자리를 빙빙 돌며 선오가 벽에 몸을 쿵쿵 부딪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다시 문이 덜걱덜걱, 부서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선오가 몸을 휘청거리며 문 앞으로 갔다. 선오는 괴롭게 인상을 쓴 채 눈물이 맺힌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밖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넌 대체 누구야?’
결국, 선오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둑이 터진 것처럼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뼛속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들이치며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떨어져 나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땅부터 하늘까지 온 세상이 어항처럼 물에 잠겨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떠내려가던 선오는 간신히 전봇대를 붙잡았다. 물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전봇대를 잡고 아등바등 버틸 때였다.
선… 오… 야….
고개를 돌리니, 수살귀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선오는 잡고 있던 전봇대를 놓고 수살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했다.
마침내 선오의 손에 수살귀의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 윤태희!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뇌중을 후려쳤다. 선오가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선오의 시야에 비친 것은 유성처럼 물속을 가르고 들어오는 크고 작은 낙석들이었다. 동굴이 붕괴하며 풍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밑으로는 지반이 박살 나고, 위로는 바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선오는 소용돌이 호수 안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윤태희!”
그런데, 멸망하는 풍경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태희야——!”
그 순간, 선오는 깨달았다.
문밖에 서 있던 것은 ‘공포의 탈을 쓴 사랑’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