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깊은 물 속에 잠긴 선오는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야? 왜 나를 찾아온 거야?’
과거의 저편에서 선오는 문밖을 향해 물었었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 광경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리는 이 어지러운 틈에서, 선오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던 소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평정심이 완전히 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선오는 끔찍한 전율을 느꼈다.
그래, 내 예상이 맞았어.
역시 너는 함정이었어…….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칼로 반듯하게 자른 것처럼 모든 것이 알맞게 맞아 떨어질 때의 기묘함. 그 불길한 적확함. 스스로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은연중에 바라왔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순간.
언젠가 소년은 말했었다. 세상은 때때로 이유 없이 악의적이라고. 그리고 지금, 선오는 소년이 말했던 ‘악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이 나에게 선사한 악의. 그것은 바로 너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낙원이 붕괴하고 과거가 폐허가 되는 순간, 너는 내 앞에 이렇게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오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나는 너를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것은 예감의 차원이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확신이었다. 모든 이정표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하필 너일까 생각했었다. 나는 어째서 네게 속수무책으로 끌리는 것인지, 너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굳이 너였으면 하는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나를 패망으로 이끌기 위해서 너라는 달콤한 덫을 놓은 것이다. 너는 세상이 내게 품은 악의이자, 함정이었던 것이다.
너는 내 십 년을 무너트리러 왔다.
‘놈이 온 거야. 놈은 내가 가진 전부를 빼앗아 갈 거고, 모든 것을 망칠 거야.’
- 모든 것이 ‘그’를 만난 이후부터였어요. 그는 사실 몰락의 인도자였던 겁니다.
전부 네가…….
“윤태희!”
선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태희야——!”
마침내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손을 맞잡았다. 그와 동시에 강한 힘이 윤태희를 끌어당겼다. 휘몰아치는 호수 속에서 재겸은 윤태희를 한쪽 팔에 안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창포검을 고쳐 쥐었다.
재겸은 옆을 지나는 커다란 바위에 칼끝을 대고 무게를 지탱한 뒤, 힘껏 귀기를 실었다. 칼로 바위를 짚고 올라서는 반동을 이용해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재겸은 윤태희를 안고 그대로 뭍으로 올라왔다.
“푸학, 하!”
수면 위로 올라오니 동굴이 붕괴하고 있었다. 재겸은 거센 기침을 토하며 물을 뱉었다. 윤태희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인지 고요히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당장은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동굴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나가야 했다. 재겸은 윤태희를 등에 업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위가 떨어져 길목을 막고 있거나, 앞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발에 귀기를 싣고 그대로 부수며 달렸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마침내 저 멀리 출구가 보였다. 어느덧 산중에는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동굴을 빠져나온 직후에도 재겸은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동굴이 붕괴하는 여파 때문인지 발밑이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비로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에야 재겸은 윤태희를 내려놓고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쥐고 목소리를 냈다.
“윤… 윤태희!”
재겸은 윤태희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차가운 물 속에 있었기 때문인지 윤태희의 낯빛은 아주 창백했다. 눈까지 감고 있으니 꼭 시체처럼 느껴졌다.
“태, 태희야…!”
윤태희를 부르는 재겸의 숨결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죽은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조금 전에 똑똑히 눈이 마주쳤었다. 분명히 내가 내민 손을 잡았었다.
결국,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대답하란 말이야, 이 씨발새끼야-!”
마침내 윤태희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다시금 뺨을 내려치려던 재겸이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정신을 차렸어! 재겸이 황급히 손을 물리며 윤태희를 내려다보았다.
“괘, 괘, 괜찮아?”
“아니…….”
윤태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찬거리를 사러 나간 할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보금자리는 폐허가 되었고, 잡귀들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졌으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닿을 듯했던 수살귀는 끝내 붙잡지 못했다.
그렇게 선오의 유년은 소용돌이에 산산이 부서져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네가 모든 걸 망쳤어.”
한숨처럼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재겸이 우뚝 굳었다. 윤태희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재겸은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말없이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
왜 저를 깨웠느냐고 질책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윤태희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도 뼈저리게 이해했다. 그럼에도 재겸은 가슴 한 켠이 쓰렸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겸이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그래도 난 후회 안 해.”
재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윤태희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불현듯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분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윤태희는 눈을 질끈 감더니 이를 악물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것을 꾹 삼켜내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래? 나는 후회해.”
윤태희가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쥐어짰다.
“너를 만난 걸 후회해…….”
후회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윤태희는 오래전에 다짐했었다. 후회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후회해봤자 남는 건 자기 혐오와 증오뿐이었다.
‘후회와 반성이 왜 좆같은 줄 알아? 고작 과거를 뉘우치고 반성한 정도로,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는 거야. 한 거라곤 가만히 앉아서 대가리나 굴린 게 전부인데도, 갑자기 죄의식이 옅어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
그러나 사실 윤태희는 일생을 후회 속에서 살았다.
전부 제 탓이었다.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때 문을 열고 나가서는 안 됐다고, 수살귀에게 친절해야 했다고, 그날 이후 매일같이 후회했다.
후회는 꼬리표처럼 낙인처럼 징벌처럼 윤태희를 따라다녔다. 스스로의 악덕을 단죄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던 재겸을 마주한 순간, 윤태희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러려고 태어났구나.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그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던 거야. 이 장면을 보려고 그 추운 눈밭을 걸어서 산속으로 들어갔던 거야. 나는 이러려고 이 땅에 온 거야.
이러려고, 너를 만나려고…….
재겸은 과거의 진창에 떠내려가는 윤태희를 구해냈다. 발목을 붙잡는 족쇄를 잘라내고 유년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윤태희는 그날 문을 연 것을 후회하며, 그 죄의식과 증오를 동력으로 살아온 인간이었다. 오로지 복수만 꿈꿨던 삶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구하러 온 재겸을 본 순간, 윤태희는 처음으로 그날 문을 열고 바깥에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평생 그날 일을 후회해야 해. 눈앞에서 할아버지가 죽었어. 그날 전부를 잃었어. 그런데 너 때문에… 문밖에 있던 너를 만나서 그날 일을 완전히 후회할 수 없게 됐어.”
윤태희는 상체를 세워 앉으며 앞에 앉은 재겸의 얼굴을 똑똑히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너를 만난 걸 후회해.”
재겸은 말없이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눈동자에는 뜨거운 칼날이 실려 있는 듯했다. 날 것 그대로 화를 낼 때는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싶었다.
“널 만나고 나서 전부 엉망진창이 됐어. 이러려고 널 데려온 게 아니라고, 수십 번도 넘게 생각했어. 근데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오래 숨을 참은 사람처럼, 윤태희의 숨결에 점점 격정이 묻어났다.
“너한테 키스하고 나서 매일 후회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이 이상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고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마음을 다잡았어.”
윤태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젖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물에 흠뻑 젖은 윤태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 어딘지 연약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야 할 이유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어. 전부 납득했고, 인정했고, 수긍했어. 그런데 막상 널 보면 그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어.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내가 씨발 드디어 미쳐가고 있구나 생각했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팔을 내렸다.
“근데 이제는 알겠어.”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스스스, 서늘한 바람이 윤태희의 뺨을 어루만지고 떠났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너한테 병을 옮기고 싶었던 거야.”
- 선생님, 어찌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은 파멸이고, 형벌이며, 고역이라는 이름의 병(病)이었던 겁니다.
사랑이 고역이고 형벌이며 ‘병(病)’이라면, 윤태희는 재겸에게 이 병을 옮기고 싶었다. 재겸과 같이 병들고 싶었다. 네가 나로 인해서, 나처럼 아프기를 바랐다. 나는 그래서 너에게 자꾸만 입을 맞추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착각했어. 넌 쓰고 버릴 장기 말이 아니야.”
한 뼘 남짓한 거리에서, 윤태희와 재겸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가슴이 옥죄이는 듯 아프게 저렸다.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넌 군(君)이야.”
재겸은 윤태희가 아까 전부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윤태희를 응시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윤태희가 팔을 뻗더니 재겸의 한쪽 귀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마치 뺨을 잡아 쥐듯 손바닥을 댔다. 희게 질린 손끝은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윤태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재겸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
윤태희는 문득 먼 곳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가슴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뜨거운 응어리를 삭여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은 눈매를 무너트리며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마침내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틀더니, 붉어진 눈으로 재겸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오기에 치받친 것처럼, 울컥이며 내뱉은 고백이었다.
“……뭐?”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뒤통수를 잡고는 얼굴을 확 끌어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뭉개지듯 과격하게 맞닿으며 이마가 부딪쳤다. 손길에 끌려온 재겸이 홀린 듯이 멍하니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윤태희의 손아귀가 재겸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험하게 움켜쥐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윤태희가 잔뜩 엉망이 된 숨결로 말했다.
“매일 네 꿈을 꿨어.”
“…….”
“매일 밤마다 너와 개처럼 뒹구는 상상을 해.”
“…….”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일 때였다. 윤태희는 재겸의 양뺨을 감싸 쥐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절박하고 경건한 기도처럼, 애틋하게 퍼붓는 키스였다. 재겸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윤태희의 키스에 휘말렸다. 혀가 얽히는 느낌이 선명했다. 뜨거운 호흡이 적나라하게 뒤섞였다. 한참 만에야 윤태희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윤태희는 재겸의 뺨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재겸의 목덜미에 그대로 이마를 묻었다. 크고 단정한 손이 매달리다시피 재겸의 가슴팍 언저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아, 나는 결국 너를 사랑하고야 말았다.
“…….”
재겸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삐걱거리듯 눈동자를 움직여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윤태희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흐어엉! 살려주시오! 나 좀 살려주시오!”
그때였다. 어디선가 서럽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넋을 놓고 있던 재겸은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재겸의 귀는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제야 남생이를 동굴에 두고 나왔다는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혈혈단신으로 동굴을 빠져나오느라 위험에 처한 모양이었다.
재겸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맥없이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걸음을 서성거렸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재겸은 걸음을 휘청이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뛰어갔다.
스스스, 서늘한 바람이 어두운 산중을 뒤흔들었다.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태희는 그대로 기진맥진하여 뒤로 털썩 누웠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윤태희는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고 어린 손이 아니었다. 곧게 뻗은 기다란 손가락,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큼지막한 손이었다.
얼마간 제 손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천천히 입술 근처로 손목을 가져갔다. 손목에 낀 팔찌에 입을 맞췄다. 한숨처럼 가녀린 호명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태희 님.”
패현이 나타나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그러나 윤태희는 막상 운을 띄워놓고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감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그에 패현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아니, 아니야…….”
한참 만에야 윤태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뱉은 말을 번복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그와 동시에 윤태희가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마침내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래, 나는 결국 열망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없다는 치욕. 나는 나를 잃었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 나는 네게 나를 뺏겼다.
그래서 나는, 나를 가진 ‘너’를 가지기로 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과 운명이 굶주린 들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이를 세울 것이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지나온 모든 자리는 폐허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듯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너는 몇 번이고 나를 구해낼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한 촉의 촛불처럼 너는 내게 손을 내밀 것이다.
네가 몰락의 인도자라면, 나는 그 어떤 무거운 짐을 지워도 불평불만 없이 순종하는 한 마리의 나귀가 되어 네게 얌전히 고삐를 내어줄 것이다. 설사 네가 이끄는 이 길 끝에 낭떠러지가 있더라도, 네가 고삐를 당기면 나는 기꺼운 걸음으로 너를 따라갈 것이다.
쿠구궁….
땅바닥과 맞닿은 등에서 어렴풋한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깊은 땅속에서 시작된 진동은 윤태희의 등에 생생히 와 닿았다. 그리고 이 진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윤태희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지난 십 년이 붕괴하는 소리였다.
- 저를 죽게 하고, 저를 살게 하는, 이 신비로운 힘은 무엇입니까?
어느 먼 곳에서 나를 찾아와, 들여보내 달라 문을 두드리던 너는 세상이 내게 선사한 악의. 나의 불행. 나의 운명. 나의 나락. 몰락의 인도자이자 공포의 탈을 쓰고 온 사랑. 네가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 네게 마중을 나갈 것이다.
나를 패망으로 이끄는 너의 손을 잡고 네가 걷는 길을 추종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와 가는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겠다.
윤태희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대자로 누웠다. 운명이 격투하는 밤이었다. 윤태희의 품 안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 윤태희는 불현듯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 윤태희는 너무나 유쾌하였다.
<끝, 3부에서 계속>
*본 작품은 스토리 정비를 위해 한 달 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