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만물은 본말의 섭리를 따른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대저 생(生)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생명은 운명을 부여받기 마련이라. 그 운명인즉 목숨(命)이요, 목숨을 짊어지는 것은 이름(名)이니, 이름을 불리는 순간에야 그 존재는 운명을 받아 온전히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 하였다.
예로부터 사람이 죽어 장사를 치를 적이면 상여를 내보내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가 고복(皐復)하고 망자의 이름을 세 번 외쳐 불렀는데, 이는 떠난 혼이 다시 육체로 돌아와 합쳐지길 바라며 초혼(招魂)하는 것이다. 무릇 이름이란, 혼과 육체를 접하여 놓는 까닭에 중한 것이다.
(중략)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의 횡포에 산 자가 신음하니, 그에 본향이 긍휼히 여기어 사자(使者)를 내리고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으라 명하였다. 본향의 사자(使者)가 바로 방상시이다.
본향은 방상시에게 망자의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라는 사명과 함께 세 가지의 권능을 주었으니. 첫째는 이름을 밝히는 힘, 천명(闡名)이요, 둘째는 이름을 붙이는 힘, 명명(命名)이요, 셋째는 이름을 부르는 힘, 호명(呼名)이다.
그의 황금사목은 혼에 새겨진 이름을 보았고(闡名), 무명의 것들에게는 이름을 주었으며(命名), 그가 이름을 세 번 부르면(呼名) 그 혼은 혼불이 되어 승천하였다. 이에 방상시를 부르는 존호가 있으니 이름을 다스리는 자, ‘성명자(姓名子)’라 하였다.
이와 같은 신명의 권능으로 생자와 망자를 호령하니 그 누가 감히 방상시와 대적하겠는가? 그 위엄을 전해 들은 궁궐에서는 제사를 모시며 그를 떠받들고, 백성의 안위가 달린 궁궐을 지켜 달라 간곡히 청을 올리매 그에 응하여 본향의 사자가 몸소 나례를 베풀어 주었으니, 이것이 나례청의 효시이다.
구나세전驅儺世傳 발췌
***
동그란 무테안경 너머, 서늘한 눈동자가 먹물로 쓰인 활자를 매끄럽게 훑었다. 종이가 누렇게 갈변된 고서적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세로로 정갈하게 쓰인 한문을 읽어 내려가던 윤태희는 어느 순간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驅儺世傳>
윤태희는 무표정한 눈으로 오래된 책등에 적힌 한자를 읽었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윤태희는 며칠 전부터 나례청 문헌실을 들락거리며 불로불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고 있었다. 패현에게 명을 내리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 선에서 직접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재겸에게 불로불사의 저주를 걸었다는 스승은 선대 나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선대 나례청과 연관된 기록 중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례청 문헌실에는 세간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한 책이 많았다. 개중에는 선대 나례청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여러 문헌도 있었고, 본청 안에서도 비밀에 부치는 기록을 상당수 보관하고 있었다. 민감한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기에 대부분의 나자라면 쉬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축역부 수석이라는 직급은 문헌실 출입 정도는 충분히 가능케 했다.
어느덧 서고를 드나든 지 며칠째, 아직은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낡은 서적을 뒤적거리던 윤태희는 불현듯 윗배를 감싸 쥐었다. 갑자기 속이 쓰렸다. 허기인지 통증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윤태희는 책을 원위치에 꽂아 넣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서고를 빠져나온 윤태희는 그대로 본청 밖으로 나왔다.
윤태희는 길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꽤 좋았다. 하늘은 화창하고 햇볕은 따듯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종로 일대는 조선 시대 때부터 터가 좋은 명당에 속하기에 유달리 환하고 양지의 기운이 강했다.
출근 시간을 넘긴 늦은 아침, 거리 분위기가 어딘지 나른했다. 윤태희는 광화문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연한 하늘색 와이셔츠에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목에 출입증을 맨 윤태희는 여느 회사원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햇살을 받으며 걸어 나가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발길을 멈췄다.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대로변 한쪽에서 노인이 가판대에 앉아 조간신문과 껌 종류를 팔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윤원중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노인을 볼 때마다 윤태희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가판대로 향한 윤태희는 신문 하나와 호올스 하나를 집어 든 뒤 노인에게 지폐를 건넸다.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얼마나 걸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한 윤태희는 익숙하게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가게 안에 들어섰다. 윤태희가 찾은 곳은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평소 끼니를 때우기 위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윤태희는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삐딱하게 꽂은 채, 키오스크를 톡톡 터치하며 무료한 표정으로 메뉴를 골랐다. 식사 대용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차 한 잔을 주문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 한쪽에 자리에 잡은 윤태희는 신문을 펼쳐 놓고 고요하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온 윤태희는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눈부신 풍경이었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거리를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럴 때마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윤태희는 고개를 내려 제 발밑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무해하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서서, 윤태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내려다보는 인간이었다. 윤태희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그늘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본청으로 돌아가는 길, 윤태희는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전에는 못해도 한 달에 두세 번은 드나들던 서점이었지만 한동안 바빠서 발길이 뜸했다. 모처럼 시간이 남기도 했으니, 근처까지 온 김에 간단히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다.
서점 특유의 차분한 향취는 여전했다. 천천히 서점을 거닐며 책을 구경할 때였다. 서적을 진열해 놓은 매대 앞을 지나다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윤태희가 멈춰 선 곳은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자기 계발서 코너였다.
윤태희는 지금껏 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자기 계발서는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윤태희는 자기 계발서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스쳐 지나가는 책 제목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두 걸음 뒷걸음질하여 매대로 향한 윤태희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책 제목을 읽었다.
<당신은 그 남자를 가질 수 없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던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었다.
‘짝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신을 위해 연애 고수가 전하는 이야기! 그 남자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세요! XX 매거진 유명 칼럼니스트가 당신에게 조언하는….’
앞뒤로 책을 살펴보며 띠지에 적힌 소개 글을 읽던 윤태희는 이내 책을 원위치에 내려놓았다. 검지로 눈썹 끝을 슬쩍 매만지다가 옆에 진열된 다른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왠지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들이 하필이면 이랬다.
<성공적인 짝사랑을 위한 연애 백서>
<당신의 고백이 실패한 열 가지 이유>
<상대를 유혹하는 사랑의 기술>
<불가능한 사랑은 없다>
윤태희는 매대에 진열된 몇 권의 책을 펼쳐 보았다.
“…….”
그렇게 뭐에 홀린 듯이 자기계발 서적을 뒤적거리던 윤태희는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새삼 환멸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미련 없이 서점을 빠져나왔다.
왔던 길을 거슬러 본청으로 향하던 윤태희는 종묘 공원에 이르러 사람이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았다. 저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물었다가 그대로 꺾어서 버렸다. 벤치 뒤편 화단에 라일락 나무가 흐드러져 있어서 향기가 지독했다.
“당신은 그 남자를 가질 수 없다….”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신기해서, 말로 내뱉는 순간 시들어 버리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말로 내뱉는 순간에야 비로소 강렬하게 피어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윤태희는 자신이 입 밖으로 뱉어낸 사랑이 자신의 소관을 완벽하게 벗어났음을 알았다.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만개해 있었다.
고개를 뒤로 꺾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윤태희는 손을 들어 윗배를 느리게 더듬었다. 또다시 쥐어짜는 통증이 일었다. 끼니를 거른 탓인가 싶었는데 허기와는 무관한 모양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익히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나이가 없던 십 대 무렵, 거리를 방황하며 살았을 때는 자주 이렇게 위가 아팠다.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던, 온몸에 비늘처럼 칼날을 두르고 있었던, 석주련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에 든 칼을 숨기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툭하면 이렇게 누군가 뱃속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던 위장병이 아무래도 근래에 다시 도진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재겸을 생각하면 위가 아팠다.
동굴이 붕괴한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 윤태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송두리째 달라져 있었다. 윤태희는 10년간 공들여 세운 판을 뒤엎고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판을 짰다. 삶을 살아오면서 단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나례청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가 더 있었다.
나를 가진 너를 가지는 것.
윤태희는 고개를 뒤로 젖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이토록 찬란한 하늘 아래서 재겸은 여전히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으며, 윤태희는 어둡고 추악한 욕망과 가학심과 폭력적인 욕구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위를 쥐어짜는 통증만큼이나 강렬했다.
바람이 불었다. 등 뒤에 흐드러진 라일락 나무에서 짙은 향기가 독처럼 풍겼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향기였다. 불현듯 숨이 막혔다. 윤태희는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질식할 것 같은 사랑, 어느덧 때는 초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