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55)화 (155/348)

#155

재겸은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꼭두새벽부터 산에 오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생각을 좀 비우고 싶었다. 동굴에서 돌아온 이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념이 이어져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겨우 선잠이 들었다가도,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자꾸만 눈이 떠졌다.

‘매일 네 꿈을 꿨어. 매일 밤마다 너와 개처럼 뒹구는 상상을 해.’

아무리 감정에 서툰 재겸이라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랬다. 윤태희는 남색가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난 며칠간 불면의 밤을 겪으며 재겸이 내린 결론이었다.

재겸이 내린 결론은 명쾌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저번에 남색가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윤태희는 분명 자신은 남색가가 아니라고 부정했었다. 그렇다면 그때 그 대답은 뭔가 싶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면 며칠 사이에 남색가가 되어 버린 건가?

근데 다른 무엇보다도 의문인 건, 걔는 왜 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윤태희가 저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사이가 좋았던 날보다 사이가 나빴던 날이 더 많지 않았나? 와 같은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창문을 보면 어느샌가 날이 밝아 오기 일쑤였다.

불면의 이유는 아주 복잡하고도 단순했다.

윤태희가 재겸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그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재겸이 아침부터 산에 오른 이유는 윤태희가 재겸을 사랑해서였다. 재겸이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윤태희가 재겸을 사랑해서였다.

재겸은 오랜 세월 무기력과 권태의 늪에 빠져 지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피곤하고 지쳤다. 재겸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불행 속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게 피로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터인가 재겸은 자도 자도 졸렸다.

고통은 때로 잠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다. 불면이거나, 혹은 수마이거나. 재겸은 대개 후자였다. 잠을 잔다는 것은 가장 손쉬운 현실 도피의 수단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잠이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게 되었다. 처음엔 진눈깨비 같았던 졸음은 긴 세월을 거치며 함박눈처럼 무거워졌다. 어차피 깨어 있으나 자고 있으나 다를 게 없는 텅 빈 삶이었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재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 익숙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재겸과 윤태희는 봄에 만나서 몇 번의 주먹다짐과 몇 번의 말다툼, 그리고 몇 번의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계절은 초여름이었다. 윤태희는 재겸에게 있어 우체부와 같았다. 윤태희를 만난 순간부터 재겸의 일상에는 하루하루 새로운 소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삶에 일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 재겸의 잠기운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자꾸 재겸을 현실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주 은은하게 깃들기 시작한 삶의 활력을, 재겸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바뀌었느냐 하면 사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재겸은 여전히 죽고 싶었고, 먹는 것보다는 자는 것이 더 좋았다. 다만 과거의 샘에서 윤태희를 건져 올리고 고백을 들었던 그날 이후로, 잠이 잘 오지 않을 뿐이었다.

재겸은 며칠째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를 좋아한다는 남색가 윤태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윤태희는 동굴에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임무에 차출되어 일이 바빠졌고, 덕분에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날 이후로 재겸과 윤태희는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윤태희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연락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제 머릿속에서 떠나기를 바랐다.

오늘 등산에 나선 것은 몸이라도 움직이고 할 일이라도 생기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그런대로 등산의 효과가 있었는지, 산에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윤태희에 관한 생각이 옅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꼭 등산 때문이 아니라 유남생의 등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말입니다요! 제가 그때 붕어 놈과 결투를!”

유남생 때문에 아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임효문보다도 더했다. 유남생은 아까부터 부지런히 밥을 먹는 와중에도 덕삿골에서 자란 유년 시절을 비롯하여 그 산에서 있었던 일화 등등,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일대기를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야. 유깽알. 흘리지 말고 먹어.”

재겸은 밥을 먹다 말고 유남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발갈퀴를 푸드덕거리며 밥을 먹던 유남생은, 미어터질 것처럼 뽈록해진 볼따구를 하고서 재겸을 쳐다보았다. 어찌나 난리를 쳐 가며 밥을 먹는지, 쟁반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재겸의 밥그릇 근처까지 밥알이 튀어 있었다.

“예? 예… 근데 저 유깽알이 아니라 유남생입니다요.”

왁왁 밥을 먹고 있던 유남생이 소심하게 말대꾸를 했다.

“아무튼 흘리지 말라고.”

“예….”

유남생이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자신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유남생의 일대기는 ‘나는 그 머나먼 덕삿골에서 어쩌다 그 산에 왔는가?’라는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잠깐만. 깽알아, 그러니까 네 말은, 원래는 덕삿골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태풍에 휩쓸려서 충청도에 있는 그 산까지 날아왔다는 거야?”

어느샌가 유남생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정주가 말했다.

"예에! 그런데 제 이름은 깽알이가 아니라 유남생입니다요….”

“고생했겠네. 그럼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고?”

“아이고! 이곳이 저에겐 극락입니다요!”

이러나저러나 입이 하나 늘었다고 식탁이 복작거렸다.

***

식사를 마친 후, 재겸은 평소처럼 아침 연속극을 시청했다.

“깽알 님. 제가 집 구경을 시켜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메산이는 물티슈로 유남생의 입가를 닦아 주며 헤헤 웃었다.

“아이참, 저는 깽알이가 아니라 유남생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요? 저에게는 슬픈 호칭인데 그걸 이름인 양 불러 제끼다니 아실 만한 분들이 참으로….”

유남생은 메산이의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가며 궁시렁거렸다.

재겸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열심히 티브이를 보았다. 시끄러운 유남생 때문인지, 아니면 등산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윤태희에 관한 생각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다. 모처럼 아침 연속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자 재겸은 기지개를 켜며 마루에 드러누워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보니 출근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재겸은 근처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프렌즈팡은 어느새 재겸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프렌즈팡에 접속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윤태희 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방금 전)

재겸은 그 순간, 가슴 언저리에서 근육통을 느꼈다.

아무래도 등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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