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56)화 (156/348)

#156

…예로부터 불사의 몸을 얻을 수 있다는 주술이 존재한다는 소문은 끊임없이 전해져 왔으나 전부 거짓이었다. 실상은 백성을 현혹하려는 요사한 뜬소문에 불과하였으니….

윤태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례청 문헌실을 찾았다. 몇 번이고 책을 바꿔 가며 활자를 들여다보던 윤태희는 불현듯 손목을 기울여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오늘은 2분기 제구 발표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윤태희는 잠시 벗어 두었던 탈을 얼굴에 뒤집어쓴 뒤 서고를 빠져나왔다.

“수석님, 안녕하십니까!”

문헌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니 윤 수석을 알아본 나자들이 너도나도 인사를 건네 왔다. 윤태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바람개비마냥 양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가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긴 다리가 시원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별관에 이르러 제2 회의실이 있는 방향으로 모퉁이를 돌 때였다. 때마침 반대편 복도에서 석주련과 그의 보좌 한주영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윤 수석님.”

윤태희를 발견한 한주영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뒷짐을 지고 구부정하게 걷고 있던 윤태희가 발을 멈추더니 석주련을 향해 고개를 푹 꺾어 보였다.

“오셨어요.”

석주련은 별말 없이 눈짓만 까딱했다. 윤태희는 아주 자연스럽게 석주련의 곁으로 합류했다. 비어 있는 석주련의 왼편에 서자 보좌가 둘로 늘어났다.

“아팠다면서.”

정면을 응시한 채 걷던 석주련이 입을 열었다. 반걸음 뒤에서 뒷짐을 지고 걷던 윤태희가 스르륵 눈을 굴려 석주련을 쳐다보았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그간 심화(心火)와 열병으로 인해 정화부에 드나들며 케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그냥 감기였어요.”

“…지금은?”

석주련이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다 나았어요.”

석주련은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제2 회의실 문 앞에 이르자 윤태희가 한발 앞서 벨 보이처럼 문을 열었다. 윤태희의 상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중을 받았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부장님, 오셨습니까!”

제2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일으켰다. 수십 명이 허리를 숙이며 상관을 맞이하는 풍경은 언제 봐도 진풍경이었다. 그저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소란스럽던 장내를 한순간에 휘어잡기에 충분한 위압감이었다.

윤태희는 단상 근처에 서서 장내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회의실 안에는 길쭉한 테이블이 몇 줄에 걸쳐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미리 서류를 배부해 뒀는지 자리마다 종이가 한 부씩 놓여 있었다. 여느 때처럼 팀별로 모여 앉은 듯한 분위기였다. 제구부가 주관하는 행사인 만큼 제구부 나자들도 많았으며, 축역부뿐만 아니라 타 부서 나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수석님, 여기예요!”

그때, 저 멀리에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강이빈이 보였다. 제1팀 팀원들은 강이빈이 속한 테이블의 앞뒤로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는 재겸도 있었다.

재겸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뒷줄에 앉아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어느 순간 윤태희와 재겸의 시선이 분명하게 마주쳤다. 턱을 괴고 있던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태희를 쳐다보다가 이내 스르륵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

재겸은 윤태희를 본 순간부터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굴에 갔던 그날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단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둘만 있는 상황에서 만났다면 몇 배나 어색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단상 근처에서 윤태희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비어 있는 자리는 재겸의 옆과 앞줄에 앉은 강이빈의 옆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앞줄에 앉겠거니 했다. 왜냐하면 강이빈의 옆이 발표를 보기에 더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수 냄새가 훅 끼친 순간, 재겸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았다.

윤태희가 굳이 구석까지 들어와서 재겸의 옆에 앉은 것이다. 옆자리에 털썩 앉은 윤태희는 팀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빼꼼 기울이며 옆자리에 앉은 재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안녕.”

“…….”

재겸은 애써 동요를 억누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에.”

‘응’과 ‘네’ 사이, 껄끄러운 기색이 팍팍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밥 먹었어요?”

“…느에.”

영양가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뭐 먹었어요.”

재겸은 마지못해 윤태희를 곁눈질했다.

“…제육덮밥요.”

“맛있었어?”

이번엔 대답 대신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난 밥 안 먹었어요.”

그렇게 말한 윤태희는, 뭐라 이유를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덧붙였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재겸은 별다른 대꾸 없이 힐끔 윤태희를 훔쳐보았다. 얼굴에 탈을 쓰고 있는 탓에 윤태희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탈의 하관이 뚫려 있어서, 반듯하게 떨어지는 턱선과 입술 정도만 보였다.

밥을 먹었느냐는 안부를 끝으로 윤태희와 재겸의 대화는 뚝 끊겼다.

재겸은 괜히 서류를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윤태희가 바로 옆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의식이 되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재겸은 애써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제 눈에 비치는 윤태희가 그러하듯이, 윤태희의 눈에 보이는 저의 모습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를 바랐다.

석주련의 등장으로 한 차례 조용해졌던 장내는 어느샌가 다시 조금씩 수선스러워지고 있었다. 스크린이 있는 단상 근처에선 제구부 나자들이 곧 있을 발표회 준비하느라 마이크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자리에 착석한 채 대기 중인 나자들의 대화 소리로 인하여 장내에는 웅성거림이 깔려 있었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널 좋아해.

서류 페이지를 넘기던 재겸의 손이 우뚝 굳었다.

…뭐?

재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하며 윤태희를 홱 쳐다보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며 볼펜을 휘휘 돌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해 보여서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때, 윤태희의 손에 들려 있던 볼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재겸이 멈칫하며 떨어진 볼펜을 내려다볼 때였다. 윤태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해요, 안 줍고.”

볼펜은 윤태희와 재겸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

지가 떨궈놓고는 얻다 대고 주우라 마라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날아든 싸가지 없는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재겸은 마지못해 허리 규칙 굽혔다. 보는 눈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방금 뭐였지? 잘못 들었나? 허리를 숙여 볼펜을 줍는데, 윤태희가 재겸을 따라 상체를 살짝 기울이더니 볼펜을 줍는 재겸의 관자놀이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널 좋아해.”

재겸은 볼펜을 줍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도 겨우 들릴까 말까 한 속삭임이었지만, 재겸의 귀에는 그 내용이 분명히 들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재겸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정면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재차 멍하니 중얼거렸다.

“널 좋아해….”

널 좋아해. 꾹꾹 틀어막아도 결국은 참지 못해서 끝내 흘러넘치고야 마는, 구역질처럼 나온 혼잣말이었다. 혼잣말로 위장한 고백에, 마침내 재겸의 눈가 한쪽이 파르르 경련했다. 여기는 본청이고, 이 공간에는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있으며, 앞뒤로 팀원들이 앉아 있다.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났다. 재겸은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윤태희의 슈트 재킷 자락을 콱 잡아당겼다.

“다, 다 들려… 이 미, 미친 새끼야….”

그만하라는 신호와 함께 아주 작게 뇌까리자, 앞만 보고 있던 윤태희가 곁눈질로 재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대뜸 재겸의 서류에 손을 뻗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재겸이 주워준 볼펜을 쥐더니 종이 위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재겸은 황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누가 들은 건 아닐까 불안해져서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주변을 점검한 재겸은 안도하며 윤태희가 서류에 적은 글귀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고 정갈하게 쓰인 필체를 확인한 재겸이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해

“…….”

뭔가 덫에 걸린 것처럼 멍하니 글씨를 내려다보고 있던 재겸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의 코앞에서 격돌하듯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지금부터 2분기 제구 발표회를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의 불이 탁, 꺼졌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