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회의실 불이 꺼지며 장내가 어둑해졌다. 회의실 앞쪽에 있는 스크린에 깔끔한 프레젠테이션이 떠올랐다. 제구 발표회는 말 그대로 제구부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1년에 네 번, 각 분기마다 새롭게 개발한 제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제구의 각 기능과 연구 과정 등을 소개하는 제구 발표회는 으레 여느 기업에서 할 법한 신제품 발표회와 대동소이했다. 제구부는 연구 개발 부서에 속하는 만큼, 일 년에 네 번 있는 이 발표회는 그간의 활동과 성과를 가시적으로 증명할 기회이기에 제구부 입장에서는 매우 중대한 자리였다.
“이번 발표를 진행할 제구부 나자 박종훈입니다. 귀한 시간을 내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전 나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발표를 맡은 제구부 나자가 마이크를 들고 나와서 자신을 소개했다. 본격적인 개회가 시작되었다.
“우리 제구부에서는 지난 3, 4분기에 보급한 제구를 수거하여 일부 기능을 개선하고 보강하였으며….”
“이번 분기에 새롭게 소개해 드릴 제구는 총 네 가지입니다.”
발표를 맡은 제구부 나자가 단상 앞에 서서 스크린을 향해 레이저 포인트를 쏘며 설명에 나섰다. 슬라이드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나자들은 서류를 넘겼다. 그때마다 재겸도 뒤늦게 따라서 후다닥 서류를 넘겼다. 지난번에 있었던 동향 보고에 불참한 재겸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낯설고 익숙지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긴 재겸은 그대로 얼어 있었다. 재겸의 신경은 온통 옆에 앉은 윤태희를 향해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왼쪽으로 쏠려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까부터 명치 언저리에서 쿵쿵, 얕지만 불규칙한 박동이 울렸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던 재겸은 눈동자만 슥 움직였다. 윤태희의 옆얼굴을 은밀히 훔쳐보았다. 스크린에서 번져 오는 빛이 비쳐 반듯한 턱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윤태희는 한없이 태연해 보였고, 정면을 응시한 채 발표를 듣고 있었다. 이따금 볼펜을 딸각이며 자신의 서류에 뭔가를 메모하기도 했다.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건 쟤인데, 평안치 못한 건 저였다. 재겸은 곁눈질로 보이는 윤태희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발표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으로 소개할 제구는 귀기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스프레이입니다.”
차분히 발표를 이어 나가던 제구부 나자가 슬라이드를 넘겼다.
“표적을 제압하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며, 정화부의 협조를 얻어 공동으로 개발한 제구입니다. 부적을 태운 물에 여러 가지 약초를 섞어 제작하였습니다. 기존에 보급한 제구 가운데 귀기를 봉쇄하는 밧줄과 비슷한 용도입니다.”
설명을 듣던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귀기를 차단하는 밧줄이라 하면 언젠가 산에서 메산이를 빼앗겼을 때, 제구부 나자들이 저에게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밧줄은 원거리 전용이기 때문에 표적이 가까운 위치에 있을 때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구를 발동하기 위해서 사용 전 주문을 외워야 했고요. 그러나 이 스프레이는 발동 조건이 없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따라서 표적과 대치할 때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자들이 웅성거리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날 제구부에서 소개한 제구 가운데 가장 뚜렷한 반향을 일으킨 물건이었다.
발동 조건이 없다는 건 아주 파격적인 사항이었다. 통상적으로 제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발동 조건이 필수적으로 따라붙기 때문이었다. 조건이란 대부분 둘 중의 하나였다. 제구에 귀기를 싣거나, 정해진 주문을 외거나.
“또한, 스프레이 외관상 밧줄과는 다르게 범인들 앞에서 사용하더라도 수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평범한 물건으로 위장하는 데 용이합니다.”
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듯했다. 장내 전반에 긍정적인 기류가 흐르자, 발표 나자의 얼굴이 살짝 환해졌다.
“스프레이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질의 받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발표 나자가 차례대로 지명하면 마이크가 넘어갔고, 질의 기회를 얻은 나자는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며 질문을 했다.
“평균적인 지속 시간은 어떻게 되죠?”
“3시간 안팎입니다.”
“귀신의 얼굴 쪽으로 뿌리면 되나요?”
“꼭 얼굴 부근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질문이 이어질 때였다. 앞줄에 앉아 있던 강이빈도 손을 번쩍 들었다.
“축역부 제1팀 강이빈 주임입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강이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액체를 분사하는 형식이라고 하셨는데, 예를 들어 제가 현장에 나갔다가 귀신을 만났어요? 그래서 귀신을 향해서 스프레이를 뿌렸는데, 반대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어떡하죠? 제가 뿌리고 제가 마비당하면 되는 건가요?!”
생동감 넘치는 질문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팀원의 질문 내용에 상관 윤태희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소 경직되어 있던 장내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네, 그렇죠. 바람이 불면 사용자한테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수 노즐을 사용하여 좁은 범위로 빠르게 분사되도록 해 바람에 대한 저항력을 높였습니다.”
제구부 나자도 웃으며 답변을 시작했다.
“또한 귀신은 스프레이 액체에 닿는 것만으로도 귀기가 마비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스프레이 액체를 직접 흡입하거나 섭취해야만 효험이 발생합니다. 피부에 살짝 묻는 정도로는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에도 제구부 나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유려하게 답변을 이어 나갔다. 나자들은 질문을 하면서도 ‘좋은 제구를 만드셨네요!’ 하고 칭찬 일색이었다. 이렇게 제구부가 호평을 받는 상황 속에서, 재겸은 떨떠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구부 나자들에게 크나큰 악감정이 있는 재겸으로서는 제구부에 상찬이 쏟아지는 지금 이 분위기가 영 달갑지 않았다.
얍삽한 쥐새끼들 주제에 말도 많네. 그냥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줄곧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재겸을 향해서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
“제구부 씹새끼들 기 좀 죽일까요?”
난데없이 숨결 섞인 속삭임이 귓가에 훅 파고들자, 방심하고 있던 재겸의 심장이 펄쩍 뛰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윤태희가 갑자기 머리 위로 팔을 슥 들더니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발언 기회를 얻은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윤태희는 건네받은 마이크에 대고 느릿느릿한 말투로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축역부 윤태희입니다.”
어느 팀 소속이고 직급은 무엇인지, 알아서 생략하는 태도에서 약간의 성의 없음이 드러났다. 발표를 맡은 나자가 살짝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 제구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기를 마비시키는 스프레이라니 표적을 제압하는 데 뛰어난 기능을 가진 제구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발동 조건이 없다는 건 정말 혁신적이네요. 현장에서는 고작 몇 초 차이로도 촌각을 다투는데, 이에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걸 알겠습니다.”
시작은 제구부의 노고를 떠받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동 조건이 없다는 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접근이 쉬운 만큼 보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요. 나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물건이니까요. 만약에 관리 소홀로 인한 분실 사고가 발생하거나 외부로 반출되는 일이 생겨난다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소지가 있어요. 예를 들어 나자에게 원한이 있는 귀신이나, 나자가 아닌 귀재 손에 이 물건이 들어갔다고 칩시다.”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
“뭐… 대충 큰일이 나겠죠?”
발표를 맡은 나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구부 나자들에게 묻습니다. 이와 같은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 둔 대처 방안이 있는지, 애초에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한 건지?”
지적을 끝낸 윤태희가 마이크에 대고 산뜻하게 덧붙였다.
“이상입니다~”
말을 마친 윤태희는 답변을 기다리는 태도로 느슨히 뒷짐을 지어 보였다.
“…….”
“…….”
“…….”
윤 수석은 단숨에 분위기를 꺾었다. 내내 활달한 기류가 감돌던 장내 분위기는 어느덧 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질문을 받은 제구부 나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리한 지적이어서 당장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아, 어… 그게….”
상석에 앉아 있던 석주련의 입가에도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되바라진 자식 같으니.
“우리 애들 울겠습니다.”
그때, 방관하듯이 상황을 지켜보던 제구부 부장이 허허 웃으며 석주련에게 말을 붙였다. 그에 석주련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흘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직접 현장에 나서는 축역부는 여러 가지로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지요. 그만큼 실전에는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생각지 못한 변수가 많으니까요. 현장 경험이 있으니 넓은 시야를 가지는 건 당연한 겁니다.”
마이크를 붙잡고 잠시 머뭇거리던 제구부 나자가 입을 열었다.
“네… 질, 질문 감사합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말씀 주신 부분에 관해서는 우선 재고를 철저히 파악하고, 관리에 주의하여 불미스러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만… 어, 최대한 그럴 일이 없도록….”
애써 쥐어짜듯 흘러나온 답변은 역시나 들으나 마나 한 내용이었다. 형식적이고 교과서적인 답변일 뿐이라,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윤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흠, 알겠습니다.” 미지근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
그에 재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볼펜을 손에 쥐고, 아까처럼 재겸의 서류 위에 뭔가 낙서를 했다.
예쁜 짓ㅎㅎ
장내가 어둑한 탓에, 안력을 돋우고 글씨를 내려다보던 재겸은 할 말을 잃었다. 윤태희의 낙서에 뭐라 대답을 남길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무리 봐도 윤태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