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58)화 (158/348)

#158

발표회가 끝난 뒤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재겸과 윤태희를 비롯한 제1팀 팀원들도 회의실을 나왔다. 이런저런 소감을 나누며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반대편 복도에서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야 이 재수 없는 축역부 놈들아.”

제1팀 팀원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볼 때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재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팀원들은 반갑게 아는 척을 건넸다.

“어? 이 수석님이다.”

“수석님 안녕하세요!”

윤태희를 불러세운 사람은 제구부 제1팀 수석 이영신이었다. 이영신은 평소 윤 수석과 왕래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제1팀 팀원들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상부 허락도 없이 재료 채집에 나섰다가 동티가 옮아 고생했던 이영신은 한 달 근신을 끝내고 며칠 전에야 업무에 복귀했다.

“어어, 이빈이 오랜만이다? 준형이도 잘 지냈고?”

윤태희는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제1팀 팀원들과 이영신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서 있던 재겸의 낯을 살펴보았다. 근 한 달 만에 이영신과 만난 재겸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종훈이 이번에 발표 처음 맡아서 청심환까지 먹었는데 너네 때문에 우리 제구부 지금 분위기 완전 초상집 됐다고. 재수 없는 축역부 놈들아.”

광어 눈을 뜨고 윤태희를 흘겨보던 이영신이 살짝 진심을 담아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영신의 시선이 옆에 선 재겸에게 닿았다.

“근데 쟨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자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더니, 힐끔 팀원들을 돌아보며 “먼저들 들어가요. 곧 갈게요.” 했다. 팀원들을 물리고 나니 복도가 휑해졌다. 어느덧 복도에 남은 건 윤태희와 이영신, 그리고 재겸까지 셋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우리 팀 신입. 수습이야.”

재겸도 같이 딸려서 보낼까 했으나, 이영신은 재겸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한 번쯤은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는 편이 나았다.

“아! 얘가 그때 말한 걔야? 성질머리 지독해서 꼬시는 데 골치 좀 썩는다더니 잘 구슬렸나 보네? 맨날 팀원 수 동결이더니 이제 슬슬 숨통 좀 트이겠다?”

윤태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힐끔, 재겸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재겸은 표정 변화 없이 복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시선을 피한 윤태희가 적당한 말로 화제를 돌렸다.

“아놔, 말도 마. 아직도 밤마다 아파서 깬다니까.”

이영신은 아직도 고생 중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정화부의 씻김을 받았음에도 완벽하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왼쪽 몸의 감각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이틀에 한 번꼴로 정화부 나자들의 눈총을 받으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네 꼬맹이 소문이 자자하더라. 시험 날 골드 패스 받았다고. 얼마 만의 골드 패스야? 태희 너 이후로 골드 패스 받은 사람, 얘가 처음이지?”

이영신은 윤태희가 직접 영입한 신입이 신기한지, 계속해서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자꾸만 관심이 생기는 듯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 이영신이 재겸을 빤히 훑어보았다.

“근데 누굴 닮았는지 쬐끄만 게 인사성이 좀 떨어진다? 어?”

그러다 어느 순간, 이영신은 히죽히죽 웃는가 싶더니,

“야, 꼬맹이. 관등 성명 한번 대 봐라.”

장난스레 명령을 건넸다. 그러자 윤태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영신아.”

아주 희미하지만, 윤태희의 미간에 짜증이 묻어났다.

“왜? 너 애한테 관등 성명 안 가르쳤냐?”

그만하라는 신호에도 불구하고, 이영신은 그저 해맑기만 했다.

“아, 빨리이. 관등 성며엉.”

이영신이 재촉했다. 윤태희가 데려온 소년은 숫기가 없는 건지, 제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발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축역부 제1팀… 수습 나자 김재겸입니다.”

그에 윤태희가 작게 멈칫하더니, 의외라는 듯이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만족한 이영신이 씩 미소를 지었다. 인사를 받았으니 대답을 해 줘야 했다.

“그래, 형은 제구부 제1팀 이영신이야. 수습 기간 끝나고 축역부가 적성에 안 맞는다 싶으면 제구부로 와. 우리도 골드 패스 받은 신입 한번 모셔 보게?”

이영신이 시시덕거리며 숫기 없는 소년의 머리를 토닥토닥 만질 때였다. 내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년이 이영신의 손을 탁 쳐 내더니, 고개를 들고 이영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에 이영신은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눈빛에서 엄청나게 짙은 적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

이영신이 대번에 낯을 싹 굳히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였다.

“영신이 네가 이해 좀 해 줘.”

때마침, 시선이 맞물린 허공에 큼지막한 손이 끼어들었다. 시야를 가로막듯 재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윤태희는 이내 소년의 이마를 지그시 덮더니, 이마를 지나서 재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정한 손이 뒤통수까지 어루만졌다.

“우리 막내가 좀 까칠해. 게다가 오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뒤통수를 따라 쓸어내리던 손은, 재겸의 목뒤를 마사지하듯 두어 번 가볍게 주물러 준 뒤 사라졌다. 마치 진정하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기도 했고 괜찮아, 하고 도닥여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리에 닿았던 이영신의 손길이, 윤태희의 손길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기세가 누그러진 재겸이 시선을 내렸다.

“…….”

윤태희의 부드러운 제지로 재겸의 날 선 눈매에서 힘이 빠졌다. 애써 잘 참고 있었는데, 이영신이 손을 대는 순간 울컥하여 열이 뻗쳤다. 마음만 같아선 지금 당장 죽을 때까지 때려 패도 시원찮겠지만 여긴 본청이고, 옆에는 윤태희가 있으며, 이영신은 그날 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 아… 어… 그래….”

잠시 굳어 있던 이영신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뭐였지? 눈에 살기가 실려 있었던 것 같은데. 일전에 태희 녀석과 대화했을 때 성격이 포악하고 사납다고 얘기를 듣긴 했었는데. 이런 걸 두고 한 얘기인가?

“그럼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몸조리 잘하고.”

그때, 윤태희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쥐더니 등을 돌렸다. 이영신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 잠깐만!”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야, 꼬맹이. 너 혹시 어디서 나랑 만난 적 있냐?”

몇 걸음 옮기던 윤태희와 재겸이 동시에 발길을 멈췄다.

“그럴 리가. 왜?”

윤태희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영신을 돌아보았다.

“어? 그… 그러게? 이상하네. 나 왜 쟤가 낯이 익지?”

이영신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에 윤태희는 별말 없이 픽 웃어 보이더니 “갈게.” 하고는 다시 재겸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복도에 혼자 남은 이영신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뭐지? 분명 어디서 봤는데….”

이영신은 기묘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영신과 조우한 이후로 재겸은 줄곧 기분이 나빴다. 윤태희는 그런 재겸을 본청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대뜸 재겸을 조수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잘 참았어요.”

둘을 태운 검은 세단이 저녁노을이 물든 도로를 부드럽게 달렸다.

“보기엔 좀 허술해 보여도 영신이도 일단은 수석이고, 평범한 나자들이랑은 좀 달라요. 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 웬만하면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고.”

“…….”

말을 마친 윤태희가 슬쩍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재겸은 묵묵부답이었다. 무시로 일관하며 줄곧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선 기분이 많이 상한 듯 보였다.

한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던 윤태희가 조용히 물었다.

“화 많이 났어?”

질문과 함께 조수석 창문이 반쯤 내려갔다.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오더니 재겸의 짧은 앞머리를 간지럽히듯 이마를 할퀴고 지나갔다.

“…….”

이영신 낯짝을 보고 기분이 잡친 건 맞지만, 재겸은 사실 윤태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라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화 안 났어.”

한참 만에 재겸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근데 지금 어디 가?”

“밥 먹으러.”

정면을 응시하던 재겸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나 저녁 먹었다고 했잖어.”

“알아. 저녁 누구랑 먹었어?”

“강이빈이랑.”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나만 먹을게. 너는 나 먹는 거 구경해.”

재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차 내부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지. 강이빈이 나한테 일 시킨 거 있어.”

창문을 내다보던 재겸이 불퉁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일도 안 하고, 말없이 외출했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면 어떡할 건데?”

“수석님이 꼬셨다고 해.”

윤태희가 전방을 주시한 상태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수석님이 같이 밥 먹어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어요.”

“…….”

“같이 밥 안 먹어 주면 도로에 뛰어들겠다고 했어요.”

“…….”

“가서 그렇게 말해.”

극단적인 내용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예전 같으면 그냥 실없는 농담 정도로 치부하며 넘겼겠지만, 이제는 이런 말에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왠지 맥박이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겸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만 바라보다가, 애써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그에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맞아. 정신 나갔어.”

부웅, 세단이 가속하며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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