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59)화 (159/348)

#159

차가 멈춰 선 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생선 머리의 여파 때문인지, 이번에는 재겸의 의사를 따로 묻지 않고 윤태희가 가고 싶은 곳에 갔다. 파스타와 스테이크 등 양식을 파는 곳이었다.

윤태희는 화덕피자와 크림파스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밥을 먹었다고 했는데도 윤태희는 두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을 주문했다.

마지못해 윤태희를 뒤따라온 재겸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꺼냈다. 윤태희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대화할 거리도 떨어져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윤태희도 따라서 휴대폰을 꺼냈다.

“나도 시작했어. 프렌즈팡.”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가 프렌즈팡을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엊그제 윤태희가 처음으로 하트를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공통 관심사에 재겸은 살짝 흥미가 생겼다.

“하는 방법은 아냐?”

“응.”

“지금 함 해 봐.”

재겸은 애써 어색함을 밀어내며 말을 건넸다. 실력이 비등비등하거나 저보다 못한다 싶으면 임효문과 그랬던 것처럼 내기라도 하자고 제안해 볼 생각이었다.

윤태희는 아주 고요하게 게임을 했다. 태연하게 동요하지 않고 눈을 빠르게 움직이며 손을 놀렸다. 게임 오버! 깜찍한 목소리와 함께 점수가 떴다.

174만 점.

“…….”

아득한 점수였다.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액정과 윤태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겸에게는 백만 점조차 엄청난 벽이었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렇게 잘하지? 얼마 전에 처음 해 봤다면서….

재겸의 표정을 읽었는지, 윤태희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뭐 못하는 거 봤어?”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

재겸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슥 피했다. 왜인지 윤태희를 보기가 힘들었다. 예전 같으면 재수 없게 들리는 말이었을 테고, ‘그래 씨바 네 똥 굵다.’ 하고 넘겼겠는데 아까나 지금이나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재겸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게임을 몇 판 하고 나니 하트가 없었다.

“야. 하트 좀 보내.”

당당한 명령에 윤태희는 군말 없이 손을 놀렸다.

윤태희 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방금 전)

액정에 떠오른 글귀를 빤히 내려다보던 재겸이 무심코 물었다.

“있잖어. 하트가 무슨 뜻이야?”

재겸의 질문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손가락으로 본인 가슴팍을 쿡 찍으며 짧게 대답했다.

“심장.”

아아. 재겸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상징적인 의미로는 사랑.”

담백하게 덧붙여진 설명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순간, 불현듯 섬광처럼 마음을 어루만지고 떠나는 말이 있었다.

“…….”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실례합니다.”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수프와 식전 빵을 갖다 주었다. 재겸은 애써 평정심을 되찾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빵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이 나온 잼을 빵에 바르는데 윤태희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본다. 재겸은 눈을 반쯤 내리뜨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야. 나는 무슨 뭐 빵에 된장 발라 먹는 줄 아냐?”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나도 빵 좋아하고 빵에 쨈 발라 먹어. 나는 무슨 고봉밥만 먹을 것 같냐?”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윤태희가 이유도 없이 혼나던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저녁을 먹었다는 말로 겸상 제안을 한 차례 밀어 냈던 것이 무색하게, 재겸은 아주 잘 먹었다.

“잘 먹네. 맛있어?”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먹기 싫으면 구경만 하라고 윤태희가 말은 했었지만, 막상 정말로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입도 짧은 놈이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켰는데 이대로라면 반 이상 버릴 것이 뻔하여 거들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재겸은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것이 서툴러서 윤태희가 틈틈이 도와주었다.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건네주는 손과 스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포크를 놓칠 뻔했으나, 그때마다 재겸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애썼다.

“야. 너 시간 언제 괜찮아?”

“왜?”

“정주가 너 불러서 집들이하자고 했어.”

물티슈로 손을 닦던 윤태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달은 계속 벽사단에 손님이 있어서 쉬는 날에는 매일 누각으로 가야 한다.

“다음 주까지는 계속 바쁠 것 같은데… 다다음 주 주말.”

“알겠어.”

얼추 음식을 다 먹고 나니 직원이 와서 후식은 뭐로 하겠느냐고 물었다. 윤태희는 냉침한 차와 케이크를, 재겸은 생딸기가 들어간 빙수를 골랐다.

주문한 후식이 나오자마자 재겸은 딸기부터 골라 먹었다.

“케이크도 먹어 봐.”

재겸은 빙수를 떠먹던 수저로 윤태희의 케이크를 뚝 떼서 입에 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크림이 사르르 녹았다. 윤태희는 턱을 괴고 재겸이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먹는 것도 예쁘네.”

기습적으로 날아든 말에, 빙수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던 재겸이 작게 기침을 했다. 사내새끼한테 예쁘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싶었다. 잠깐만 방심하면 금세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날아들어서 정신이 없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재겸은 고개를 슬쩍 숙이고 서둘러 냅킨으로 입술을 짓이기듯 험하게 닦았다. 사레가 들려서 그런지 귀에 은근한 열기가 몰렸다. 스푼을 쥐고 있던 손이 머뭇머뭇 테이블을 맴돌다가 내려앉았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재겸이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

“…야.”

동굴에 다녀온 날부터 계속 모른 척하고 태연하려고 했으나, 이렇게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나, 나는 남자야.”

“알아.”

윤태희가 태연히 대꾸하자,

“그럼 너… 남색가야?”

재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저번에 남색가냐고 물었을 때는 아니라고 했는데, 이번엔 그때와 대답이 달랐다.

게다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도’라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윤태희가 대뜸 되물었다.

“넌?”

재겸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 …나, 난 남색가 아냐.”

“어떻게 확신해?”

“뭐? 그, 그야… 나는 남자랑 그래 본 적 없으니까….”

“그럼 여자는?”

윤태희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

재겸이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였다.

“나도 남자랑 붙어먹어 본 적 없어.”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혹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대충 무언가 짐작을 한 건지 윤태희는 재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난 남색가 맞아.”

그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뭐? 왜?”

“붙어먹어 본 적은 없는데, 붙어먹을 의향은 있거든.”

윤태희가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괴고 재겸을 쳐다보았다.

“…….”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재겸은 갑자기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윤태희와 잘 지내고 싶은 건 맞다. 키스가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재겸 또한 윤태희가 좋았고, 여러모로 각별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재겸은 똑같은 사내끼리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는 가능성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는 남색가도 아니고, 너랑은 달라.”

재겸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것이 지난 며칠간 고민하며 내린 결론이었다.이 불편한 기류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정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야 했다.

나는 윤태희와 같은 마음이 아니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어렵게 말을 고르는데,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재겸이었다.

“그럼 넌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난처함이 역력한 질문에 윤태희가 픽 웃었다.

“말하면?”

“뭐?”

“너한테 바라는 게 뭔지 말하면, 그렇게 해줄래?”

어딘지 쓸쓸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오늘처럼 이렇게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내 옆자리에 타는 거….”

윤태희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 재겸은 뒤에 남아있는 말을 기다렸으나, 윤태희는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윤태희는 ‘언제까지나’라는 뒷말을 차마 이어 붙이지 못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함께 이렇게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미래가 있기를 바랐다. 늦은 밤 운전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조수석에 잠들어 있는 너의 뺨이 보이기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정말 그거면 돼.”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할 테니.”

그래,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