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입청한 지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오늘도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난 한 달간 재겸은 꽤 많이 변했다. 팀원들과 항상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재겸은 어느덧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재겸이, 왔어?”
“막내, 어서 와.”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눈 다음에는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로 간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재겸 또한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컴퓨터 전원부터 눌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컴퓨터를 다뤄본 적이 없었던 재겸도 이제는 그럴듯하게 직장인 태를 갖추게 됐다.
그것은 순전히 강이빈이 틈날 때마다 재겸을 앉혀두고 일대일 교습을 해준 덕분이었다. 강이빈은 컴퓨터를 켜고 끄는 법, 마우스를 움직이는 법, 인터넷에 접속하는 법 등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지금은 타자 연습까지 진도가 나간 상태였다.
재겸은 얼마 전 타자 연습 프로그램에서 가장 기본 단계인 ‘자리 연습’ 단계를 통달했다. 자음과 모음이 배열된 글자판의 위치를 대강 익히고 나서부터는 ‘낱말 연습’과 ‘짧은 글 연습’을 병행하고 있었다. 평균 타자 속도는 약 20타 내외였다. 크나큰 발전이었다.
한참 타자 연습에 매진하고 나면 목과 어깨가 결렸다. 키보드 자판과 모니터를 하도 번갈아 본 탓에 목에 담이 올 지경이었다. 주기적으로 목과 어깨를 주물러 줘야 하는 것이 귀찮긴 했지만, 그래도 재겸은 나름 성실하게 매일 같이 타자 연습을 해나가고 있었다.
“오, 많이 늘었는데?”
재겸의 뒤에서 타자 연습을 지켜보던 강이빈이 칭찬을 해주었다. 재겸은 내심 뿌듯해졌다. 배움에 대한 의지와 욕심이 없을 뿐, 신체 나이가 멈춰 있는 재겸은 스펀지 같은 흡수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뭐든 배우기 시작하면 학습하는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그럼 오늘은 메일 한 통 써보자.”
그리하여 오늘은 처음으로 업무 메일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사건 경위 보고서는 몇 번 써 보았지만, 메일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메일을 쓸 일이 없었다.
재겸이 맡은 임무는 메일로 상비약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전투직인 축역부는 부상 당하는 일이 잦은 편이었다. 임무 수행 도중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치료실을 들락거릴 수는 없으니 가벼운 상처나 몸 상태가 저조할 때 쓰는 상비약을 대량으로 구비해 놓는데, 며칠 전에 받아둔 것을 전부 다 사용하고 말았다. 나름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미리 정화부 제조실에 메일을 보내놔야 했다.
“재겸이! 이리 와서 앉아 봐.”
강이빈은 재겸을 불러다가 자신의 자리에 앉혔다.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자신의 사번을 입력한 뒤, 팀 내 공용 메일로 들어갔다. 강이빈은 재겸에게 차근차근 메일 작성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은 이렇게… 주소록 들어가서, ‘정화부 제조실’ 보이지? 마우스로 클릭하면 이렇게 추가가 돼. 그다음에 내용은… 인사하고. 용건 적고. 요청 사유 적고. 이해했지?”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도 써 봤잖아. 할 수 있어! 겁먹지 말고. 쓰다가 잘 모르겠으면 이거 보면서 써. 누나가 쓴 메일이야. 앞뒤 인사말이나 형식 같은 거는 누나가 적은 대로 그냥 따라 해.”
강이빈은 자신이 예전에 보낸 메일을 종이로 한 장 출력하더니, 재겸이 교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데스크 한쪽에 올려두었다.
“다 쓰면 누나한테 말해. 누나가 한번 확인하고 파일 첨부해서 보낼 테니까.”
“느에.”
설명을 끝낸 뒤 강이빈은 휴게실에 가서 음료수를 사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차피 재겸이 할 일은 메일 내용만 간단히 쓰면 되는 것이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겸은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비장한 얼굴로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탁, 타닥… 탁….
“안녕… 하세요…. 축역부… 제1팀….”
재겸은 입으로 글자를 중얼중얼하며 열심히 타자를 쳤다. 타자에 서투른 사람의 특징은 나아갈 줄만 알지, 이미 지나온 문자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비록 그러할지언정 재겸은 최선을 다했다.
강이빈이 준 교본을 참고하느라 고개를 몇 번이나 올렸다 내렸다 했다.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실수 투성이였지만, 어차피 강이빈이 봐준다고 했으니 큰 부담감은 갖지 않기로 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본인 깜냥대로 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재겸은 용감하게 메일을 써 내려갔다. 큼지막한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었다. 글자 키가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터치하여 문자를 입력하는 것에 비하면 쓰기가 훨씬 편했다. 나름 머리를 굴리고 이런저런 내용도 추가해서 메일 작성을 완료했다.
다 썼다.
재겸은 내내 긴장해서 굳어있던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숨을 돌렸다. 이제 강이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검사를 맡을 차례였다. 재겸은 책상 아래로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구두 끝에 모니터 케이블이 걸리면서 갑자기 모니터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어?”
재겸은 몹시 당황했다. 마우스를 마구 딸각거려보기도 하고, 키보드 자판도 두들겨 보았으나 모니터 화면은 여전히 까맣기만 했다. 겨우 메일을 다 썼는데 갑자기 고장이 난 건가? 잠시 충격에 빠져 있던 재겸은 건너편에 앉아 있던 고준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 주임님. 컴피터가 갑자기 꺼졌어요.”
“엉? 갑자기?”
고 주임이 슬쩍 고개를 뻗더니 본체를 한번 보았다.
“파워는 들어와 있는데… 케이블 문제인가?”
고 주임이 재겸에게 잠깐 비켜보라고 하더니, 모니터 뒤쪽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니터가 다시 환해졌다.
“됐지?”
재겸은 십 년 감수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준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써놨던 메일이 잘 있나 모니터를 들여다볼 때였다.
- 메일을 성공적으로 보냈습니다.
“…….”
재겸이 눈을 찌푸리며 모니터에 얼굴을 확 갖다 댔다.
메일을 성공적으로 보냈다고…?
마우스와 키보드 자판을 이리저리 누르는 과정에서 무얼 잘못 눌렀는지 그대로 메일이 전송되고 말았다.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볼따구를 긁적거렸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사실 재겸은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그때, 때마침 자동문이 열리며 음료수 캔을 뽑아온 강이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타났다. 재겸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저, 저기… 강 주임님….”
“응?”
“그, 그게… 메일요.”
“어? 아, 응! 다 썼어? 봐줄게.”
“저절로 보내진 것 같어요.”
“…….”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강이빈의 얼굴이 굳었다.
“뭐?!”
등골이 서늘했다. 강이빈이 허둥지둥 달려와 재겸을 밀치고 마우스를 쥐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재겸은 옆으로 도르륵 밀려났다. 강이빈은 재빨리 보낸메일함을 확인했다. 정말로 메일 발송이 되어 있었다.
강이빈은 절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받는 사람을 공란으로 비워둘 것을! 메일 쓰는 법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정화부 제조실’을 받는 사람 칸에 미리 추가해둔 것이 잘못이었다.
정화부 제조실장은 50대 중년의 나이로, 평소 형식과 예절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성격이 매우 깐깐하고 불같은 사람이었다.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데다 툭하면 아랫사람을 쥐잡듯이 잡아서 본청 안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눈앞이 깜깜했다. 강이빈도 신입 시절에 메일을 잘못 보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경험이 있었다.
강이빈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상체를 엎드렸다.
“안 돼!”
팀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에요?”
팀원들은 옹기종기 고개를 들이밀고 모니터를 살폈다.
제목 : [추격부]];제1 팀 상비 약품 요청의 건
제목부터 압도당한 팀원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
표지호가 눈을 크게 뜨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말했다.
“…추격? 추격이라고?? 추격부???”
표지호는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강이빈은 상체를 엎드린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요청할 약제 품목과 수량을 정리한 파일 첨부도 안 했거니와, 눈에 보이는 제목부터 저 지경인데 그 내용이란 어떨지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눈치를 보던 고준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발송 취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표지호가 덤덤히 대답했다.
“자체 메일이라서 취소 안 돼.”
“그졍, 안 되죠. 혹시나 해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내뱉었던 고준형이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때마침 자동문이 열리며 잠시 외출했던 윤 수석이 들어왔다. 윤 수석은 강이빈의 자리를 에워싸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팀원들을 보더니 의아한 눈을 했다.
“다들 거기서 뭐 해요?”
표지호가 윤 수석에게 속닥속닥 말을 전했다.
“실수로 메일을 보냈다고?”
사정을 전해 들은 윤 수석이 재겸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어디 봐 봐요.”
넥타이를 어깨로 휙 걸치며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팀원들이 우르르 자리를 비켰다. 윤 수석이 허리를 숙인 채 마우스를 클릭했다.
제목 : 추격부제1팀 상비 약품 요청의 건
안녕하새요. 축역부제1팀 김 재겸입니다.
1. 귀 부서의 업무지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 저의 팀에 있던 상비약이 싸그리 동났습니다. 저의 팀은 매일 간식을 먹는데 저의 팀 고주임님이 2틀전에 맹랑핬또그(가게이름)에서 멍물핬또그(음식이름)을 사먺었다가 꼬챙이까시에 찔려서 입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고주임님이 마지막1병 남아있던 약수를 마시게 되었는데 어 이제 우리 약수없다 라고 말해서 이제 남은것이 전연없다는걸 알게돼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약수를 받어 놀려는데 약수를 대량으로 한번에 받어려면 메일을 써야한다구 강주임님이 저에게 메일을 쓰라했읍니다. 메일은저가 썼찌만 파일은 강주임님이 첨부하신다내요. 하기 첨부자료 검토후 재가 부탁드립니니다
감사합니다 :0
김재겸드림ㄹ헣라앙랔ㅎㄱㄱ;
메일을 읽은 윤 수석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니터에 얼굴을 가깝게 붙이고 있던 윤 수석이 손끝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거 ‘감사합니다’ 옆에 콜론이랑 숫자 0은 뭐야?”
“아, 이빈이가 맨날 끝에 웃는 표시 쓰잖아요. 재겸이도 웃는 표시 따라하려고 했는데 알파벳 D 못 찾아서 그냥 비슷하게 생긴 거 찾아서 누른 것 같네요.”
표지호가 냉철한 표정으로 추리를 꺼내 놓았다.
“아….”
윤태희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
“…….”
한참 만에 윤 수석이 정적을 깨고 고준형을 향해 물었다.
“고 주임님, 그래서 상처는 다 나았어요?”
“네… 흑흑….”
졸지에 날벼락을 맞게 된 고준형은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벌게져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때, 강이빈이 짐짓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재겸아. 이건 그냥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핫도그 얘기는 왜 한 거야?”
“…요청 사유를 적으라고 해 갖고요.”
“그럼 이거 괄호는 뭔데?”
머뭇거리던 재겸이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가게 이름이고 음식 이름인지 헷갈리지 말라고요.”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팀원들이 이마를 짚을 때였다.
“친절하네.”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뭐, 일단 각오했던 것만큼 엉망진창은 아니긴 한데….”
대체 어디까지 각오했길래… 지금 이 순간, 팀원들은 생각했다.
사실 윤태희는 메일에 욕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응시하던 윤태희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구색 맞추고 형식 따라 하려고 노력도 했고. 처음 쓴 것치곤 잘 썼어요.”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태희에게 쏠렸다. 역시 윤 수석은 너그러운 상관이었다. 실수를 나무라기는커녕 칭찬을 건네다니 수석님은 역시 그릇이 넓으시구나, 하고 팀원들이 생각할 때였다. 윤태희가 서서히 웃음기를 지우더니 팀원들을 향하여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서버 해킹할 줄 아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