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육상부 김 수습님. 잠깐 오세요.”
윤태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재겸을 수석실로 불러들였다.
실수로 메일을 보내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윤 수석은 그날부터 매일매일 재겸을 앉혀 놓고 일대일로 메일 쓰기와 맞춤법 과외를 해 주고 있었다. 단발성으로 끝날 줄 알았던 개인 지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윤태희는 처음으로 받아쓰기 시험을 제안했다.
“맞춤법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게 받아쓰기해 봐요.”
“싫어. 안 해.”
재겸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단칼에 거부했다. 싫다고 할 줄은 예상하던 차였다. 그리고 사람 구워삶는 데 선수인 윤태희는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 시작만 어렵지, 제대로 물꼬만 트면 그 이후는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태희는 서랍을 드르륵 열더니 당근을 꺼내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까.”
윤태희가 꺼내든 당근은 ‘스티커’였다. 윤태희는 스티커 하나를 떼어내 재겸의 손등에 붙여 주었다.
“이거… 예전에 감상문 쓸 때….”
“맞아. 받아쓰기 시험 통과하면 스티커 줄게.”
윤태희의 제안은 이러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문제를 내는데 거기서 다섯 문제 이상 정답을 맞히면 칭찬 스티커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스티커 다섯 개 모으면 선물 줄게요.”
재겸의 귀가 쫑긋했다.
그때는 흐지부지됐었지만, 선물을 받긴 했었다. 그때 받은 선물은 오르골이었다. 열 문제 중에 다섯 문제면 딱 절반만 맞혀도 통과하는 셈으로 허들이 낮았다. 게다가 시작이 반이라고 방금 스티커 한 장을 얻었으니, 네 장만 더 모으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재겸은 혹했다.
“선물 뭐 줄 건데.”
“비밀.”
윤태희의 예상은 적중한 셈이 되었다. 눈앞에 목표가 생기자 재겸은 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그 눈빛만은 일변했다. 눈빛에서 희미한 불씨가 솟았다. 그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재겸은 무기력하고 매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성 자체가 승부와 성취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난생처음으로 받아쓰기에 도전했다. 재겸은 중역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갑자기 서류를 들고 줄줄 읽으며 맞춤법 벼락치기를 했다.
“준비되면 말해요.”
“준비됐어. 시작해.”
재겸은 비장한 얼굴로 연필을 쥐었다. 윤태희는 가지고 있던 책에서 문제를 내겠다고 했다. 안경을 찾아 쓴 윤태희가 다리를 꼬고 한 손에 책날개를 겹쳐 쥐었다. 윤태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책 문장을 골라 읽었다.
“그는 멋들어진 구두를 세 켤레나 가지고 있었다.”
재겸은 열중해서 글씨를 썼다.
“그… 는… 멋들어진… 구두를….”
글씨를 쓰는 속도와 비슷하게 더듬더듬 발음을 되새기며, 재겸은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나갔다. 다 썼다 싶을 때까지 재겸의 필기를 지켜보던 윤태희가 슬쩍 말했다.
“다음?”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에 흠뻑 젖은 그는 몹시 안돼 보였다.”
답을 적어 내려가던 재겸이 멈칫했다. ‘되와 돼’, ‘않과 안’이 헷갈렸다. 저번에 윤태희에게 설명을 들었던 부분이었다. 그땐 분명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쓰고 보니 맞는 건가 싶어 긴가민가해졌다.
“다음?”
“아니. 잠깐만….”
재겸이 적은 답은 ‘않되 보였다.’로 오답이었다. 재겸은 고개를 들고 윤태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왜 보느냐는 듯한 얼굴로 눈썹을 한쪽을 슥 들었다. 그에 재겸은 윤태희의 낯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뜻밖의 심리전이었다. 가드를 올리고 상대를 가늠하는 권투 선수처럼, 집요한 눈으로 윤태희를 살피던 재겸이 지우개로 글씨를 빡빡 지우고 다시 답을 썼다.
- 않돼 보였다.
답을 고쳐 쓴 재겸이 다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
표정을 살피던 재겸이 다시 지우개로 글씨를 빡빡 지웠다.
- 안돼 보였다.
이번엔 담장 안을 훔쳐보는 빈집털이범 같은 눈빛이었다.
“…….”
결국, 표정 관리를 하던 윤태희의 얼굴이 확 흐트러졌다. 웃음을 참지 못한 윤태희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친 게 정답이군. 재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정답을 찾아낸 재겸이 당당하게 말했다.
“다음!”
윤태희는 웃느라 한참 동안 문제를 내지 못했다.
“잠깐만. 이런 건 꼼수 아닌가?”
“이게 왜 꼼수야? 이건 통찰이지.”
받아쓰기 시험에도 고도의 심리전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윤태희는 조건을 하나 걸었다.
“이제부터 노트에서 시선 떼지 마세요.”
재겸이 작게 궁시렁거렸다.
드럽고 치사해서, 답을 마빡에 써붙인 것도 아니고….
재겸은 불만이 역력한 낯으로 지우개똥을 윤태희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툴툴 날려 보냈다. 재겸이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출제를 요구했다.
“알았어. 다음.”
재겸은 막상 규칙을 정해지면 곧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대단한 미남이어서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는… 대… 단한, 미… 남… 이어서….”
윤태희는 턱을 괴었다.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고분고분 받아쓰는 재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재겸이 다 쓰기를 기다린 윤태희가 보란 듯이 책을 다음 페이지로 넘기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뭘 먹어서 그렇게 예쁘니?”
방금 지어낸 것으로, 책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너는. 무얼. 뭘. 멀. 머거… 서….”
재겸은 몹시 열중한 얼굴로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노트를 뚫고 들어갈 것처럼 포복 자세로 데스크 위에 엎드려서는 미간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연필심이 종이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처… 음… 너를… 봤… 을… 때부터….”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부터 욕심이 났어.”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자꾸만 시선이 갔다. 소년은 때때로 모든 것이 닳아버린 노인 같다가도, 순수한 어린애 같았다. 순진함과 초연함이 공존하는 지친 소년은 언제나 윤태희에게 기이한 전율을 안겨 주었다.
손끝 하나 건들지 않고, 그저 조각상처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고 지저분하게 망가뜨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처음 만나던 그 순간부터 그랬다. 재겸은 윤태희로 하여금 언제나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게 만들었다.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불현듯 머릿속에서 패현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
윤태희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차츰 흐려졌다.
재겸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얻기까지 윤태희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자신의 과거를 부정했다. 그렇게 지난 10년이 붕괴했다. 윤태희는 하루하루 조금씩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방법을 찾지 못 한다면…….
윤태희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언젠가부터 재겸이 사라진다는 가정 자체만으로도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때마다 설계자의 머리는 자꾸만 생각을 멈추고 실의에 빠졌다. 고통스러운 타격감과 뼈저린 무력감을 느꼈다.
윤태희는 처음으로 시간이 느리게 가기를 바랐다. 언제나 복수하는 날만을 꿈꾸며 쉼 없이 달려온 윤태희에게 있어 이것은 낯선 갈급이었다.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유쾌해서, 너무 유쾌해서, 자꾸만 불행해진다. 복수를 위해 만난 네가 선사하는, 복수와 무관한 찬란한 일상….
단단히 걸어 잠갔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이후로 자유롭게 흘러넘치는 감정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윤태희는 일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충만함과 평안함을 느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재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것은 정말 진심이었다.
지난 윤태희의 일생은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대비하는 삶’이었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삶을 살아온 윤태희는 애초에 기대하는 법을 몰랐다. 따라서 기대할 줄 모르는 윤태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윤태희에게는 재겸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재겸의 마음보다도 자신이 가진 이 마음이 훨씬 중요했다.
그 무엇도 이 마음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도. 너마저도….
‘그자의 마음을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네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그래서 너도 나처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뱉었다.
“너를 볼 때마다 살아남길 잘했다고 생각해.”
“너… 를… 볼. 때. 마… 다….”
윤태희는 글 쓰는 데 열중한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걸지도 몰라.”
“나는… 널… 만나기 위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네가 또박또박 받아 적는 광경.
“너와 함께하는 매일이 생일 같아.”
“너… 와… 함께… 하는… 생일…….”
열중하여 글씨를 쓰던 재겸이 멈칫했다.
뭐지?
불러 주는 대로 적다 보니 의미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불현듯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희는 여태 책에 나오는 문장을 문제로 내고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내용이 확 달라진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재겸은 일단 마저 문장을 받아 적었다. 어쨌든 이걸로 총 열 문제였다. 방금 불러 준 문제만 다 쓰면 오늘의 받아쓰기 시험은 끝이었다. 재겸이 연필을 고쳐 잡고 문장을 끝까지 완성할 때였다.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줄래?”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연필심이 부러졌다.
“…….”
순간적으로 손이 삐끗하고 말았다. 재겸이 삐걱거리듯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는 어느새 책을 덮은 채, 가만히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서로에게 시선이 붙들린 상태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고,
“무, 문제… 열 개 끝났어….”
재겸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윤태희가 책을 탁 덮더니 손을 뻗었다. 노트를 가져갔다.
그래. 방금 건 논외. 탈선. 누락되어야만 했던 문제. 범위 바깥에 있던 고백. 규칙에서 벗어난 욕심. 불필요한 기대.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