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65)화 (165/348)

#165

잠에서 깨어난 재겸은 머리맡에 둔 휴대폰부터 찾았다. 요즘 재겸이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프렌즈팡을 켜는 것이다.

재겸은 선물 받은 하트까지 몽땅 털어가며 열심히 액정을 두들겼지만,

게임 오버!

결과는 언제나처럼 기록 경신 실패였다.

“썅….”

그때, 상단 배너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효문쓰 : 헤이 칠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겸이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은 윤태희와 정주, 딱 둘뿐이었다. 그러나 프렌즈팡을 시작하면서부터 원활한 하트 조달을 위해 메신저를 깔고 주변 사람들의 번호를 저장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임효문이었다.

임효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시답잖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효문쓰 : 오늘 언제 출근해? 난 오전~~]

재겸은 어느샌가 임효문과 곧잘 어울리고 있었다. 예전엔 말 많은 임효문이 성가셨는데, 함께 영화관에 갔다 온 이후로는 임효문의 촉새 방정에 단련이 되었는지, 지금은 임효문이 전처럼 귀찮게 느껴지진 않았다.

[김재겸 : 나두.오전]

[효문쓰 : ㅋㅋ같이 출근 할래?]

재겸은 잠시 고민했다.

[김재겸 : 어]

***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재겸은 종묘로 가는 7212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재겸은 빈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서 임효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김재겸 : 탐]

몇 정거장쯤 갔을까, 버스 앞문이 열리며 샛노란 탈색모가 나타났다.

“칠칠아!”

임효문이 선홍빛 잇몸을 내보이며 재겸에게 다가왔다. 재겸이 함께 출근하자는 임효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효문에게 상의할 것이 있었다. 재겸은 임효문이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뭐? 널 사랑한다 그랬다고?!”

재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효문이 토끼 눈을 뜨고 꽥, 소리를 질렀다. 버스 안의 승객들이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재겸이 짜증을 냈다.

“조용히 말해. 이 등신아.”

재겸은 임효문에게 지금까지 저와 윤태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 참이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게 짱돌을 굴렸다. 생략할 거 생략하고 나름 각색을 했다. 요약하자면 계속 사이가 나빴는데, 어쩌다가 조금 사이가 풀어졌고, 그래서 전처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라… 라는 것이었다.

상담의 핵심은 ‘가끔 낯간지러운 언동을 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였다.

“헐… 고백을 했다니….”

칠칠이에게 무반응으로 일관하라고 조언을 주었던 게 얼마 전의 일이다. 그렇게 칠칠이에게 흥미를 잃은 상대가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직접 고백을 했다니… 혹시 칠칠이한테 정말 진심이었던 걸까?

“그래서? 고백하면서 뭐래?”

임효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뭘 뭐래.”

“널 좋아한다, 그게 끝은 아닐 거잖아?”

재겸이 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끝인데.”

“뭐? 그게 끝이라고?”

임효문이 몹시 황당해하며 쏘아붙였다.

“야, 고백했으면 확실하게 관계 정립을 해야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너라도 받아 주든 차 버리든 제대로 결론을 냈어야지!”

“그래서 나도 저번에 날 잡고 한번 물어봤어.”

“뭐라고?”

“그냥, 뭐… 나한테 뭘 바라는 거냐고.”

“그랬더니?”

“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대.”

임효문이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더니 미간을 감싸 쥐었다.

“넌 그 말을 믿냐? 바라는 게 없는데 고백을 왜 해?”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그거면 된대.”

재겸의 부연에 임효문이 인상을 구겼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어장꾼의 뻔한 레퍼토리였다.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널 잃기도 싫다!

“야, 칠칠아. 그 누나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다.”

“왜?”

“왜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니까!”

임효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고백이야?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 말만 좋아한다고 하면 다야?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신경도 안 쓰면서, 본인 감정만 앞세워서 일방적으로 표현하고, 괜히 사람 불편하게 만드니까 이기적인 거지!”

임효문이 심각한 얼굴로 재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칠칠아. 너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뭐가?”

“뭐긴, 어영부영 끌려가지 말고 확실히 선을 그어야지.”

“선 그었어. 근데 선을 그었는데도 자꾸 선을 넘어.”

나는 너 같은 남색가가 아니라고, 재겸은 며칠 전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었다. 윤태희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여전히 재겸을 졸졸 따라다니고,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고, 때때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칠칠아. 사람은 발 뻗을 자리 보고 뻗는 법이야.”

재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임효문을 쳐다볼 때였다.

“선을 그었는데도 넘어온다는 건, 애초에 네가 선을 제대로 긋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네가 애매하게 받아 주고, 여지를 주니까 그러는 거라고.”

내가 여지를 줬다고? 재겸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온 힘을 다해서 모질게 밀어내야지.”

재겸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

사실 재겸은 윤태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윤태희가 차를 끌고 데리러 오거나 데리러 와 주는 것도 편하긴 했다. 가끔 낯간지러운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껄끄럽고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처럼 잘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싶었다.

만약 모질게 밀어냈다가 또 사이가 안 좋아지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영영 볼 일이 없을 거야.”

“응? 왜?”

임효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보기 싫어도 한동안은 봐야 하는 사이라는 건 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두 달 뒤에 헤어진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그냥… 원래 처음 만날 때부터 약속한 거였어.”

말을 흐리던 재겸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남은 시간 동안은 안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어.”

임효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너도 참 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칠칠이가 그 사람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겠다. 언젠가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칠칠이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잘 지내보고 싶었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었다. 보이지 않는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인연의 끈을 놓기 힘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국, 확실한 계기가 없는 이상 계속 끌려다닐 것은 자명해 보였다.

“됐다. 됐어. 그럼 그냥 즐겨.”

“즐기라니, 뭘?”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걸 즐기라고.”

뭐? 재겸이 설핏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어쨌든 너도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거잖아. 그럼 뭐 별수 있냐?”

임효문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서 연애 상담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다는 거다. 이러쿵저러쿵 말해줘봤자 결국은 본인 맘대로 할 테니까.

“아무튼, 칠칠아. 형이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임효문이 검지를 척 내보이며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야. 확실하게 선을 긋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끌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너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가 올 거고.”

말을 멈춘 임효문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두 달 뒤에 볼일 없는 사이라면 잘 지내는 게 좋겠지. 무슨 맘인지 알아. 근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더더욱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겠냐?”

팔을 뻗어 하차 벨을 누른 임효문이 재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과 잘 지내면 잘 지낼수록, 헤어지기 힘들어질 테니까.”

***

버스에서 내린 재겸과 임효문은 횡단보도에 섰다. 초록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을 앞을 지나던 검은 세단 한 대가 도로변에 멈춰 서더니, 조수석 창문이 쑥 내려갔다.

“어! 재겸이!”

난데없는 부름에 재겸과 임효문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강 주임님?”

강이빈이 고개를 빼고 재겸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임님? 칠칠이 선임분인가보네…. 임효문이 재겸과 강이빈을 번갈아서 볼 때였다. 강이빈이 운전석에 뭐라 말을 하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강이빈을 본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소대로라면 각 잡힌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할 강이빈이 민소매로 된 하늘하늘한 쉬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이빈은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누구?”

곁에 있던 임효문을 힐끔 바라보던 강이빈이 재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어느샌가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임효문이 소곤소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심까. 암행부 제4팀 수습 나자 임효문입니다.”

은밀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임효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칠칠… 아니, 재겸이랑 동기입니다.”

“아아, 우리 재겸이 동기구나? 암행부라니 더 반갑네요.”

강이빈이 임효문에게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 재겸이네 강 주임이에요.”

임효문이 간신배처럼 허리를 숙이며 넉살 좋게 말했다.

“편하게 효문이라고 불러주세용.”

강이빈은 “그래그래, 효문이.” 하며 악수한 손을 신나게 흔들었다. 재겸은 임효문과 악수하는 강이빈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본청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신기했고, 평소와 다른 옷차림인 것도 신기했다. 임효문과 통성명을 끝낸 강이빈이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이, 표정이 왜 그래?”

강이빈이 으하하 웃으며 재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누나 치마 입은 거 처음 봐서 놀랐구나?”

재겸은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이빈은 평소 하던 대로 재겸의 머리통을 부슬부슬 매만지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누나도 이십육 년 평생 이런 옷 처음 입어 봐.”

강이빈의 너스레에, 잠자코 있던 임효문이 불현듯 눈을 번뜩였다.

뭐라? 이십육 년 평생? 그 말은, 이빈 누나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

임효문은 저도 모르게 재겸과 강이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빈 누나가 나타난 이후로 칠칠이는 말수가 줄었다. 게다가 이빈 누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었다….

“누나 오늘 이쁘지?”

“예에….”

아까부터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숙맥이 됐다.

“재겸아, 지금 누나랑 윤 수석님이랑 출동하는데 너도 따라서 와.”

“…예?”

“재겸이 너 수습 기간 두 달 뒤에 끝나잖아. 이제 두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인사평가 신경 써야지. 점수 미달로 축역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누나가 윤 수석님한테 너도 같이 가자고 말씀드렸는데, 알겠다고 하셨어.”

맞아! 그러고 보니 두 달 뒤는 수습 기간이 끝나는 시점이다!

“서, 설마…!”

임효문이 입을 틀어막으며 강이빈을 쳐다보았다.

“응? 왜 그래?”

그에 강이빈이 의아한 눈으로 임효문을 쳐다보았다.

“네?!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임효문이 갑자기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음? 그래, 잘 가…. 다음에 보자.”

뭐지? 강이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임효문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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