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귀기를… 귀기를 쓸 수가 없어요!]
아직 잠입에 나서지 않은 재겸과 윤태희가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만요. ”
재겸과 윤태희는 구석으로 가서 쥔 손에 귀기를 실어 보았다. 강이빈의 말대로였다. 마치 뭔가에 틀어막힌 것처럼 귀기가 나오질 않았다.
재겸이 낯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때 같아. 예전에 산에서 밧줄에 묶였을 때….”
윤태희는 설핏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너무나 손쉬운 입장 절차. 반면에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수의 경호 인력은 묘한 위화감을 줬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귀기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을 되짚어보는데,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귀기를 봉쇄당할 수 있는 경우는 밧줄 말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얼마 전, 제구부에서 귀기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스프레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아, 혹시 웰컴 드링크….
윤태희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제구 발표회에서 소개되었던 귀기 마비 스프레이가 생각났다. 발동 조건 없으므로 나자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고, 사람을 상대로도 귀기를 마비시킬 수 있다고 했으며, 인간은 섭취할 경우 효능이 있다고 했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먹은 것은 샴페인이 유일했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명히 경고했었다. 만약 윤태희의 시나리오가 맞다면 제구부의 스프레이가 외부로 반출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 사건 자체에 대한 의문이 솟아올랐다. 평소에 맡는 임무에 비해서 사전에 주어진 정보가 현저히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암행부 나자가 무슨 일 때문에 잠입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혹시, 내부에서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인가?
“강 주임님, 혹시 이번 임무 누구 지시였어요?”
[네? …어, 암행부 최 부장께서 저한테 직접 부탁하셨어요.]
축역부 나자들이 사건을 배정받는 절차는 둘 중 하나였다. 상황실에서 정식으로 이관을 받거나, 혹은 축역부장이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상황실이나 석주련을 거쳐서 온 것이 아니라 암행부장의 지시였다. 원래 암행부 출신이었던 강 주임은 암행부장과 왕래가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윤태희가 말했다.
“석 부장님은 우리 쪽으로 사건 이관된 거 알고 계세요?”
[최 부장님이 직접 석 부장님께 협조 요청하셨다고 했어요. 긴급 건이라서 석 부장님께서 구두로 축역부 동원 허가 내렸다고 하셨고요.]
“그래요? 혹시 연락 끊겼다는 암행부 나자가 누군지는 알아요?”
[음… 아니요, 부장님 선에서 비공개로 움직이는 사건이라고, 따로 TF팀을 꾸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보안 문제로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알겠어요. 잠깐 대기하세요.”
윤태희는 무전을 끄고,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목록에서 석주련의 개인 직통 번호를 찾아낸 윤태희는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갔다.
“부장님, 저 태희요. 암행부 최원영 부장이 TF팀 꾸려서 따로 애들 부리다가 연락 두절돼서 축역부에 협조 요청 했다는 거 사실이에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윤태희는 전후 사정없이 용건부터 물었다.
- 뭐?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강 주임한테 오더 내렸다고 들었는데요.”
- 누가 누구한테 무슨 오더를 내려?
“…….”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윤태희가 입술을 삐뚜름히 올렸다. 석주련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윤태희는 더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윤태희는 다시 넥타이핀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붙였다.
“…강 주임님, 작전 변경할게요.”
윤태희는 일단 침착하게 강이빈에게 무전을 보냈다.
“철수합니다. 일단 1층으로 다시 돌아오세요.”
무전 핀에 지시를 불어넣은 윤태희는 손목을 젖혀 시간을 확인하더니, 슈트 재킷 안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재겸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차 키를 받아든 재겸이 의아한 눈으로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강 주임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그리고 만약 삼십 분 안에 나한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강 주임이랑 본청으로 복귀해.”
말을 마친 윤태희가 발길을 돌릴 때였다.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손목을 콱 붙잡았다.
“야…! 어, 어디 가는데? 나도 데려가.”
윤태희가 재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돼.”
“왜?”
윤태희가 한쪽 입술을 휘며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궁리를 하는 듯하던 윤태희가 이내 재겸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건 함정이니까.”
***
재겸을 뒤로한 채 윤태희가 향한 곳은 남자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윤태희는 곧바로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었다. 값비싼 재킷을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아 넣은 뒤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손에 물을 묻혀 머리칼을 매만졌다. 깔끔하게 올렸던 앞머리를 내리자 차갑고 이지적이던 인상이 훨씬 어려 보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윤태희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천장에 붙은 감시 카메라의 위치를 살폈다. 그때, 멀리서 서버 한 명이 짐을 운반하느라 돌돌돌, 서빙 카트를 밀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던 윤태희는 벽에 붙어 기척을 죽이고 바퀴 소리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가,
“저기요.”
지나가는 서버를 불러세웠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서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태희를 돌아볼 때였다. 윤태희가 주먹으로 서버의 복부를 강하게 올려쳤다.
“쏘리.”
예고 없이 날아든 주먹질에 서버가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윤태희는 무너지는 상체를 한쪽 팔로 받쳐 안으며 서버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서버는 기침을 토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태희는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서버의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넥타이가 사라져 허전해진 목 언저리에는 서버가 매고 있던 나비넥타이를 뺏어서 착용했다. 명찰로 된 출입 키와 인이어도 뺏었다.
윤태희는 청소 물품을 보관하는 맨 끝 칸에 가서 대걸레 하나를 들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호출기를 꺼냈다.
윤태희는 대걸레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출기에 신호가 잡힌 것은 3층에 올랐을 때였다. 공연장이 있는 3층은 복도 입구에서부터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은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윤태희는 자동문 센서에 갈취한 출입 키를 갖다 댔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자동문을 넘어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호출기 액정에 알림이 뜨며 추적 장치에 반응이 왔다. 윤태희는 복도에 있는 모든 문을 차례대로 열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웬 창고 같은 넓은 장소를 발견했다. 불 꺼진 내부에는 잡동사니와 물품을 보관하는 곳인지 온갖 박스가 쌓여 있었다. 점점 추적기의 신호가 강해지고 있었다.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창고 안을 훑어보던 윤태희는 안쪽으로 진입했다. 깊숙이 들어갔더니 또 다른 문 하나가 나왔다. 윤태희는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하던 창고 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윤태희가 있던 곳은 무대와 이어지는 대기실이었다.
눈을 찌푸리던 윤태희는 밝은 조명이 켜진 무대 위로 나왔다.
그때였다. 손에 쥔 호출기가 우웅, 진동했다. 누군가의 호출기가 바로 이 안에 있다는 신호였다. 무대 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혹시 이거 찾나?”
어디선가 불쑥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훽 돌아보았다. 불 꺼진 텅 빈 객석에 누가 앉아있었다.
“…….”
상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대 계단으로 올라오더니 윤태희와 마주 보고 섰다. 초면이지만 구면이었다. 행사 식순이 적혀 있던 팸플릿 속에서 봤던 얼굴이었다. 예움아트센터의 소유주인 김예권이었다.
김예권은 너그러운 인상의 중년 남성으로, 통이 큰 넓은 양복 차림을 한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웃음기 띤 얼굴로 윤태희를 바라보던 김예권이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연락 두절된 암행부 나자가 소지했을 것으로 보이는 손거울 모양의 호출기가 들려 있었다.
김예권이 털털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자네, 나자 맞지?”
멈칫할 법도 하건만, 윤태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김예권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김예권이 이미 놀랍다는 듯 감탄을 뱉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구먼. 나자가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글쎄요…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윤태희가 천연덕스레 대꾸할 때였다. 김예권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윤태희에게 가깝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뭐, 너무 애쓸 필요는 없네.”
김예권이 재킷 앞주머니에 꽂아둔 볼펜을 빼서 한 손에 쥐더니, 윤태희의 목덜미에 마취침을 찔러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태희가 비틀비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정 실장. 진짜로 나자가 왔어. 방금 붙잡았으니 행사 취소해.”
김예권은 허리춤의 무전기를 들어 올리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는 이마를 짚으며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당신이 뭐 때문에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최대한 험하게 다뤄 줘.”
“…음?”
“대신, 때릴 일이 있으면 얼굴은 피해 줬으면 해.”
윤태희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김예권을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
“내가 가진 게 얼굴밖에 없어서….”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