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윤태희를 보내고 혼자 남은 재겸은 로비를 서성이며 강이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멀리서 강이빈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강이빈과 재회한 재겸은 윤태희가 남긴 말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삼십분 안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둘이서 본청으로 복귀하라는 이야기였다. 강이빈이 낯을 굳히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수석님 혼자 잠입하셨다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강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기다려보자.”
강이빈도 재겸도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윤태희가 무슨 생각으로 혼자 잠입을 하기로 한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세한 상황 설명을 안 해주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둘은 행사장 안에 있는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윤태희를 기다렸다.
“수석님 아직 연락 없으셔?”
시간이 갈수록 강이빈은 점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1분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윤태희가 말한 삼십 분이 다 지나고 있었다.
그때, 클러치백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드디어 수석님한테 연락이 왔나 싶어서, 강이빈의 낯이 환해졌다. 강이빈이 가방 속에서 후다닥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강이빈이 멈칫하며 눈을 구겼다.
“어…? 누구지….”
액정에 떠오른 발신자는 윤태희가 아니라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고민하던 강이빈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속삭이듯이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그런데, 너무도 뜻밖의 상대였다. 놀란 강이빈이 토끼 눈을 떴다. 재겸이 의아한 얼굴을 할 때였다. 강이빈은 재겸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
“석, 석 부장님?”
발신인이 정체는 석주련이었다. 강이빈은 입청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석주련의 직통 번호를 오늘 처음 보았다. 이렇게 개인적인 연락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석주련은 윤태희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직후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윤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에 석주련은 윤태희가 통화 중에 강 주임을 언급했던 것을 떠올리고, 강이빈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석주련은 강이빈에게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물었다.
“네? 아, 지금….”
구석에서 전화를 받던 강이빈이 목소리를 낮췄다.
“암행부 나자 연락 두절 건으로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 상황 설명해.
재겸은 두 사람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건너편에서 석주련이 뭐라 질문을 던지자 강이빈이 차근차근 답변을 했다. 암행부 최원영 부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부터, 이 건물에 들어온 이후로 어째선지 귀기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윤 수석 혼자 잠입한 상태라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으로 말을 끝냈다.
- …….
마침내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석주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 부장님?”
그때, 갑자기 전화가 뚝 끊어졌다.
“뭐, 뭐지… 전화가 끊겼네….”
강이빈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
축역부장실에 앉아 강이빈과 통화를 나누던 석주련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색이어서, 결재를 올리러 왔던 한주영은 아까부터 가만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부장님, 왜 그러십니까?”
한주영이 조심스럽게 질문할 때였다. 내내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석주련이 데스크 한쪽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암행부장실 내선 번호를 누르자, 보좌가 전화를 받았다.
“최 부장 지금 어딨어?”
- 제2세미나실에서 주간 보고를 받고 계십니다.
석주련을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내려놓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주영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축역부장실을 나와 복도를 성큼성큼 걷고 있으니, 곳곳에서 나자들이 허리를 숙이며 절도 있게 인사를 해 왔다. 그러나 석주련은 누구 한 명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석주련은 최 부장이 있다는 암행부 제1팀 사무실 앞에 서자마자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최 부장은 암행부 나자들과 둘러앉아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사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일시에 석주련에게 향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 데다가 왜인지 석주련의 기세가 매우 흉흉한 탓이었다. 나자들이 최 부장의 눈치를 보며 인사를 건넬 때였다.
“최 부장, 우리 애들 빼서 어디로 보냈어?”
최원영을 싸늘히 내려다보던 석주련이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
의아한 눈으로 석주련을 올려다보던 최 부장의 눈빛이 일변했다. 최원영은 석주련보다 너댓 살 많은 나이였지만, 두 사람은 십수 년을 봐온 사이였기에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멈칫했던 최 부장이 암행부 나자들의 기색을 한번 살필 때였다.
“듣자 하니 TF팀 꾸렸다면서. 나한테 구두로 동원 허가를 받았다고 하던데, 왜 나는 이 얘길 처음 듣지? 김예권한테 돈 받아 먹었어? 김예권은 뭐 하는 새끼야?”
석주련의 험악한 기세에,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자리에 앉아있던 최 부장이 낯을 굳히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석 부장, 진정하고. 그 얘기는 일단 여기서 할 게 아니라….”
최 부장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눈짓을 보냈다.
“뭐 이 새끼야? 무슨 수작질이야, 상황 제대로 공유해!”
그러나 석주련은 최 부장의 편의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석주련이 험악한 얼굴로 손을 뻗더니, 최원영의 멱살을 확 잡아 쥐었다. 그러자 눈치만 보고 있던 암행부 나자들이 대경실색하여 두 사람에게 우르르 모여들었다. 한주영 역시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석주련을 말렸다.
“부, 부장님…! 갑, 갑자기 왜, 왜 이러십니까…!”
석주련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최원영을 향해 낮게 뇌까렸다.
“최원영, 내 이름 팔아서 우리 애들 어디로 보냈느냐고.”
멱살 잡힌 최 부장의 얼굴 가죽이 뻣뻣하게 뒤틀렸다.
“석 부장, 애들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실수하는 거야.”
“실수? 무슨 실수? 너야말로 남몰래 애들 끌어다가 무슨 수작이야? 최원영 너 이 개 같은 새끼, 사적인 목적으로 애들 끌어다가 어떤 반동질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우리 애들 한 명이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결국, 최원영이 눈을 형형히 뜨며 주변 나자들에게 고함을 쳤다.
“뭘 보고 있나, 다 나가!”
그제서야 얼어붙어 있던 나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마침내 적막이 찾아왔다. 둘만 남게 되자, 석주련이 최원영의 멱살을 놓았다. 최원영이 희끗한 머리를 매만지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석 부장.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면….”
석주련은 응접 테이블 위에 놓인 집기들을 발로 걷어차며 최원영을 마주 보고 앉더니, 최원영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기며 매섭게 물었다.
“대답부터 해. 지금 우리 애들 데리고, 어디서 뭐 하고 있느냐고.”
최원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들었어도 원래 성격은 어딜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석주련은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했다. 이렇게 개차반처럼 구는 모습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지?”
“축역부 나자 한 명을 제물로 바치라 하셨다.”
“……뭐?”
석주련이 설핏 눈가를 구길 때였다.
“주련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최원영이 결국 입을 달싹였다.
“청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다.”
석주련이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석주련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갑작스럽게 끊긴 전화에, 다시 걸까 말까 고민하던 강이빈이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석주련은 감정을 억누르며 설명을 했다. 암행부장 최원영은 석주련에게 협조 요청을 한 적이 없고, 따라서 석주련은 축역부 동원 허가를 내린 적이 없으며, 이 모든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이빈의 낯이 점점 기묘하게 굳어갈 때였다.
- 강 주임, 당장 거기서 빠져나와.
“네? 하, 하지만… 지금 윤 수석님이….”
- 야 이 새끼야, 말귀 못 알아들어? 덫인지 함정인지 분간도 못 해? 등신같이 귀기도 틀어막힌 새끼들이 거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강이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석주련이 이렇게 격분하며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정심을 잃은 석주련이 험한 말을 쏟아냈다.
- 이 형편 없는 새끼들아, 머리는 대체 왜 들고 다녀?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가느냔 말이야! 다른 애들 발목 잡지 말고 당장 복귀해!
왜인지, 석주련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 잡힌 놈은 내버려 두고, 남은 놈들이라도 나와. 이건 명령이야…….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강이빈이 손을 덜덜 떨면서 황망한 눈으로 액정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천장에 붙은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장내에 계신 내빈 여러분께 알립니다. 오늘 예정된 5주년 자선 행사는 내부 사정으로 인해 취소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재겸과 강이빈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기어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