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잠시 정신을 잃었던 윤태희가 눈을 뜬 것은 암흑 속에서였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떠 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태희는 눈에 두건 같은 천을 두른 채 시야가 차단된 상태였다. 또한, 사지가 결박되어 팔과 다리에 아무리 힘을 줘봐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고개뿐이었다.
윤태희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두꺼운 가죽 벨트가 채워져 있었다. 오직 촉각에만 의지해 상황을 파악한 윤태희는 손목을 이리저리 뒤틀며 가죽 벨트에서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그런데, 문득 팔의 오금 언저리에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때마침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여 봤자 소용없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게.”
목소리의 주인은 김예권이었다.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야?”
이제 막 마취에서 깨어난 윤태희가 말꼬리를 늘이며 물었다.
“자네의 피를 뽑는 중이라네.”
윤태희는 그제야 자신의 양쪽 팔에 바늘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몸의 감각에 집중해 보니 굵직한 바늘이 꽂혀 있는 듯한 이물감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 어쩐지. 어지럽다 싶었어….”
윤태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근처에 서 있던 부하가 다가오더니 강한 힘으로 윤태희의 턱을 우악스레 틀어쥐며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알 수 없는 액체가 입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윤태희가 콜록거리며 거센 기침을 토했다.
웰컴 드링크로 마셨던, 귀기 스프레이를 섞은 샴페인이었다. 피를 뽑는 과정에서 귀기를 마비시키는 약효가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음료수를 마시게 했던 모양이었다.
“대체 피를 얼마나 뺀 거야? 나 과다 출혈로 죽기는 싫은데.”
잔기침을 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김예권에게 물었다.
“근데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혹시 귀재야?”
정말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함정인 줄 알면서 제 발로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저 말고도 내부에서 나례청에 반하는 자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강이빈은 암행부 부장으로부터 임무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사건이었고, 낌새가 수상했다. 만약 내부에서 꾸민 일이라면 그 배후에는 누가 있으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사주한 일인지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아니, 나는 범인일세.”
가볍게 고개를 젓던 김예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단 타고나기는 말이네.”
“…그게 무슨 말이지?”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러나 김예권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웬 종이를 꺼내더니 윤태희의 몸에 붙였다. 그리고 뭐라 주문을 외자 종이가 갑자기 후루룩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김예권이 경이에 찬 눈빛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자네, 상상 이상으로 좋은 그릇이지 않나! 가장 강한 귀재들은 축역부 나자로 활동한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 이렇게 강하게 반응하는 건 처음 봐서 놀랍군. 하하, 어쩌면 자네는 내가 본 귀재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겠어.”
김예권의 말에, 윤태희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글쎄, 그건 아닐걸. 가장 강한 귀재는 따로 있을 거야.”
“보기보다 겸손한 편인가 보군.”
“아니지. 이건 겸손이 아니라 자기객관화.”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두 달 전까지는 그랬는지도 몰라.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음?”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 있어서….”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던 윤태희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무튼. 근데 지금 내 피는 왜 뽑는 거야?”
사레가 들린 탓에 작게 기침을 뱉던 윤태희가 물었다.
“왜긴, 자네에게 영원을 주려는 걸세.”
뭐? 윤태희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김예권이 껄껄 웃음을 흘리며 인자한 어투로 대답을 꺼내 놓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 하지만 그 이름도 세월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야. 하지만 자네는 평생 이 땅에 남게 될 테니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지. 선생님의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게.”
선생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윤태희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이라니… 네 선생이 누군데?”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친 위대한 분이지.”
김예권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혼은 영영 시들지 않아. 하지만, 육신만은 어쩔 수 없이 시들어가고 있지. 육신은 결국 껍데기에 불과해. 소모품처럼 닳아버리니까. 그래서 선생님께는 새로운 그릇이 필요한데, 그릇을 만들려면 강한 귀재라는 제물이 있어야 했지. 그게 바로 자네일세.”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이내 신음하며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살갗 속에서 바늘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면서 현기증이 확 돌았다.
“당신이 말하는 그 선생이, 설마 영생이라도 얻었다는 거야?”
“그렇네.”
천 속에서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떻게… 네 선생은 어떻게 영생을 얻었지?”
내내 침착하고 무기력한 반응으로 일관하던 윤태희가 처음으로 뚜렷한 반응을 보이자, 김예권이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렸다.
“하하, 많이 놀란 모양이군. 하긴, 좀처럼 믿기지 않겠지.”
김예권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의 일부가 된다면 가능해. 어차피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몸뚱이지 않은가? 하지만 선생님의 그릇이 된다면, 자네는 영원히 죽지 않고 선생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그건 아주 큰 영광일 걸세.”
윤태희가 김예권의 손에 순순히 붙잡혀준 이유는, 속절없이 함정에 빠져 김예권에게 당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험하게 다뤄달라고 부탁한 것은 큰 피해를 본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계산에서였다. 윤태희가 원하는 그림은 자신을 나례청의 충직한 개로 보이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본청은 윤태희에게 부채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후 목패를 훔칠 때나 벽사단으로서 움직일 때 본청의 의심을 피하기에 수월해진다.
윤태희는 그런 생각으로 이곳에 남은 것이었다. 한데 여기서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재겸의 불로불사와 ‘선생’의 영생,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
윤태희는 잠시 동요를 억눌렀다. 침착하기 위해 애쓰며 머리를 굴렸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친 위대한 분이라…….”
우선은 정보를 더 캐내야 했다. 김예권을 도발해 보기로 했다.
“글쎄, 네 선생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쥐새끼 같은 방법까지 써 가면서 아등바등 살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차분함을 되찾은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선생한테 전해. 꾸역꾸역 버티며 사느니 뒷세대한테 양보하고 물러나는 게 미덕이라고. 하긴,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쳐도 이런 부분에서는 무지할 수 있지.”
“입 닥쳐.”
줄곧 너그러운 표정으로 윤태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어주던 김예권이 단숨에 낯을 굳히며 윤태희의 뺨을 철썩 후려친 것이다. 윤태희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도발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선생님을 함부로 모독하지 말게!”
이중인격자처럼 태도를 돌변한 김예권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윤태희의 뺨을 연달아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몇 대나 얻어맞은 윤태희가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는 터진 입술에서 배어 나온 피를 쪽, 한번 빨아먹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굴은 손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흡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이, 선생에 대해서 말 한마디 보탠 것으로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김예권 또한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듯싶었다.
“왜 사람들은 경고해도 귓등으로 듣질 않는지 모르겠어.”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나중에 가면 후회할 거면서….”
언제부터 피를 뽑고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슬슬 한계였다. 시야는 온통 암전이었으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사지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김예권은 틈틈이 윤태희의 혈액 팩을 확인하며 몇 번이고 팩을 갈아 끼웠다.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를 혈액 팩에는 어느덧 피가 반절 넘게 채워져 있었다.
이제는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지금쯤이면 본청에도 자신이 이곳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본청에서 사람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본청에서 나자가 오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왜냐하면, 윤태희의 진짜 무기가 무엇인지, 아무도 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손목에 찬 팔찌가 바로 윤태희의 무기였다. 윤태희는 처음부터 영귀를 불러낼 생각을 하고 얌전히 김예권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귀기가 틀어 막힌 상태였지만, 윤태희가 크게 걱정하지 않은 이유도 팔찌 때문이었다. 다만, 가죽 벨트에 손목이 묶여 있으므로 구슬을 헤아릴 여유는 없는 상황이었다. 고를 기회 없이 되는대로 아무나 불러내야 했다. 이왕이면 패현이나 다가였으면 좋겠는데. 그 둘이라면 이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선생’과 영생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상황을 정리한 이후로 천천히 들어볼 생각이었다. 물론, 질문을 해봤자 김예권이 순순히 답을 꺼내 놓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면 과격한 방법으로 입을 열게 하면 될 일이다. 마침내 윤태희가 영귀를 불러내려 할 때였다.
갑자기 김예권의 허리춤에 있던 무전기에서 연락이 왔다.
- 대표님! 큰, 큰일 났습니다!
정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예권이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 1층에, 1층에… 갑자기 웬 미친 사람이….
무전기 너머에서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뭐, 뭐야?”, “잡아, 잡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도 혼란스러운 현장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때아닌 소란에, 김예권이 의아한 눈을 하고 무전기를 내려다볼 때였다.
- 오, 오지 마! 뭐, 뭣들 하는 거야? 막아!
“정 실장, 무슨 일인가?”
정 실장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덜덜 떨면서 설명을 했다.
- 지금 웬 미친 사람이 와서, 피, 피를 잔뜩 흘리고….
“뭐? 대체 누가 왔다는 거야?”
- 그게… 그게, 그러니까….
이어지는 말에, 윤태희는 그대로 우뚝 굳을 수밖에 없었다.
- 본인을 ‘각시’라고 하면서, ‘이매’를 돌려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