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72)화 (172/348)

#172

- 본인을 ‘각시’라고 하면서, ‘이매’를 돌려달라고….

영귀를 불러내려던 윤태희는 무전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뭐? 누구?” 김예권이 낯을 굳히며 되물었다. 반면에 윤태희는 그 한 마디만으로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설마… 본청에 복귀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윤태희는 고개를 숙이며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계획이 틀어졌다.

윤태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재겸이 왔다면 영귀를 불러내기도 곤란해진다. 벽사단 단주라는 사실을 재겸에게 숨기기로 결정한 이상, 눈앞에서 영귀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위험했다. 또 무전을 엿듣기로는 피를 흘리고 있다고 했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귀기도 쓸 수 없건만 무모하게 구는 재겸이 걱정되는 한편.

쿵, 쿵, 쿵….

이 와중에 미친놈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내 평온하던 윤태희가 묘한 반응을 보이자, 김예권은 윤태희을 빤히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혹시 일행이라도 부른 건가?”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태연히 시치미를 뗐다.

“아니, 나는 모르는 일인데.”

김예권이 비웃듯이 혀를 찼다.

“그렇다면 별일이군.”

김예권은 윤태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침입자가 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예권은 곧바로 경호 인력을 집합시키라는 무전을 내렸다.

“으아악, 저, 저리 가!”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복도가 몹시 시끄러워졌다. 그에 김예권이 낯을 굳히고 문간을 쳐다볼 때였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낯선 침입자를 확인한 순간 김예권의 낯이 그대로 굳었다. 피로 칠갑한 정체불명의 소년이 손에 나이프를 들고 서 있었다. 어깨에 난 큼지막한 상처에서는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를 데 없이 섬뜩하고 기괴한 모습이었다.

“…….”

소년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김예권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희미한 광기가 실려있는 눈빛이었다. 소년의 시선이 김예권을 지나쳐 뒤로 향했다. 마침내 의자에 묶여 있는 윤태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네는 누군가?”

김예권의 질문을 무시하고, 재겸은 윤태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윤태희는 흐트러진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에 이상한 걸 꽂아두고 사지가 묶여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재겸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단정하던 옷차림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올렸던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술도 터져 있었다.

죽여버린다.

마침내 재겸은 살기 어린 눈으로 김예권을 바라보았다.

“뭐,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끌어내지 않고!”

섬뜩한 몰골에 놀라서 굳어 있던 김예권이 그제서야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뒤늦게 따라 들어온 경호원들이 재겸을 부랴부랴 붙잡았다.

“놔, 이 씨발새끼들아, 다 죽여버리기 전에.”

재겸은 자신에게 들러붙는 경호원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고정문을 잡고 귀기 실린 발길질을 해댔다. 퍽, 퍽, 인정사정없는 과격한 발길질에 걷어차인 경호원들이 억! 소리를 내며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졌다.

“칼부터 뺏어!”

그때, 경호원 하나가 재겸의 손을 팍 걷어차서 칼을 떨어트리게 했다. 칼을 놓친 재겸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경호원에게 다가섰다.

“니들이… 니들이 뭔데….”

재겸은 경호원 한 명의 멱살을 잡아 쥐고 패대기를 치더니, 죽자 살자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했다. 경호원은 벌벌 떨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전의가 살아 숨 쉬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인간이 아닌 것만 같았다.

“씨발 니들이 뭔데… 쟤를….”

나도 안 패고 가만 놔뒀는데, 애를 저렇게 패놓다니….

윤태희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릴 때마다 성질 가는 대로 마음껏 두들겨 팼다면, 윤태희는 지금쯤 관짝을 삼세번도 넘게 갈았을 것이다.

“누구는 때릴 줄 몰라서, 여지껏 안 때리고 가만 놔둔 줄 아냐? 패고 싶은 거 꾹 참고 있는데. 어디서 굴러먹은… 이 씨발 개새끼들아….”

말이 뚝뚝 끊어질 때마다 경호원의 얼굴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재겸은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화풀이를 하듯이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다. 어깨에 칼을 꽂았다가 뺀 상처가 고통스러웠지만 견딜 만했다.

어느새 온몸이 피범벅이었고, 아까 전부터 손에 미약하게 귀기가 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몸 상태 그대로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폭주를 각오하고 일부러 어깨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분명 피를 꽤 많이 흘린 것 같은데도 마비된 귀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풀리고 있었다.

재겸의 손에 잡혀 있던 경호원은 어느새 기절한 상태였다. 떡이 되도록 경호원을 두들겨 패던 재겸이 그대로 경호원을 짐짝처럼 패대기쳤다.

재겸은 형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서너 명에 불과했는데, 김예권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경호원들로 인해 숫자가 훨씬 늘어 있었다. 윤태희에게 다가가려면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을 치워야 한다는 뜻이다. 별 같잖은 찌끄래기 새끼들 주제에 앞길을 막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전부 죽여도 시원찮을 테지만, 하나씩 상대하자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재겸의 눈에 보이는 윤태희는 다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윤태희가 맞은 것이라고는 뺨 몇 대 맞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재겸은 점점 초조해졌다.

경호원들은 재겸이 무서운지 섣불리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슈트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에 경호원들은 재겸이 또 다른 흉기라도 꺼내 드는 줄 알았는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중 용감한 경호원 하나가 가스총을 꺼내 들며 고함을 쳤다.

“무, 무기를 버리고 물, 물러서세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경호원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재겸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확 끄집어냈다.

“뭐, 뭐야… 저거….”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경호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재겸이 꺼내 든 것은 흉기가 아니었다. 흉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앙증맞은 크기였다.

“저건… 새총?”

재겸이 손에 쥔 것은 행사장에서 한 아이가 떨어트리고 간 새총이었다. 생뚱한 물건에 경호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재겸은 경호원들을 향해 새총을 겨눴다. 경호원들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릴 때였다.

재겸은 활을 쏘던 실력으로 새총을 팽팽히 당겨 김예권을 겨냥했다.

피융—

새총에서 튕겨 나온 무언가가 쏜살같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멀찍이 서 있던 김예권이 저도 모르게 양팔을 들고 머리를 가릴 때였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정확히 김예권의 관자놀이 언저리를 때리고 툭 떨어졌다. 명중이었지만, 먼 거리에서 쐈기 때문인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김예권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뭐지, 이건?”

김예권은 날아든 물체를 주워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동그랗고 납작한 것은 크기가 작았으며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경호원이 침을 꿀꺽 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수은 건전지 같은데요?”

그 순간, 천 속에 감춰져 있던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야, 윤…!”

그때, 재겸은 목청을 높여 고함을 치듯 윤태희를 부르려다가, 한발 늦게 덜컥해서 말을 삼켰다. 이름을 불렀다간 나중에 저 찢어 죽일 새끼들이 또 저 애를 찾아서 괴롭힐지도 모르니, 되도록 이름은 숨겨야 했다.

“야 이 씹… 이매야—!”

호칭을 수정한 재겸이 다시 왁, 소리를 질렀다.

“오늘 6월 27일이야, 이 씹새끼야—!”

윤태희가 멈칫하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막힌 윤태희는 오로지 귀에 들리는 소리로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재겸의 고함에 멍하니 굳어 있던 윤태희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다가갈 수 없으면 쏘면 그만이라고, 예전에 그랬던가?

재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단박에 알아챈 윤태희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파들파들 떨면서 큭큭거렸다. 그에 김예권이 물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건가?”

“그래. 사실 거짓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거든.”

윤태희가 사실대로 털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소개할게. 끝내주게 섹시한 저격수.”

뭐? 김예권이 설핏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들었어? 오늘 6월 27일이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어?”

한참을 조용히 큭큭대던 윤태희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무술유월계미삭 스무이레…….

“윤태희가 은륜의 시한을 종료합니다.”

콰콰쾅——!

김예권의 손에 들려 있던 수은 건전지가 터져 나갔다. 형광등과 유리창이 일시에 깨지며 천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수은 건전지의 정체는 ‘은륜지’였다.

아까 전, 재겸이 세단 속 콘솔박스에서 챙겨온 물건이었다. 언젠가 파티에 귀신 들린 반지를 뺏으러 갔을 때, 윤태희가 콘솔박스에서 무전 핀과 은륜지를 챙겼던 것을 기억해낸 재겸은 묘수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귀기를 쓸 수 없다면, 미리 따로 모아둔 귀기를 쓰면 될 것 아닌가?

건물 잔해에 파묻혀 있던 재겸이 신음하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주위가 온통 난장판이었다. 은륜지가 터지며 건물 반쪽이 통째로 날아갔다.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재겸이 집어온 은륜지는 공교롭게도 윤태희가 가진 은륜지 중에서 가장 센 것으로, 어마어마한 귀기를 응축해 살상력을 지닌 것이었다.

재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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