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내가 알려줄게.”
윤태희가 기다란 장검을 바닥에 끌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저게 무슨….”
김예권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벌벌 떨었다. 옛날 복식을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검으로 변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저의 선생님께 나자를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은 나례청 내부에서도 합의가 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런 제물은 요구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어느 나자가 귀신을 부린다는 말인가? 그것도 잡귀도 아닌 영귀를.......
무기라고 불러야 할지, 귀신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장검은 추락하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그대로 벨 것처럼 잘 벼려 있었다. 음산하고 묵직한 귀기가 느껴지는 검신이었다.
검을 든 윤태희는 성큼성큼 김예권을 향해 다가왔다. 건물 잔해 속에 틀어박혀 있던 김예권은 사색이 되어 구석으로 도망쳤다.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벌벌 떨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오, 오지 마!”
그대로 검을 휘두르려던 윤태희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아니, 아니야. 이럴 게 아니지…….”
이대로 손쉽게 숨통을 끊어버릴 순 없었다. 적어도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줘야만 했다. 윤태희는 칼을 훽 내팽개쳤다. 챙강, 소리와 함께 칼이 나동그라졌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게 틀림없다.
이대로 쉽게 숨통을 끊어서는 안 됐다. 윤태희는 지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순간도 생각을 멈춘 적 없던 머릿속은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빡돌아서. 잠깐만.”
이성을 되찾은 윤태희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검을 함부로 내던진 것에 대하여, 검으로 변해 있는 패현에게 뒤늦게 양해를 구하는 말이었다. 윤태희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팔뚝 언저리로 슥 훔치며 왼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었다.
“함부로 죽이면 안 되잖아.”
검은 잠시 제쳐두고,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주먹에 덧대듯이 쥐고 김예권의 멱살을 잡았다. 손을 가볍게 흔들자 메탈 시계에서 쩔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예권의 복부에 한 쪽 무릎을 대고 자세를 잡은 윤태희는 사정없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빨 꽉 깨물어. 맞다가 혀 잘리기 싫으면.”
귀기가 틀어막힌 상태라 그저 맨주먹일 뿐이었지만 윤태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윤태희는 순수한 완력으로만 따지면 재겸에 뒤지지 않았다. 뭐에 씌인 것처럼 정신없이 김예권을 패던 윤태희의 눈에서 섬뜩한 분노가 번뜩였다. 자신의 체중을 실어 완력으로 때리는 데 몰두한 표정에서는 무언의 광기와 악의, 날것의 복수심 같은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였지만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윤태희는 미친 사람처럼 주먹을 휘두르다가 한참 만에야 손을 풀었다. 어느새 김예권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바닥에 뭉개져 있었다. 마침내 윤태희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김예권을 섬뜩하게 내려보았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압제자의 시선 그 자체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예권이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애원했다.
“살려줘….”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박살 난 시계를 옆으로 내던지고, 조금 전에 내팽개쳤던 장검을 주워들었다. 윤태희는 피에 물든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김예권에게 다가갔다. 피에 젖은 구둣발이 김예권의 손을 꽉 눌러 밟았다.
“가만있어요. 난 받은 건 그대로 돌려줘야 해서.”
김예권이 손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윤태희가 검을 쥔 손을 들었다. 김예권의 손가락을 고정하듯 밟고 있던 윤태희가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마.”
무성의한 명령과 동시에, 패현의 검신이 김예권의 손등을 지나 바닥에 내리꽂혔다.
“아아아악——!”
까무러치는 고통에 김예권이 비명을 질렀다. 타고나길 범인으로 태어나, 어쭙잖은 귀재 흉내를 내게 된 김예권으로서는 타고난 강한 귀재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귀기를 마비시킨 것이었으나, 윤태희가 귀신을 불러낸 순간부터는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었다.
저런 인간을 ‘제물’로 삼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자신은 이곳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김예권은 성한 손을 들어 윤태희의 구두 앞코를 할퀴듯이 움켜쥐고 빌었다.
“제발… 제발… 살, 살려줘….”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절박한 애원이었다. 윤태희는 묵묵히 김예권을 내려다보며 흐느낌을 귀 기울여 들었다. 윤태희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을 빼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아.”
윤태희가 선뜻 대답했다. 물론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죽이기 전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반쯤 정신을 놓았던 김예권이 삐걱거리듯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 그, 그게 정말인가…?”
윤태희가 피에 젖은 얼굴로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죽이기엔 아깝잖아.”
***
“영생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해.”
윤태희는 김예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김예권이 말한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얻어맞은 김예권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김예권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놀라웠다.
“인어… 인어의 피와 살을 취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네….”
뜻밖의 이야기에, 윤태희가 멈칫하며 눈을 반쯤 좁혀 떴다. 안 그래도 윤태희는 인어의 행방과 불로불사에 대해서 추적하고 있었다. 여기서 인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줄은 몰랐다.
“인어를 잡아서, 육신과 피를 분리하여 그걸 재료로 사용하는 주술인데….”
김예권의 설명은 이러했다. 지금은 사장된 금술 가운데 인어의 피와 살을 완전히 분리한 뒤, 그것을 제물로 하여 환(丸)을 만드는 것이 있는데, 그 ‘영생환’을 먹으면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어가 멸종하면서 이 주술은 더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그래서… 그 대안으로 또 다른 주술이 있는데, 귀재를 제물로 하는 것이네….”
윤태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예권의 말을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었다. 김예권의 설명에 의하면, 금술의 재료인 인어는 워낙 찾기 어려운지라 그 대체재로 ‘귀재’를 제물로 쓰는 주술을 행했고, 그래서 제물로 삼을 귀재를 찾아다녔다는 것이었다.
“그 영생환을 이용해서 네 선생이 불사가 되었다는 건가?”
“그렇네.”
“그렇다면 선생의 ‘그릇’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이지?”
머뭇거리던 김예권이 어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귀재로 만든 영생환에는 문제가 있었네.”
인어 대신 귀재를 바쳐 얻어낸 영생환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화’였다. 귀재로 만든 영생환은 신체의 노화를 막지 못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점점 기력이 약해지고, 미라처럼 변해서 신체의 기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귀재의 피가 필요했네. 계속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귀재의 피를 주기적으로 마셔야 하기 때문이야. 그러지 않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없어.”
그래서 자신은 바깥에서 귀재들을 불러모아 선생에게 피를 조달하는 일을 맡고 있었노라고, 김예권은 말했다. 복지 재단의 대표인 김예권은 보육원과 양로원 등을 운영하며 귀재를 찾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귀재의 피를 갈취해 선생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매일같이 귀재의 피를 마시며 노화를 막는 것이 지겨워지셨는지, 이번엔 아예 새로운 껍데기를 가져오라고 하셨어. 새롭게 혼을 옮겨 담고자 하셨지….”
김예권의 말에 따르면, 선생은 강한 귀재를 제물로 또 한 번 영생환을 만들어서, 아예 새로운 그릇을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그런 귀재가 아니라 강한 귀재가 필요했고, 귀재 중에 가장 강하다는 축역부 나자를 바로 그 ‘제물’의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제물이라.
원래 노렸던 사람은 아마도 강이빈이겠지. 애초에 출동 명령을 받은 사람이 강이빈이기도 했고, 암행부 부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아귀가 맞았다. 생각보다 본청 내부의 윗선하고 내밀히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구부에서 개발한 귀기 스프레이가 외부로 반출된 것도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이런 목적으로 내부에서 만들게끔 유도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 생각해보니 본청에서는 자신이 이곳에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원 인력이 오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강이빈은 무사히 본청에 복귀한 듯하고, 잠입 직전에는 석주련과 통화를 나눴다. 앞뒤 정황을 따로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 짧은 통화만으로 석주련은 이미 뭔가를 눈치챘을 것이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하는 ‘선생’이 누구지?”
지금껏 순순히 대답하던 김예권이 입을 다물었다.
“그, 그건 말할 수 없네….”
“그래? 그럼 말하게 해줄게.”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둣발로 김예권의 머리를 툭 건드리더니, 이내 김예권의 성한 손목을 구둣발로 지그시 밟았다. 근처에 있던 벽돌을 집어 들자마자 무언가를 예감한 김예권이 울부짖었다. “흐아악! 말, 말 못 해!” 윤태희가 손에 쥔 벽돌을 들어 올릴 때였다.
갑자기 김예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흐느낌과 함께 뭔가를 툭 뱉어냈다.
“으흐흐… 흐으… 흐흑….”
김예권이 뱉어낸 것은 작은 살덩이, 반 토막 난 혀였다.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었다. 그에 윤태희가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쓰러져 있던 김예권이 울컥거리며 피 대신 검은 물을 토해냈다. 김예권이 입으로 뱉어낸 검은 액체는 갑자기 꾸불텅하며 뭉쳐지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머리 같은 벌레의 형태로 변했다. 윤태희가 눈을 크게 뜨며 검을 뽑아 들 때였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검은 거머리는 금세 건물 잔해 틈으로 들어가더니 자취를 감췄다.
“죄, 죄송… 합니다…. 위대하신… 쿨럭, …님의 영전에…….”
김예권이 반 토막 난 혀로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말을 주절거리더니, 미치광이처럼 흐흐흐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김예권이 풀썩 고개를 떨궜다.
김예권이 머리통이 힘없이 바닥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나며 그대로 쓰러졌다. 윤태희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앉아 김예권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맥박은 끊어져 있었다. 윤태희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좆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