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김예권의 맥박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아, 좆같네.”
욕설을 뱉은 윤태희는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김예권은 죽었고, 김예권의 몸속에 나온 정체불명의 벌레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일단 여기서 무언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윤태희는 검을 내려두고 쓰러진 재겸에게 다가갔다. 피를 많이 흘려서 걸음마다 현기증이 돌았다. 갈비뼈가 부러져 흉곽 부근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재겸아.”
윤태희는 피를 흘린 채 고요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을 양팔로 번쩍 안아 올리자, 힘없이 축 늘어진 신체가 윤태희의 품에 순순히 안겼다.
윤태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재겸의 뺨에 볼을 맞댔다. 애처로운 마음에 자꾸만 숨이 막히고,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추락감이 들었다.
재겸이 흘리고 있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아깝게 느껴졌다. 마음만 같아선 쏟아지는 피 전부를 개처럼 핥아먹고 싶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나 가슴이 아플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맞닿은 뺨에서 희미한 호흡이 느껴졌다.
윤태희는 재겸의 목에서 넥타이를 풀었다. 난도질당한 재겸의 손목을 잡고, 팔뚝을 칭칭 동여 감으며 임시로 처치를 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조금이라도 출혈을 막아야 했다. 넥타이를 동여매고 매듭을 묶다가, 윤태희가 문득 손을 멈췄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잖아….’
불현듯 김예권의 말이 떠올랐다.
‘귀신은 스프레이 액체에 닿는 것만으로도 귀기가 마비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스프레이 액체를 직접 흡입하거나 섭취해야만 효험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피부에 살짝 묻는 정도로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당시 제구부 나자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인간인 재겸은 스프레이에 영향을 받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피를 많이 흘려서 폭주했던 재겸은 김예권이 뿌린 스프레이에 당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스프레이를 맞는 순간 붉은색 귀기가 일시에 흩어지며 폭주 또한 멈췄다.
그런데 어째서….
윤태희는 빤히 재겸을 내려다 보다가,
“…….”
재겸의 이마에 입술을 묻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집에 가자.”
재겸을 안아든 윤태희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왔다.
***
재겸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멀리서 묘정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른 등,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바람에 나부끼는 도포 자락, 재겸은 문득 제 손에 쥔 칼을 내려다보았다.
‘묘정.’
묘정, 하고 부르자 묘정이 재겸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묘정이 빙그레 웃었다. 재겸은 제 손에 들린 칼로 서슴없이 묘정을 찔렀다.
재겸은 꿈에 그리던 복수를 해냈다.
칼에 찔린 묘정이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는가 싶더니, 제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재겸은 무감한 눈으로 묘정을 응시했다. 뜨끈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재겸이 양 손으로 묘정의 어깨를 붙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건 나를 배신한 대가야.’
그렇게 말하며, 묘정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마주 볼 때였다.
‘…….’
묘정의 얼굴을 확인한 재겸의 낯이 하얗게 굳었다.
‘…윤태희?’
재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분명 묘정이었는데, 묘정이었는데, 이건 묘정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건 윤태희였다.
‘태, 태희야.’
재겸은 황망한 얼굴로 윤태희의 가슴팍에 꽂힌 칼을 바라보았다. 방금 제 손으로 찔러넣은 칼이었다. 윤태희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태희야! 태희야…!’
신음을 흘리던 윤태희의 상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재겸이 정신없이 눈가를 경련하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윤태희를 품에 안았다.
안 돼, 내가 윤태희를 왜… 내가 왜!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 넌 그 애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아주 익숙한 듯하면서도 아주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재겸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야… 아니야!’
재겸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윤태희를 죽이고 싶을 리가 없잖아. 내가 왜? 내가 왜….
품에 안은 윤태희는 어느덧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윤태희를 칼로 찔렀다. 내 손으로 윤태희를 죽인 거다.
재겸이 윤태희를 끌어안으며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안돼. 안돼. 안돼. 안돼. 그 애가 없으면, 그 애가 없으면!
네가 없으면 나는…….
허억, 재겸이 눈을 번쩍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침대가 출렁였다. 재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자신의 방 안이었다. 큼지막한 창문에서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불규칙한 호흡을 몰아쉬던 재겸은 멍하니 제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윤태희의 피로 흠뻑 젖어 있는 옷이 아니라, 평소 집에서 입던 옷이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윤태희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던 손이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악몽의 여파였다.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재겸은 그대로 상체를 수그리며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뭐, 뭐야…….”
처음으로, 처음으로 묘정이 꿈에 나왔다.
꿈이었다는 걸 인지했음에도, 재겸은 얼마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꿈의 내용이 이상하리만치 가혹하고, 두렵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재겸은 한참 동안 상체를 수그리고 놀란 마음을 진정했다.
분명히 묘정이었는데, 갑자기 윤태희로 변했다. 꿈에 묘정이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윤태희가 죽어가는 장면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재겸은 눈가를 감싸 쥔 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머릿속이 멍하고 어지러웠다. 재겸은 현실감을 되찾기 위해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그저 의미 없는 꿈일 뿐이다.
여기는 내 방 안이고, 그리고 윤태희는…….
“…….”
어느 순간, 재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김예권….”
재겸이 당황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강이빈, 윤태희와 함께 현장에 나갔었다. 그러다 귀기가 틀어막혔고, 윤태희 혼자 건물 안에 남게 되었고, 그래서 구하러 갔었다.
손목에 칼을 맞고 피를 어마어마하게 흘려서, 폭주를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기절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윤태희… 윤태희는 어떻게 됐지…?
침대를 박차고 나온 재겸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고 나오니 여느 때처럼 따스한 햇볕에 물든 거실 풍경이 보였다. 그런데,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메산이도, 유남생도, 정주도, 누구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재겸은 숨을 들이켰다. 문득 기묘한 공포와 두려움이 일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재겸이 당황한 낯으로 집 안을 살필 때였다.
“주먹밥 한 개에 얼마예요?”
그때, 반쯤 열린 샤시 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겸의 눈이 커졌다. 적당히 낮은 울림의 목소리는 아주 익숙했다. 윤태희의 목소리였다.
“어… 어어, 어… 오십 원이요….”
뒤이어 메산이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십 원이요?”
“예에….”
“주먹밥 하나에 오십 원이에요?”
윤태희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메산이는 좀 비싸다 싶었는지,
“아… 아… 그럼 이십 원이요….”
하고 가격을 깎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하하, 소리 내서 웃는 것이 들렸다. 재겸은 황급히 마당과 이어지는 거실 샤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을 내다보니, 마당 한쪽에 흰색 반팔 티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쪼그려 앉아 있는 윤태희의 너른 등이 보였다. 주변에는 소꿉장난하는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윤태희와 메산이는 마당에 앉아 소꿉장난을 하는 중이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윤태희가 말했다.
“그럼 저는 두 개 주세요.”
메산이가 풀을 빻아서 흙을 섞은 찌꺼기를 열심히 뭉쳤다. 주먹밥이랍시고 만든 것을 유남생의 등딱지 위에 올리자, 유남생이 엉금엉금 걸어서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유남생은 서빙하는 역할을 맡은 듯했다.
“맛있게 드십쇼. 손님.”
“감사합니다.”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고 먹는 시늉을 했다.
“냠냠. 어? 맛이….”
“맛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네요.”
“그, 그렇지요? 헤헤.”
윤태희가 이상한 조약돌을 꺼내서 메산이에게 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기 오십 원이요.”
“네에.”
“현금 영수증 해주세요.”
“녜…?”
멍하니 셋을 바라보던 재겸이 한숨을 푹 쉬며 눈가를 틀어쥐었다. 어느새 떨림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겸은 다른 무엇보다 윤태희가 무사하다는 것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진정한 재겸이 반쯤 열려있던 샤시 문을 드르륵, 활짝 열었다.
그때, 제일 먼저 재겸을 발견한 유남생이 꽥 소리를 질렀다.
“헉!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요?!”
그러자 윤태희와 메산이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메산이는 왜인지 눈이 퉁퉁 부어서는 얼굴이 찐빵 같았다. 메산이가 손에 쥐고 있던 소꿉장난 도구를 와르르 내던지더니,
“나, 나리!”
다다다, 달려와 재겸의 허리춤에 와락 안겼다.
“나리, 괜찮으셔요?”
메산이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망울망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렇게 다치신 거예요!”
메산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재겸의 허리춤에 얼굴을 묻었다. 재겸은 말없이 메산이의 뒷통수를 쓸어주다가 윤태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묻는 시선이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윤태희가 눈썹을 슥 올렸다.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