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어제 윤태희는 현장 수습과 뒷정리는 패현에게 맡기고, 곧장 재겸의 집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치료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본청 치료실에 갈 수도 없고, 일반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동자삼, 메산이의 치유 능력이었다.
정주와 메산이는 ‘많이 다칠 것 같다’라는 재겸의 연락을 받은 이후로 줄곧 마당을 서성이며 재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처참한 몰골에, 정주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각오는 했지만, 막상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니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메산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피를 보고 놀란 메산이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재겸과 윤태희를 치유해 주었다. 정주는 윤태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다. 그에 윤태희는 임무 도중에 부상을 당했으며, 폭주를 했다가 기절했노라고 에둘러 설명했다.
재겸이 폭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주는 사색이 되었다. 폭주하고 나면 그 반동으로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
단, 지난번의 폭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폭주가 끝까지 가지 않고 초반에 멈추었다는 것이다. 기력을 전부 소진하지 않았으니 며칠 뒤에 눈을 뜰지, 아니면 금방 깨어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윤태희는 하루 동안 이곳에서 묵으며 재겸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재겸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다.
“정주는 어디 갔냐?”
훌쩍이는 메산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재겸이 물었다.
“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하셨어요.”
정주는 오늘 정주와 권순철 감독 사이에 미팅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정주는 약속을 취소하려고 했지만, 윤태희는 자신이 재겸의 곁에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동안 메산이는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재겸이 깨기만을 기다렸다. 유남생도 덩달아 기운 없는 얼굴로 축 처져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집 안 분위기가 영 우중충했다. 그리하여 윤태희는 메산이를 달래 주고자 함께 소꿉놀이를 하며 어울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왜 울어, 임마. 뚝 그쳐.”
재겸은 우는 메산이를 달래 주다가,
“잠깐 와 봐.”
윤태희에게 눈짓을 했다. 유남생과 메산이에게는 둘이 놀고 있으라고 말한 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윤태희가 얌전히 재겸의 뒤를 졸졸 따라서 들어왔다. 방으로 돌아온 재겸은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재겸이 턱을 까딱였다. 옆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윤태희가 옆에 앉으니 끼익, 소리와 함께 침대 프레임이 기우뚱하는 것이 느껴졌다. 재겸은 말없이 윤태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너 메산이가 치료 안 해줬어?”
재겸이 다짜고짜 건넨 첫 마디는 이러했다.
“해줬어.”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윤태희의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입술이며 광대며 곳곳에는 피딱지가 생겨 있었고, 이마에는 큼지막한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뺨을 얻어맞아서 생긴 멍 자국이 남아서 피부도 얼룩덜룩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일부러 남겨달라고 했어.”
“왜?”
윤태희가 제 뺨을 쓸어보았다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석 부장한테 시위하려고.”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생한 티를 내려고 일부러 눈에 보이는 상처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재겸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왜? 아까워?”
제 뺨을 쓸어 보던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가.”
“잘생긴 얼굴에 흠집 나서.”
윤태희가 손끝으로 피딱지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
그에 재겸은 눈을 반쯤 내리뜨고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죽다 살아난 와중에도 헛소리를 해 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살만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제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윤태희가 물었다.
“손목 괜찮아?”
그에 재겸이 손목을 들더니 관절을 휘휘 돌려보았다. 칼에 뚫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목은 멀쩡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메산이가 고쳐줬잖아. 이제 안 아퍼.”
“어깨는?”
윤태희의 말에 재겸이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제 어깨를 쥐었다.
“맞다, 어깨.”
손목 상처가 워낙 컸던 탓에 어깨에 칼을 박아넣었던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메산이가 어련히 잘 치료해줬겠거니 싶었지만, 그대로 확인 차원에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러덩 벗었다. 어깨를 살펴보았다.
“멀쩡하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어깨를 확인한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윤태희가 아무 말 없이 재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 저렇게 보나 싶었다.
“왜?”
윤태희가 빌려 입은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더니, 뒤로 풀썩 누웠다. 그리고는 일부러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뱉었다.
“뭐지,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었다.
“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틀어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그에 천장을 멀뚱멀뚱 응시하던 윤태희는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슥 들며 말했다.
“남색가 앞에서 옷을 함부로 막 벗네.”
“…….”
뒤늦게 윤태희의 말을 이해한 재겸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뭔, 뭔 헛소리야? 다 나았나 보려고 벗은 거야.”
잠시 당황했던 재겸은 이내 정색하며 얼른 티셔츠를 꿰입었다. 같은 남자끼리 상체를 보이는 것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윤태희가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갑자기 의식이 되었다.
재겸은 침대 헤드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붙이며 윤태희와 거리를 벌렸다. 그런 재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윤태희가 픽 웃으며 말했다.
“맞아, 헛소리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다치지 마.”
“내 몸 걱정은 말고 네 몸 걱정이나 해.”
재겸이 짐짓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윤태희의 표정에서 차츰 미소가 흐려졌다.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마침내 웃음기를 지운 윤태희가 중얼거렸다.
“내가 아파서 그래, 내가….”
힘없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재겸의 어깨가 멈칫 굳었다.
“네가 다치니까, 너무 아팠어.”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
윤태희는 배 위에 양손을 얹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팠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윤태희는 피범벅이 된 재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아팠다. 시선을 느낀 윤태희가 눈을 스르륵 뜨더니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다치지 마.”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눈. 윤태희는 가끔 저런 얼굴이 된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
재겸은 왜인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누워 있던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원래대로 침대에 걸터앉은 윤태희가 재겸이 있는 쪽으로 상체를 기우뚱 숙이며 팔을 슥 뻗었다. 그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여 어깨를 움츠릴 때였다.
“어, 이거 그때 내가 준 거네.”
윤태희가 협탁 근처로 손을 뻗더니,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언젠가 스티커를 모은 선물이라고 전해주고 갔었던, 돔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안 버렸네. 버렸을 줄 알았어.”
윤태희가 손에 쥔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
재겸은 왠지 살짝 민망해졌다. 순간, 윤태희가 저한테 또 남색가 짓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윤태희는 그냥 오르골을 집으려고 한 것뿐이었다. 이게 다 아까 윤태희가 우스갯소리랍시고 이상한 헛소리를 해서 그런 거다. 재겸은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내렸다.
윤태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곧은 손끝으로 태엽을 감았다.
띠로롱, 띠로롱….
오르골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재겸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오르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윤태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짝 구부정한 등, 흰색 반팔 티셔츠 너머로 비치는 날개뼈와 자잘한 근육의 윤곽,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
문득, 이렇게 느슨한 옷차림을 한 윤태희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침대에 앉아서 오르골을 듣고 있는 윤태희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 오르골 음악이 끝났다.
노래가 끝나자 윤태희는 아까처럼 재겸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오르골을 제자리에 두었다. 한 번 착각했던 재겸은 무방비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오르골을 원위치에 둔 윤태희가 재겸을 꽉 끌어안았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재겸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윤태희를 밀어내려 할 때였다.
“며칠 동안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어.”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너무 불안했어…….”
“…….”
“그러니까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다치지 마.”
“…….”
아까부터 평소와 다름없이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태연하게 굴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목덜미에 와닿는 숨결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윤태희를 밀어내려고 했던 재겸의 손이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등 언저리를 맴돌았다.
재겸은 윤태희를 밀어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