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77)화 (177/348)

#177

“그러니까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다치지 마.”

재겸은 윤태희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주 안아 주지도 못했다. 불현듯 조금 전에 꿈에서 봤던 장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재겸이 찌른 칼을 맞은 윤태희는 이렇게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윤태희를 밀어내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은 어디에도 쉽사리 내려앉지 못하고 윤태희의 등 언저리를 맴돌았다.

“…….”

머뭇거리는 사이, 윤태희를 밀어낼 타이밍을 놓친 재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윤태희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뭐, 뭐라도 말을 해야…….

“혹시, 아주 오래전에….”

그때,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있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약 같은 거 먹은 적 있니?”

뜬금없이 날아든 질문이었다.

“약? 무슨 약?”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냥. 환 같은 거.”

환? 재겸은 설핏 인상을 구기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당장 생각나는 건 없었다. 잠시 먼 곳을 쳐다보던 재겸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근데 그건 왜?”

왜냐고 묻는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얼마 전부터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영생환’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먹으면 불로불사가 된다고, 넌 어쩌면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 그 영생환을 먹은 걸지도 모른다, 라고….

그리하여 만약 네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면, 불로불사에서 벗어나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서 평범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러면 너는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하루라도 더 살아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겸이 불로불사가 된 이유는 영생환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실한 단서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고, 김예권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말을 꺼내더라도 더욱 확실한 단서를 잡고 말하는 것이 나았다.

“아니, 그냥.”

한참을 침묵하던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윤태희는 결국 재겸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윤태희는 자신이 없었다. 재겸이 얼마나 죽음을 갈망하고 염원해 왔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태희만은 그 무게를 알았다.

재겸은 그토록 나자를 싫어했으면서, 나자였던 스승을 증오했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나자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오랜 세월을 함께한 호족과 동자삼이 있음에도, 그런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음에도, ‘죽여주겠다’라는 제안에 서슴없이 손을 잡았다.

‘마음을 얻을 자신이 없으시군요.’

불현듯 귓가에 패현의 말이 맴돌았다. 그렇다면 윤태희는 반대로 묻고 싶었다. 저 마음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막아설 수 있겠느냐고.

“야, 그래서….”

그때였다. 재겸이 뻣뻣한 자세로 윤태희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어색하고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재겸이 자연스럽게 윤태희의 상체를 밀어내며 물었다.

“어… 어제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뒤로 밀려난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영생환의 존재와는 별개로, 김예권이 말한 ‘선생’은 누구이며, 이번 사건에 본청은 어디까지 개입된 것인지, 김예권의 몸에서 나온 검은 벌레는 무엇이고, 재겸은 어째서 귀기 스프레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중첩되어 머릿속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본청 내부에서 누군가 일부러 일을 꾸민 것 같아.”

윤태희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다만 ‘선생’의 존재와 영생환, 그리고 귀기 스프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폭주하자마자 귀기 스프레이를 맞은 탓에 재겸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 기울여 설명을 듣던 재겸이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본청에서 가짜 임무를 내렸다는 거야?”

“그래. 암행부 부장 최원영이 혼자 독단적으로 꾸민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최원영도 본청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인 것일 수도 있고.”

“왜? 대체 이유가 뭔데?”

윤태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선 영생환의 존재와 귀재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없었다.

“…글쎄.”

따라서 윤태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에 재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나례청을 불신하는 재겸은 본청이 나자를 등쳐먹는 조직이라고 해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이번 사건이 축역부 나자를 밖으로 빼돌리기 위해서 꾸민 일이라는 것이고, 윤태희가 그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너 위험한 거 아니야?”

“위험하다니, 뭐가?”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뭐… 어제도 위험한 건 알고 있었어.”

그건 그랬다.

어제 윤태희는 ‘이건 함정이니까.’라고 말하며 재겸을 내버려 두고 혼자 그곳에 들어갔다. 그 상황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마침내 재겸이 낯을 굳히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위험할 줄 알면서 왜 제 발로 들어간 거야?”

귀기도 쓸 수 없는데 붙잡혀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혼자 잠입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제 발로 함정에 빠져서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니 재겸은 살짝 화가 났다.

재겸은 윤태희가 밑도 끝도 없이 맨몸으로 그곳에 들어간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벽사단주 윤태희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불러낼 수 있는 영귀가 있었다. 영귀들이 있는 한, 돌파하지 못할 상황은 없었다.

하지만 복귀한 줄 알았던 재겸이 현장에 다시 돌아오면서 영귀를 부를 수 없게 됐다. 재겸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깔끔히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둘 다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쎄…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순 없어서, 윤태희는 질문을 되돌렸다.

“너야말로 복귀하라고 했는데, 왜 돌아온 거야?”

왜 돌아왔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이 재겸이 미간을 좁힐 때였다. 마주 앉아 있던 윤태희가 눈을 가물거리며 능청스레 물었다.

“나 걱정했어?”

재겸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순순히 튀어나온 대답에, 윤태희가 멈칫할 때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을 때 너 혼자 다니지 마.”

재겸이 시선을 내리며 까칠하게 중얼거렸다.

“…….”

한 뼘 거리에서 재겸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윤태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끄러미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침대가 소리 없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윤태희의 얼굴이 재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간신히 거리를 벌려놨던 재겸이 움찔하며 침대 헤드에 등을 붙였다. 가깝게 얼굴을 마주한 윤태희가 말했다.

“고마워.”

재겸은 어느새 침대 헤드와 윤태희 사이에 갇혀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찌그러져 있던 재겸이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뭐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윤태희가 속삭였다.

“구해줘서.”

바로 앞에 윤태희의 얼굴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막힐 것처럼 긴장이 됐다. 그에 재겸이 외면하듯 고개를 측면으로 어정쩡하게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키스.

키스할 것 같다, 라는 느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긴장감. 이것은 어떠한 예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재겸이 경험한 키스는 갑작스러웠다. 늘 윤태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 라는 것을 재겸은 난생처음 경험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윤태희는 저에게 입을 맞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갑작스럽게 키스를 당하는 경황없는 상황에만 익숙했던 재겸은 이런 분위기일 때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재겸은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뭐가 고마워. 내, 내가 널 구하는 건 당연한 거야.”

속눈썹이 정신없이 나풀거리며 두서없이 말을 덧붙였다.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니까.”

코끝이 바로 닿기 직전에, 윤태희가 우뚝 멈췄다.

“…….”

코끝에서 멈춘 윤태희의 눈동자가 재겸의 이목구비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섬세하게 재겸의 얼굴을 살펴보던 눈동자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윤태희가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넌 뭘 좀 알아.”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던 재겸이 멈칫하며 물었다.

“…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겸의 각오와는 달리, 키스는 없었다. 방문 앞으로 걸어간 윤태희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푹 쉬어요. 출근은 내가 할 테니.”

그렇게 말하는 윤태희의 너른 등이 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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