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78)화 (178/348)

#178

윤태희는 출근 준비를 위해 자신의 아파트에 들렀다.

집에 돌아온 윤태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전된 휴대폰의 전원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어제부터 종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주변 연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하자마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이력이 쏟아졌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보인 이름은 강이빈과 석주련이었다.

무감한 눈으로 통화 목록을 찬찬히 살펴볼 때였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강이빈이었다. 윤태희는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네, 강 주임님.”

- …수, 수석님?

기대감 없이 전화를 걸었던 강이빈이 숨을 들이켰다. 줄곧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인지, 막상 전화를 걸어놓고도 윤태희가 전화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 수석님!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사하신 거예요?

강이빈이 경황없는 음성으로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 괜찮아요. 보다시피 무사히 살아나와서 전화를 받고 있고.”

-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걱정했어요? 종일 정신이 없어서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네. 나는 진짜로 괜찮으니까 안심해요.”

윤태희는 강이빈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은륜지를 써서 현장을 빠져나왔으며, 상황은 종결되었고 재겸 역시 무사하다는, 선택적으로 걸러낸 정보를 적당히 엮어서 만든 내용이었다.

- 수석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게 왜 강 주임님 때문이에요?”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하, 하지만 원래는 제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 나 곧 본청 들어가요.”

- 수석님….

“그럼 사무실에서 봅시다.”

***

정오를 앞둔 시각, 멍 자국이 얼룩덜룩한 맨얼굴로 본청에 들어선 윤태희는 시원한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제1팀 사무실로 향하기에 앞서 그보다 먼저 들를 곳이 있었다.

축역부장실 문 앞에 선 윤태희는 똑똑,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어, 계셨네요. 아직 출근 전이시면 어쩌나 했는데.”

윤태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을 건네며 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석주련이 문간에 시선을 주었다가 우뚝 굳었다. 이른 오전이었음에도 데스크 위에는 서류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석주련은 하루 만에 안색이 몹시 나빠져 있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윤태희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히 물었다. 그에 얼마간 말없이 윤태희를 응시하던 석주련이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대꾸했다.

“그래.”

여느 때처럼 허락도 없이 부장실 안에 들어온 윤태희는 가죽 소파로 가서 털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데 윤태희가 앉은 자리는 평소 석주련이 앉는 자리로, 데스크를 등지고 앉는 상석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윤태희는 마치 축역부장실이 제 사무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응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

석주련은 아무 말이 없었고, 윤태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스락, 신문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면 부장실 안은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신문을 넘기던 윤태희가 마침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넌지시 날아든 말에, 서류에 서명을 휘갈기던 석주련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석주련은 손에 쥔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간 말없이 윤태희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석주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암행부 최 부장이 정식으로 네게 사과하겠다고 하더군.”

“그래요?”

“비밀리에 TF팀을 꾸려서 임무 수행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 TF팀에 소속된 암행부 나자 중 한 명이 사적 목적으로 김예권과 유착 관계에 있었다는군. 그 과정에서 제구부에서 개발한 스프레이를 외부로 빼돌렸다는 모양이야. 최 부장이 직접 암행부 책임이라고 전부 인정했어.”

윤태희가 신문을 넘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태희는 석주련을 잘 알고 있었다. 석주련은 이렇게까지 말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요?”

“이번에 사고 친 그 암행부 나자는 이번 주 안에 제명 처리하겠다는군. 신분 노출 위험 때문에 암행부에서 자체적으로 내린 판단이야. 제구부에서 제작한 스프레이는 전량 수거해서 폐기 처분할 예정이고.”

“그렇군요.”

손끝으로 신문지 모서리를 매만지던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본청에서 기껏 생각해낸 핑곗거리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꼬리 자르기’였다. 그러나 윤태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그게 끝이에요?”

신문을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물구나무를 섰을 때처럼, 윤태희의 시야에 석주련의 얼굴이 거꾸로 뒤집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석주련이 어느 순간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그에 윤태희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왜인지 석주련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회피한 석주련은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귀기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붙잡혀 있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딱히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윤태희는 영생환이나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만 했다. 그저 운이 나쁘게도 암행부의 수작에 걸려서 큰 위험에 처했다가 빠져나온, 그 정도면 족했다.

“아, 아니면 혹시. 윤태희라면 어떻게든 빠져나왔을 것이다?”

농담처럼 날아든 능청스러운 말에도 석주련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줄곧 침묵할 따름이었다.

“절 그렇게나 믿어주시는 거라면 감사하긴 한데. 그래도 제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결국, 석주련이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떻게 빠져나왔지?”

엎드려 절받기나 다름없는 대화였다. 그에 윤태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은륜지 썼어요.”

“…그래, 그랬구나.”

고개를 꺾은 채 석주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태희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윤태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부장님, 혹시 저한테 미안하세요?”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석주련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왜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부장님.”

윤태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던 날,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

이어진 말에 석주련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는 윤태희예요. 나이는 모르고, 부모는 없어요. 그러니 목줄을 채우고 나를 사냥개로 쓰세요. 언젠가 필요가 없어진다면 그대로 버려도 돼요.’

“팽하셔도 상관없어요. 쓸모가 다했다고 판단하신다면 언제든지 버리세요. 어차피 부장님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요.”

윤태희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부장님 덕분이니까….”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천천히 웃음기를 지웠다, 마침내 이를 데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된 윤태희가 냉기가 맴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윤태희가 홀가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석주련은 축역부장실을 빠져나가는 윤태희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

축역부장실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석주련이 마침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석주련은 진작부터 윤태희가 무사히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나례청장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었다.

석주련은 어제 윤태희를 구하러 갔었다.

***

축역부장실에서 나온 윤태희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팀원들은 여느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윤태희를 맞이했다.

그런데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와 약간 달랐다. 어딘지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머지않아 윤태희는 그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수석님, 괜찮으세요?”

얼룩덜룩한 윤태희의 얼굴을 본 팀원들은 침중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강이빈으로부터 무언가 언질을 받은 듯했다. 팀원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윤태희가 강이빈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강이빈은 한눈에 보기에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눈밑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툭 치면 금세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오늘 재겸이는 안 나올 거예요. 어제 현장 나갔다가 긴장을 많이 했는지 몸살 기운이 있는 모양이에요. 하루 푹 쉬라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윤태희는 강이빈에게 슬쩍 신호를 줬다.

“강 주임님.”

윤태희는 수석실이 있는 방향으로 까딱 눈짓했다.

“잠깐 나 좀 볼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강이빈은 윤태희의 뒤를 따라 수석실로 향했다.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강이빈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혹시 팀원들한테 무슨 얘기라도 했어요?”

잠시 침묵하던 강이빈은 먹구름이 드리운 얼굴로 되물었다.

“수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뭐가요?”

“어제 큰일 날 뻔하셨잖아요.”

턱을 매만지던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그럴 뻔한 거지, 정말 그렇게 된 건 아니니까. 그리고 부장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이번 일은 암행부 나자 한 명이 독단적으로….”

그때, 강이빈이 낯을 굳히며 윤태희의 말을 잘랐다.

“그 말을 정말 믿으시는 거예요?”

강이빈이 입술을 꾹 깨물며 짓씹듯 말을 뱉었다.

“나례청은, 수석님을 배신한 거라구요.”

의자에 슈트 재킷을 걸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강이빈을 돌아보았다. 강이빈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그에 데스크에 느슨하게 걸터앉아 있던 윤태희가 강이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윤태희가 뒷짐을 지고 강이빈을 향해서 빼꼼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울어?”

심각해 죽겠는데! 분위기를 깨는 놀리는 듯한 말투에, 발끈한 강이빈이 손을 확 내리고 윤태희를 째려보았다.

“안 울거든요?!”

덕분에 내내 죽상이던 강이빈의 입가에도 설핏 미소가 걸리는가 싶었으나, 이내 강이빈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냥… 저는 용서할 수 없어요….”

강이빈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석님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본청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게 배신이지 뭐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요.”

그리고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건 저 자신이었다.

윤 수석이 위험에 빠진 걸 알면서 본청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 강이빈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겸처럼 구하러 가지도 못했고, 석주련의 명령에 반기를 들지도 못했으니까. 강이빈은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간밤에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저는 어제 이미 한번 죽은 거예요…….”

강이빈이 깊게 숨을 들이쉬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뭉개진 모래성을 바라보는 이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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