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정오 무렵, 재겸은 오늘 오후 출근이었다.
폭주에서 깨어난 이후로 재겸의 요즘은 대체로 별 탈 없이 무사 평안했다.
깨어나고 하루 이틀은 성가셨다. 그 이유는 정주와 메산이가 재겸을 환자 취급을 하면서 뒤를 졸졸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며칠이 흘러서야 재겸은 과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재겸은 거실로 나왔다.
부엌으로 향하니 정주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재겸은 정주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냉장고에서 반찬 통을 꺼내 놓았다. 메산이도 다다다, 달려와서 수저를 놓았다.
“야. 한 놈은 어디 갔어?”
“깽알 님 마당에 계세요.”
재겸은 샤시문을 열고 마당을 둘러보다가, 마루 데크 한쪽에 엎어져 있는 유남생을 발견했다. 유남생의 등딱지 위에는 예쁜 민들레가 놓여 있었다. 메산이의 소행이었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다가,
“야. 유깽알. 와서 밥 먹어.”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괜히 꾸중을 했다.
“너는 밥때가 되면 미리미리 나와서 숟가락이랑 젓가락이랑 놓고, 반찬 통 뚜껑도 열고 해야지. 꼭 불러야 오냐?”
“예에….”
멋쩍은 얼굴로 눈치를 보던 유남생이 엉금엉금 재겸의 발치로 기어왔다. 재겸은 유남생을 번쩍 들고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제 4인용 식탁 위에는 어른 수저 두 벌, 어린이 수저 한 벌 외에도 커다란 쟁반 하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유남생의 전용 식판이었다. 정주는 쟁반 위에 유남생이 먹을 몫을 따로 덜어서 주었다.
“그럼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요.”
유남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직까지는 그저 오갈 데가 없어 잠시 기거하게 된 숙객 정도였지만, 그래도 일주일이 넘게 함께 지내다 보니 유남생에 대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유남생은 생채소와 과일을 매우 좋아했다. 저번 날에 쌈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유남생이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먹는 걸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다음 날부터 식탁에 생채소가 자주 올라오게 됐다. 알배추, 당근, 오이 등이었다.
“오이가! 오이가 아주 꿀입니다요! 꿀!”
유남생이 오이를 찹찹 갉아먹으며 떠벌떠벌 말했다.
그리고 유남생은 입안에 음식을 한가득 욱여넣는 것을 좋아하며, 밥 먹을 때 맛이 있다 싶으면 맛이 좋다는 얘기를 골백번씩 하면서 발 갈퀴를 푸덕거렸다. 그리고 유남생은 말을 과장해서 하는 습관이 있다. 언젠가 바닥에 유남생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다 유남생의 발을 살짝 밟았는데, 유남생은 발이 문드러진 것 같다며 아주 난리를 쳤다.
그리고…….
“야, 어제 내가 먹으려고 꺼내 놓은 빵 누가 쌔벼 먹었냐?”
재겸의 말에, 유남생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먹었습니다요… 밤에 허기가 져서….”
유남생은 오랜 세월 굶주려서 그런지 약간의 식탐이 있다. 유남생이 훔쳐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 재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꾸중을 예감한 유남생이 등딱지 안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집어넣을 때였다. 정주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맞네, 그러고 보니 깽알이 너는 배가 고파도 냉장고나 찬장에서 뭐 꺼내 먹기가 힘들겠네. 그럼 이제 식탁에다 간식 좀 미리 내놔야겠다.”
잉? 유남생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젓가락질을 하고 있던 재겸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을 거들었다.
“얘 식탁까지 올라오려면 삼 년 걸려. 둘 거면 바닥에 둬야지.”
“아아, 맞네.”
그때, 유남생이 갑자기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뭐야! 깽알아, 너 왜 울어?”
정주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재겸도 살짝 놀랐다. 설마 아까 밥 가지고 혼구녕을 낸 탓에 새삼 서러움이 밀려와서 저러는 건가 싶었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럽니다요….”
“응? 무섭다니? 뭐가 무서운데?”
훌찌럭, 유남생이 눈물 젖은 오이를 깨작깨작 씹으며 말했다.
“끄냥… 끄냥 너무 행복해서요….”
그런데, 유남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를 댔다.
운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따스한 풍경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이 매일매일 꿈만 같았다. 유남생은 이 생활이 행복할수록 자꾸만 무섭고 서러워졌다.
“뭐? 행복하면 웃어야지, 왜 울어!”
그에 정주가 유남생의 머리통을 톡톡 쓸어주며 넉살 좋게 달래주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메산이는 덩달아 눈물을 글썽거렸다.
단, 재겸은 무표정한 눈으로 유남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남생은 행복해서 무섭다고 한다. 그 마음이 뭔지 재겸은 잘 알았다. 언젠가 모두 사라질 것이기에 미리 두려운 거다. 동굴에 갇혀 오랫동안 혼자 지냈던 유남생은 고독했던 시간만큼, 행복한 나날을 만끽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쥐어짤 것이다.
“야. 울면서 밥 먹으면 체한다.”
오이를 몇 개 집어서 쟁반 위에 올려주며, 재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어떤 위로로도 유남생은 이 공포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많이 먹어.”
***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재겸은 요 며칠 사이 이대로도 괜찮은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 이대로도 괜찮으냐고 묻는다면, 그 고민을 하게 만든 ‘무엇’은 당연히 윤태희였다. 한마디로 ‘그러니까 이건 너무 붙어 지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윤태희의 차에 타는 것. 윤태희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즈음 재겸의 일상은 정말로 윤태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굳이 맞춰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우선, 재겸은 하루에 한 번은 윤태희의 차를 타게 되었다.
매번 출퇴근을 같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퇴근이 같은 날이면 윤태희는 꼭 재겸을 차에 태워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가 하면 같이 출근하자거나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없었어도 재겸의 출근 시간에 맞춰 윤태희의 세단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는 날도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골목으로 나오자마자 세단이 눈에 띄었다. 윤태희는 운전석에 앉아 핸들에 느슨히 팔을 걸친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재겸은 일부러 대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운전석의 창문이 지잉, 내려갔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평소처럼 인사를 해왔다. 재겸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재겸은 어느덧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안전띠를 맸다.
검은 세단이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오늘따라 윤태희는 브라운 계열의 체크무늬 쓰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다. 쓰리피스 슈트를 입은 모습은 처음이라 약간 생경한 느낌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재겸은 저도 모르게 연신 윤태희를 힐끔거렸다.
곁눈질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윤태희가 픽 미소를 지었다.
“뭐지.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그에 재겸이 움찔하며 티 나지 않게 눈을 돌렸다.
“뭐?”
“자꾸 쳐다보네.”
재겸은 뻣뻣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헛소리하지 마.”
“그럼 왜 쳐다봤는데?”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 이발 했는가 해서.”
그에 윤태희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딱 보니 머리가 달라졌으니까.”
원래 윤태희는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다듬는 것뿐이라 말이 이발이지, 헤어스타일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구레나룻 부분이 살짝 짧아졌다거나 약간 숱만 친 정도였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에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아, 아니면 역시 나한테 관심이 있나.”
방향 지시등이 까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헛소리를 했다.
“…….”
그에 재겸은 아무런 대꾸 없이 정면만 바라보았다.
얼마 전부터 윤태희는 틈만 나면 저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매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받아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었다.
그저 가볍게 던지는 농담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겸은 윤태희가 던지는 저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냥 흘려들으면 되는데 자꾸 윤태희를 의식하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평정심이 깨지는 감각 자체가 편치 않은 건 당연했다.
그래서 재겸은 윤태희와 함께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지만,
“입 다물고 운전이나 해.”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쨌든 사이도 나쁘지 않고, 그것만 빼면 괜찮았다. 재겸의 핀잔에, 조용히 웃던 윤태희가 다정하게 물었다.
“밥은 먹었니?”
만날 때마다 하는 질문이었다.
윤태희는 항상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고, 먹었다고 대답하면 무엇을 먹었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무엇을 먹었노라 말하면 그때는 또, ‘맛있었어?’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편인 재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하는 윤태희가 가끔 신기하게 느껴졌다.
재겸은 그냥 평소대로 집밥을 먹었다고 대답했다. 역시나 윤태희는 “집밥 뭐?” 하고 물었다. 그런데, 문득 재겸은 윤태희는 평소에 뭘 먹나 궁금해졌다. 윤태희는 재겸이 무얼 먹었고 어떤 반찬을 먹었는지 하나하나 궁금해하면서 본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에 손을 꼼지락거리던 재겸이 지나가듯 물었다.
"넌?"
"응?"
"넌 밥 먹었어?"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재겸을 쳐다보았다. 여태껏 숱하게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눴으나 재겸이 윤태희에게 밥을 먹었냐고 되물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윤태희는 재겸이 주는 한 톨의 관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밥 먹었어."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뭐 먹었는데."
“그냥, 밖에서 간단히 먹었어.”
“그러니까 뭐 먹었는데.”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까칠한 어투로 재차 물었다.
“과카몰리 연어 샐러드랑 유자레몬 티.”
“…….”
대답을 듣는 순간 재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재겸이 이내 윤태희를 쳐다보며 언짢은 얼굴을 했다.
“까불지 마.”
갑자기 날아든 꾸중에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뭘 먹었냐고 하기에 샐러드와 차를 마셨다고 했는데 뭘 까불었다고 하는 건지 의아했다.
"뭘?"
“일부러 알아듣기 어렵게 외국말로 꼬아서 말한 거잖어.”
"나 그냥 먹은 음식 이름 말한 건데….”
변명은 필요 없다는 듯, 재겸이 가자미눈을 뜨고 윤태희를 싸늘하게 흘겨보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윤태희가 말한 메뉴들은 너무나 악의적이었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뭐, 알겠습니다.”
윤태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운전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영 쉽지가 않았다.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지만, 자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재겸은 촌놈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둥, 옛날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둥, 가끔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과카몰리 샐러드….”
윤태희는 운전 내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속 웃었다. 이걸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 하나 싶으면서 어떻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신기했다. 어이없고 황당하고… 귀여웠다.
“왜 웃어?”
그러나 재겸은 윤태희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허파에 바람 들었나?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할 때였다. 그때,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즐거워서.”
“…뭐?”
“너랑 있는 게 즐거워서 그래.”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
쟤는… 내가 그렇게 좋을까?
재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