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일상으로 돌아온 윤 수석과 김 수습은 잠시 중단했던 받아쓰기 시험을 재개했다. 윤태희는 매일같이 재겸을 수석실에 앉혀놓고 일대일 국어 과외를 해주고 있었는데, 오늘은 네 번째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치렀던 첫 번째 시험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재겸은 이날 의미심장한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었던 열 문제 중에 단 한 문제만 맞혔다. 비 내리는 노트를 들여다보며 재겸은 주먹을 꽉 쥐고 좌절했다.
재겸은 사실, 이렇게까지 처참한 결과를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젠가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필기는 몇 번 해봤었다. 물론, 그때는 교과서나 판서라는 교본으로 삼아 그대로 베껴 썼기 때문에 이렇게 애를 먹진 않았다. 도서실에서 감상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재겸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실력을 살짝 과신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본보기로 삼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들리는 대로 받아 적다 보니 재겸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재겸은 몹시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열 문제 중에 한 문제 빼고 다 틀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승부욕이 생겼다.
안 그래도 화딱지가 나 있던 재겸에게 윤태희가 노트를 건넸다.
‘틀린 문장은 여기에 열 번씩 따라 쓰세요.’
‘뭐?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그래야 다음부터 같은 문제를 안 틀리니까.’
‘그런 게 어딨어? 처음엔 그런 말 없었잖아.’
‘오답 노트 만드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에요.’
합격하면 스티커를 주겠다는 말만 들었지, 틀린 문장을 열 번씩 적어야 한다는 것은 사전에 듣지 못한 규칙이었다. 이렇게 귀찮은 벌칙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받아쓰기 시험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씩씩거리던 재겸은 그런 게 어딨냐며 거세게 항의를 했지만,
‘제일 중요한 게 복습이에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윤 선생의 교육철학은 아주 성가셨다.
결국, 재겸은 칼을 가는 심정으로 씩씩거리며 깜지를 써내려갔다. 오기에 치받쳐 연필을 쥐고 있으려니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면 연필심이 뚝, 부러지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윤태희는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다정하게 약을 올렸다. 그에 재겸이 “주먹으로 하기 전에 조용히 해라.” 하면 금세 조용해졌다. 재겸이 연필심이 부러뜨리면 윤태희는 이면지를 깔고 커터 칼로 손수 연필을 깎아 주었다.
틀린 문장을 열 번씩 적는 것도 일이었다. 말이 열 번이지, 아홉 개를 틀렸으면 총 아흔 개의 문장을 써야 한다. 게다가 필기에 익숙지 않아서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재겸이 한 시간 넘도록 벌칙을 수행하는 동안 윤태희는 옆에서 업무를 보거나 조용히 책을 읽고는 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두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에서 재겸은 열 문제 중에 세 문제를 맞혔다. 이번 시험도 역시나 스티커 획득 실패였다. 그래도 어제보다 두 문제를 더 맞혔으니 나름대로 발전이 있는 셈이었다.
합격하지 못한 것은 분했으나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 뼘 정도는 나아간 느낌이라 내심 기분이 좋았다. 깜지의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앞으로 두 문제만 더 맞히면 합격이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세 번째 시험.
이날은 전날보다 하나를 더 맞혀서 열 문제 중에 네 문제를 맞혔다. 합격의 문턱에서 고꾸라진 재겸은 속이 뒤집어졌다. 게다가 문장은 제대로 써놓고 끝에 마침표를 안 찍었다는 이유로 아깝게 오답 처리된 답이 있었다. 점을 찍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격이었을 것이다.
‘야, 이건 점만 안 찍은 거지. 쓰기는 제대로 썼잖어.’
채점에 불복한 재겸은 씩씩거리며 따지기 시작했다.
‘모든 문장에 마침표를 안 찍었으면 몰라도, 다른 문장은 다 제대로 마침표 찍었는데 이 문장만 안 찍었잖아요. 그러면 이건 오답이 맞지.’
그러나 재겸의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재겸이 점찍는 걸 까먹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윤태희 때문이었다.
출제자 윤태희는 가끔 문제를 내다말고 열중해서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문제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펼쳤음에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책을 읽는 데 확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럴 때면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문제를 불러주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출제를 기다리던 재겸은 고개를 들어 윤태희를 쳐다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윤태희는 날카롭고, 무감한 눈매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재겸은 왜인지 그런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두할 때는 저런 얼굴을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다 재겸의 시선을 느낀 윤태희가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재겸을 바라보면, 재겸은 언제 쳐다보았냐는 듯 시선을 훽 돌리고 괜히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러다가 점 찍는 것을 깜빡하고 만 것이다.
마음만 같아선 마구 따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네가 애초에 문제를 제때 잘 냈어야지. 네가 문제를 안 내니까 뭐하나 널 쳐다봤다가 점을 못 찍은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점을 못 찍은 건 네 잘못도 있는 셈이다… 라는 핑계로 재겸은 왜인지 억울했지만,
‘넌 진짜 소인이야. 그렇게 그릇이 좁아서 어떻게 사냐?’
그냥 드럽고 치사하다고 치고,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오늘, 결전의 네 번째 시험.
속도는 느릴지언정 차근차근 성적이 늘었던 재겸은 좋은 결과를 예감하고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어제 네 개를 맞췄으니 오늘은 다섯 개를 넘겼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윤태희가 채점한 답안지를 보여주는 순간, 재겸은 마음이 싹 식는 것을 느꼈다. 성적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해서 두 개만 맞은 것이다. 심지어 뭐라 우기지도 못하게 아깝게 틀린 문제도 없었다.
마침내 재겸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
힘이 빠졌다. 결국은 또 불합격이었다. 매일 깜지도 열심히 썼는데, 빨긴 비가 내리는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매우 잡쳤다.
분한 심정이 된 재겸이 씩씩거리며 시험지를 똘똘 구겼다.
갑자기 이게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게 무슨 소용이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헛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데?
네 번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스티커 한 장 얻지 못했다. 그런데 스티커 다섯 장을 모아야 선물을 받는데, 그러려면 앞으로도 합격할지 불합격할지도 모르는 이 받아쓰기 시험을 몇 번이나 봐야 한다는 소리다. 갑자기 이 모든 일이 시간 낭비, 기력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처음에 윤태희의 제안을 수락할 때만 해도 이렇게 지지부진할 줄 몰랐다. 눈에 띄는 성취가 없는 상황에서 결과가 퇴보하니 재겸은 마음이 꺾였다. 열심히 달리다가도 머나먼 결승점을 바라보면 의욕이 꺾이기 마련이었다.
“나 이제 이거 안 해.”
“왜?”
재겸이 똘똘 뭉친 시험지를 내동댕이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차피 두 달 뒤면 다 끝나는데 맞춤법이고 띄어쓰기가 뭔 상관이야?”
성취가 꺾이자, 의욕이 사라지고 갑자기 이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데 이제 와서 배워봤자 부질없는 짓이야.”
중역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은 재겸이 불퉁한 얼굴로 말을 탁 뱉었다. 그러자 재겸이 던진 시험지를 주우려던 윤태희의 손이 우뚝 굳었다.
“…….”
그에 힐끗, 윤태희를 쳐다보았던 재겸은 그대로 멈칫했다.
“그래. 그러네.”
윤태희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고요하고 우울한 색채를 띠고 있었고, 어딘지 살짝 화가 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상처를 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
재겸이 집어던진 시험지를 주워든 윤태희는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었다. 윤태희는 무감정한 얼굴로 재겸의 앞에 놓여 있던 오답 노트와 필기구를 차곡차곡 하나씩 전부 정리하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재겸에게 그동안 몇 번이고 공들여 깎아 주었던 연필도 반으로 뚝 꺾어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연필깎이로 깎은 것처럼 완벽하게 깎아놓은 연필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그에 재겸이 흠칫하며 쓰레기통에 버려진 연필을 보았다가,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윤태희가 중얼거렸다.
“역시 넌 뭘 좀 알아.”
그것은 저번에도 들은 적이 있는, 모호한 말이었다.
“뭐?”
“어느 때에, 무슨 말을 해야 날 무너트릴 수 있는지…….”
윤태희가 스르륵 눈동자를 내리깔며 조그맣게 말을 흐렸다.
“너무 잘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등을 돌렸다.
윤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석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