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윤태희가 수석실에서 나간 뒤로 재겸은 온종일 심란했다.
‘역시 넌 뭘 좀 알아. 어느 때에 무슨 말을 해야 날 무너트릴 수 있는지, 너무 잘 알아….’
알쏭달쏭한 말을 남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윤태희는 저녁이 되도록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결국 재겸이 퇴근할 때까지도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퇴근한 재겸은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태희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마침내 재겸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윤태희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라고.
평소엔 그렇게 치대던 놈이 하루종일 연락 한 통도 없고,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았다. 어째서,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그 이유는 훤히 짐작이 갔다. 아까 수석실에서 자신이 홧김에 내뱉은 말 때문에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본인 시간까지 할애해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배워서 뭐하냐는 둥 부질없다는 말을 들었으니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먼저 연락해서 사과라도 해야 하나….
재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볼따구를 긁적거렸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찌 됐든 성의껏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었다면 저라도 기운이 빠지긴 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내심 한쪽으로는 ‘근데 뭐 내가 그렇게까지 못할 말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달이 지나고 다음 달이 되면 윤태희와 약속한 석 달이 된다. 두 달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마당에, 필요에도 없는 국어 공부를 하는 그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피차 쓸데없이 기력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어쨌든 틀린 말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다.
게다가 걔가 지금까지 나한테 주둥이 놀린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재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랬다. 생각해 보니 지난날의 윤태희는 본인 심기에 조금만 거슬려도 주둥이에 칼을 물고 온갖 생트집을 잡으면서 사람을 괴롭히던 막돼먹은 놈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허물을 돌이켜보고 있으려니, 인격자와는 거리가 먼 재겸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씨바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길래?’ 하는 반발심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재겸의 마음속에서 쌀알처럼 굴러다니던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어느새 집채만 한 크기의 괘씸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잘못인가?’ 하고 성찰하던 성숙한 마음가짐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동안 윤태희가 저에게 저지른 언동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다.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재겸은 앞으로의 윤태희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래저래 고민이 많던 참이었다. 며칠 전, 유남생이 식탁에 울었던 일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날 유남생은 행복해서 무섭다며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재겸은 잠시 잊고 있었던 마음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바로 ‘이별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두 달 뒤에 나는 이 삶을 끝낸다.
언제나 남겨지는 입장이었던 재겸은 이제 떠나는 입장이 되었다. 헤어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또,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회피하듯 잠시 뒷전으로 미뤄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재겸은 혼자 남겨질 윤태희가 걱정되었다.
처음에만 해도 윤태희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서로의 목적을 알고 있고, 그 목적을 이뤄주기 위해서 손을 잡았으므로. 그러나 윤태희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재겸은 윤태희가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훗날 헤어지기 수월하려면 이제부터라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정주와 메산이는 워낙 함께 산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이제 와서 거리를 둬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윤태희의 경우는 달랐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윤태희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 확실히 문제라면 문제였다.
‘너랑 있는 게 즐거워서 그래.’
윤태희는 언젠가 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사실이 두렵지 않은 걸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은, 이참에 이번 일을 계기로 윤태희와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겨질 윤태희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재겸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떠나는 사람이든 남겨지는 사람이든 이별이 힘겨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이 이상 깊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계속 사이좋게 잘 지내되, 이제 단둘이 오랫동안 붙어있는 상황은 피해야겠다. 함께 출퇴근을 하거나 밥을 먹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지만, 이번처럼 곁에 붙어서 같이 공부를 한다거나… 이런 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재겸은 윤태희에게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하던 마음을 깔끔히 접었다. 마침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재겸은 눈을 감고 얌전히 잠을 청했다.
그렇게 옅은 선잠이 들었을 때였다.
띠로롱, 띠로롱….
어느 순간, 협탁 위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에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재겸이 눈을 떴다. 이불 밖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윤태히]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옅은 잠기운이 묻어 있던 재겸의 눈이 확 뜨였다. 재겸은 상체를 일으키며 액정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종일 연락이 없다가 자정이 넘은 시각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겸은 이내 머뭇머뭇 휴대폰을 귓가에 갖다댔다.
“…….”
전화를 받긴 했지만, 재겸은 일단 침묵을 고수했다.
- …….
말이 없는 건 건너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던 재겸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뭐야, 잘못 걸었나? 아니면 전화가 끊겼나….
액정을 슬쩍 확인했다가, 다시 귓가로 가져갔을 때였다.
- 나야.
때마침 휴대폰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찔했던 재겸은 소리 없이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 왜?”
- 나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통화였다. 그에 재겸은 인상을 쓰며 어둠 속에서 환한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이 밤에 갑자기 나오라니, 어디로 나오라는 거지?
다시 전화를 걸어 제대로 물어볼까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대문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조용히 대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집 앞 전봇대 아래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담장에 기대어 앉아,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젖어있는 윤태희였다. 차는 어디 둔 건지, 평소와 달리 검은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윤태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인지, 윤태희의 발치 근처에는 찌그러진 담배꽁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재겸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대문을 살며시 닫으며 목소리를 냈다.
“야.”
그러나 윤태희는 잠이라도 든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왜 왔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재겸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사과라도 받으러 왔나 싶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재겸이 서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팔에 뺨을 기댄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뚫어져라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보고 싶어서 왔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재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재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어차피 내일 본청에서 만날 건데 왜….”
“내일이 오기 전에 보고 싶어서.”
숨기지도, 꾸미지도 않은 솔직한 대답이었다.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아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재겸과 마주 보고 섰다. 그런데, 가만 보니 평소와 비교하면 걸음걸이가 몹시 휘청거렸다. 그런 윤태희를 유심히 바라보던 재겸이 물었다.
“너… 술 마셨어?”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었다.
“응.”
쪼그려 앉아 있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윤태희는 지금 엄청나게 취해 있었다. 윤태희가 취한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금 윤태희는 만취 상태였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술을 퍼마신 건지 몇 걸음 떨어져 있어도 술 냄새가 지독했다.
그때, 윤태희가 갑자기 본인의 오른손을 얼굴 근처로 가져가더니 손가락을 꽉 깨물어 피를 냈다. 손끝에서 금세 붉은 선혈이 멍울졌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저게 무슨 주정인가 싶어 당황한 재겸이 벌컥 목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재겸의 멱살을 확 잡아채서 담벼락에 쾅 부딪혔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끌려가 벽에 등을 부딪치게 된 재겸이 윽, 하며 눈가를 찡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재겸이 제 멱살을 쥔 윤태희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피에 젖은 손끝으로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따라서 동그란 이마를 일직선으로 쓸어넘겼다. 알 수 없는 행동에 놀란 재겸이 고개를 옆으로 확 젖힐 때였다.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김재겸.
김재겸….
김재겸…….
“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재겸이 미간을 구기며 윤태희의 손목을 떨쳐내려 할 때였다.
“키스해줘.”
“…뭐?”
“나한테 키스해줘.”
난데없는 요구에,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멱살을 잡았던 손을 스르륵 풀더니 흐리게 중얼거렸다.
“안 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