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안 통하네…….”
멍하니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은 뒤늦게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벽으로 내몬 윤태희의 어깨를 확 밀친 뒤, 손등으로 제 이마를 슥 문질러 보았다. 손등에 묻은 피를 기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재겸이 물었다.
“너… 방금 뭐한 거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윤태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며칠 전, 재겸은 제구부의 귀기 스프레이에 당해 쓰러졌다.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던 물건이었지만, 그날 눈앞에서 재겸의 폭주가 멈췄다.
그렇다면 어쩌면 너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윤태희는 찰나의 순간 생각했다. 아니, 기대했다.
‘귀신을 권속으로 만드는 법을 알려 줄까? 너는 본향의 표식이 있는 인간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귀신을 부릴 수 있어. 손에 피를 내서 귀신의 이마를 일직선으로 긋고, 이름을 불러 보렴. 그럼 그 귀신은 네 것이 될 거야.’
이 순간 윤태희는 차라리 재겸이 귀신이기를 바랐다. 이 땅에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내 허락과 명령 없이는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그렇게 해서라도 윤태희는 언제까지고 재겸을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튼 생각이었다. 순간의 광기와 집착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었다. 시시가 알려준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재겸은 인간이었다. 윤태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다.
그걸 깨달은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죽은 자처럼 외로워졌다.
“야, 묻잖아. 너 방금 뭐한 거냐고.”
가로등 불빛이 윤태희의 얼굴 윤곽을 따라 음울한 역광을 만들어냈다. 윤태희는 손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손가락을 깨물어 만든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피는 이내 아스팔트 바닥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맥락에서 벗어난 고백이 날아들었다. 고개 숙인 남자가 내뱉은 조용한 혼잣말에, 빙판 같던 재겸의 낯에 쩍 금이 갔다.
“…….”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재겸이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침묵할 때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발치를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알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아느냐고, 윤태희는 묻고 있었다. 지금까지 좋아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당연히 안다. 내내 침묵하던 재겸이 마지못해 대답을 꺼내 놓았다.
“그래. 알아.”
“그렇구나, 아는구나.”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묘하게 늘어지는 발음, 약간 흐트러진 음성은 평소보다 훨씬 나른하게 들렸다.
꾸벅꾸벅 졸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근데, 왜 그딴 식으로 말을 하니….”
발치를 내려다보던 윤태희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려는 듯 구두 앞코를 슬쩍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술에 취해서 시야가 어지러웠다.
“말해 봐.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면서,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이때까지는 늘 재겸이 화를 냈다. 매번 주둥이를 잘못 놀려서 재겸을 화나게 만든 건 윤태희였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지금 윤태희는 재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눈앞의 윤태희는 아주 우울해 보였고,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반성에 서투른 재겸마저도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건가?’ 하고 새삼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될 지경이었다. 그만큼 윤태희는 위태로워 보였고, 정신없이 휘청이고 있었다. 마치 시위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재겸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머릿속에 할 말이 떠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걸 어떻게 무슨 말로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태희는 큼지막한 손으로 제 하관을 틀어쥐더니 됐다는 듯이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겸과 마주 섰던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등을 돌렸다.
“…어, 어디 가려고.”
그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 지금 많이 취했어.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재겸을 돌아보았다.
“내가 걱정돼?”
“너 같으면 걱정 안 되겠냐?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
제 팔을 움켜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윤태희가 픽 웃었다.
“어차피 두 달 지나면 다 끝나는데, 뭐하러 내 걱정을 해?”
그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응시할 때였다.
“와… 이 말 되게 대단하지 않아?”
윤태희가 눈을 반쯤 내리뜬 채,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나 위력적이야? 두 달 뒤에 전부 끝난다는 말만 갖다 붙이면, 사람을 한순간에 등신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윤태희는 지금 명백히 저를 비웃고 있었다. 재겸의 시선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을 때였다. 윤태희는 제 팔을 붙잡은 재겸의 손을 느리게 떼어냈다. 재겸의 손목을 움켜쥔 윤태희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윤태희가 낮게 말했다.
“그따위 말을 해놓고, 지금 이렇게 날 걱정하면 안 되는 거지.”
어느새 미소를 거둬낸 윤태희가 어두운 눈으로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었나? 너나 나나 서로의 기분 같은 건 관심도 없는 거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좆대로 굴면 그만인 거야.”
“…….”
“안 그래?”
마침내 재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하던 재겸이 잡혀있던 손목을 확 잡아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너 알아서 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대화를 중단한 재겸이 등을 돌릴 때였다. 윤태희가 다시 재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재겸이 눈에 힘을 주고 매섭게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놔.”
재겸의 손목을 강한 악력으로 붙잡은 윤태희가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일부러 보란 듯이 날 선 말을 뱉었으나, 재겸이 차가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자 윤태희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순간의 냉랭한 눈빛과 저 곧은 등이 윤태희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워?”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널을 뛴다. 너와 함께 있는 순간들이 한없이 유쾌하다가도,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한없이 우울해진다.
“나는 너의 모든 게 어려운데, 너한테 나는 왜 이렇게 쉬운지 모르겠어.”
너로 인해 나의 세계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번성하고, 쇠락한다.
너는 이 황폐하고 찬란한 영토의 주인이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비로운 주인이다. 네가 나의 끼니를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완벽해지고, 네가 던지는 말 한마디, 네가 보내는 시선 한 번에 나는 그날 하루가 망가진다.
이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넌 모를 것이다.
너는 너무도 손쉽게 나의 자아를 무너트리고, 나를 둘러싼 이 세계를 멸망케 하며, 나의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잿빛으로 퇴색시킨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없다는 치욕. 이 치욕적인 사랑이 더할 나위 없이 기껍다가도, 또 어떤 날은 거대한 재앙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윤태희는 재앙이 지나간 자리, 폐허 속에 서 있었다.
“이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넌 몰라.”
양손으로 재겸의 멱살을 무례하게 움켜쥐며, 윤태희가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
결국 재겸은 제 멱살을 쥔 윤태희의 양손을 붙잡고 씩씩거렸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재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윤태희가 운전하는 차에도 타고, 받아쓰기 공부도 했다. 돌이켜보면 윤태희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이거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그 말을 들은 윤태희는 마치 쓴 물을 삼켜내는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윤태희는 과격한 손길로 재겸을 내던지듯 벽에 쾅 붙이더니, 큼지막한 손으로 재겸의 멱살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서로의 코끝이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게… 그게 나를 씨발 좆같이 빡돌게 만드는 거야. 들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뭘 원하느냐고 물어보지 마.”
윤태희가 말을 짓씹듯이 꾹꾹 억누르며 말했다.
“놔, 술주정으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궁금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윤태희가 눈을 크게 뜨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원하는 거?”
윤태희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멱살을 쥔 손등은 하얗게 질려서 뼈대가 튀어나와 있었다. 거의 목이 졸릴 지경이었다. 재겸이 날 선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했다.
“손목 부러트리기 전에 이거 놓으라고!”
재겸이 씩씩거리며 발버둥을 칠 때였다.
“죽지 마.”
윤태희가 잔뜩 흐트러진 숨결로 말했다.
“죽지 마.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재겸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아니, 넌 못 죽어.”
“…뭐?”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
멱살을 움켜쥔 윤태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원히 죽지 않는 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나를 증오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니까 네 죽음을 유예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갑작스러운 말에, 재겸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흔들렸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너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한참 만에 겨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게 두 달 뒤는 아니야.”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윤태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었다. 윤태희는 자신에게 걸린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저주 풀랬어? 나는 죽여달라고 했지, 저주 풀어달라고 한 게 아니야.”
“알아. 그래도 넌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서 평범하게 죽을 거야.”
“…….”
재겸이 싸늘해진 얼굴로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원래 윤태희가 약속했던 시기는 두 달 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이 바뀌니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재겸이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말을 뱉었다.
“널 좋아하니까.”
윤태희의 대답에, 결국 재겸의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저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을 내려놓고, 제멋대로 구는 것에 치가 떨렸다.
내 하루하루가 얼마나 형벌 같은지도 모르면서, 갑자기, 죽음을 유예하라고?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재겸이 작게 뇌까리듯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내가 언제 너더러 나 좋아하랬어?”
그 순간, 윤태희의 손이 짧게 흔들렸다.
“…….”
끝내 멱살을 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나도 너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언젠가 화살을 빗겨 쏴서 나를 놓아줬던 것처럼, 호수에 빠져 있던 나를 꺼내주었던 것처럼, 부서져 가는 유년 속에서 나를 끌어올렸을 때처럼,
언제나 나를 구해줬던 너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바보같이
사랑에 빠져 질식해 가는 나를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나도 너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결국 이렇게 꼴사납게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윤태희는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시체처럼 질질 끌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