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86)화 (186/348)

#186

“죄송… 제가 밤눈이 어두워서요.”

방금 건 시험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것처럼 차갑게 굴면서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는 윤태희의 모습을 보고, 재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쟤 혹시 뭐에 씌었나?’ 하는 것이었다.

귀재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휴가를 냈다고 했으니 잠입 중이거나 일하는 중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거라면, 화장실을 가는 척을 하든지 어떻게든 따라 나와서 뭐라 설명을 해줄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윤태희는 그러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재겸은 저게 정말 윤태희가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윤태희에게 다트를 던졌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정말로 윤태희가 맞았다.

이로써 재겸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태희는 지금 저를 고의로 모르는 척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혹시나 했던 마음이 단단하게 굳으며 마침내 확신이 섰다.

윤태희는 나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초면이네 뭐네, 대놓고 저를 무시하면서 보란 듯이 다른 사람과 굴러먹고 있는 거다. 재겸은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기분이 몹시 안 좋아졌다. 왠지 점점 화가 났다.

‘내가 언제 너더러 나 좋아하랬어?’

윤태희의 마음은,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는 마음이었던 거다. 그것밖에 안 되는 마음에 이렇게나 휘둘리고, 며칠을 고민했던 저 자신이 한심해졌다.

“자기야, 괜찮아?”

그때, 윤태희에게 다가간 신지혜가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윤태희의 양 뺨을 잡더니,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윤태희는 신지혜의 손길에 가만히 제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재겸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신이 뭘 알아? 내가 설마 쟤 다치라고 던졌겠어? 윤태희라면 저 정도는 당연히 피할 수 있으니까 알고 던진 거야. 일부러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아주 약하게 귀기도 실었어. 당신이 쟤를 얼마나 잘 안다고 걱정하는데? 윤태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에이,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기분 풀어.”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은 와중에, 때마침 단발머리가 끼어들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긴장해서 실수했나 봐.”

단발머리가 손뼉을 짝짝 치며 쾌활하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행히 윤태희는 작은 생채기조차 없이 멀쩡했다. “미안해, 놀라서 그랬어.” 안도한 신지혜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자자, 파티 분위기 왜 이래? 건배나 한 번 하자!”

단발머리는 망부석처럼 서 있던 재겸에게 술잔을 건넸다.

“애기, 너도 놀랐겠다.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단발머리가 상냥하게 재겸을 다독이며 술을 따라주었다. 그에 말없이 술잔을 내려다보던 재겸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홧김에 술을 냅다 들이켰다. 술을 입안에 털어 넣자마자 재겸이 오만상을 썼다. 썩은 나무를 우린 듯한 맛이었다. 재겸이 미간을 와그작 일그러뜨리며 퉤퉤, 하자 옆에 앉아있던 단발머리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하 웃었다.

“맛없으면 다른 거로 마셔볼래?”

단발머리가 재겸의 술잔에 다른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 건 방금 먹은 것보다는 훨씬 마실 만했다. 건배를 한번 하고 나니 분위기가 제자리를 찾았다. 열댓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고, 다들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금세 공기에 흥이 오르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재겸은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신지혜와 윤태희는 소파에 푹 눌러앉아 서로 어깨를 붙인 채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의 긴 머리칼을 움켜쥔 신지혜가 인상을 쓰며 “머리 상했어. 끝에 갈라진 거 봐.” 하고 말하자, 그에 윤태희가 픽 웃으며 신지혜의 머리칼을 만져보더니 뭐라 귓속말을 했다.

“하하, 뭐야. 웃겨 진짜.”

아주 꼴값을 떨어라. 씨발.

눈꼴 시리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고 했던 윤태희는 지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음에도 충분히 즐거워 보였다. 문제는 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다트에 스친 이후로 윤태희는 재겸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고 있었다.

재겸은 기분을 매우 잡쳤다.

모두가 즐거운 이때, 재겸은 전부 사실대로 까발리고 싶었다. 너네는 모르지? 저 새끼는 사실 남색가야. 아주 막돼먹은 놈이라 머릿속으로 남자랑 뒹구는 상상한다구 그랬어. 그리고 지금까지 나한테 몇 번이나 막무가내로 키쓰를 하고, 나랑 있을 때 즐겁다구 그랬어.

그리고…….

씩씩거리던 재겸은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사실 윤태희가 누구와 어울리든지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건 재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윤태희가 저를 모르는 척하고, 연락도 받지 않고, 저렇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열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윤태희의 의중이야 어찌 됐든,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네가 날 무시해도, 어차피 여기 술자리 쓸어버리고 네 멱살 잡고 나가면 그만이다.

재겸은 상황을 깽판 칠 궁리를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연거푸 독한 술을 들이켰다. 뭔지도 모르는 도수 높은 양주를 물처럼 쭉쭉 들이켰더니, 금세 열이 오르고 어지러워졌다. 윤태희의 시선이 슥 재겸을 지나쳤다. 물론 재겸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 술 좀 마시나 봐요?”

그때, 어떤 남자가 재겸의 옆에 와서 앉았다.

“한 잔 더 줄까요?”

술잔을 들고 있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눈매에 자꾸 힘이 풀리려고 해서, 재겸은 눈에 힘을 주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투블럭 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

재겸은 말없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술을 받았다.

“전 박상준이에요.”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신을 박상준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을 붙였다. 사방이 시끄러운 와중에 둘만 들리는 대화가 시작됐다.

“어디 살아요?”

“구기동.”

“구기동? 전 이태원 사는데.”

“어쩌라고. 안 물어봤어.”

박상준이 푸흡, 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웃었다.

“술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잠깐 바람 쐬러 나갈까요?”

“필요 없어. 난 이제 이것만 마시고 다 쓸어… 아니, 집에 갈 거야.”

“근데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

술에 취한 재겸은 귓바퀴를 툴툴 털어내며 짜증을 냈다.

“꼬우면 너도 반말하든가.”

박상준이 재밌다는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럴까?”

재겸은 숨을 푹 내쉬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박상준이 눈치껏 다시 술병을 들이밀었다. “너무 빨리 마신다. 천천히 마셔.” 재겸은 박상준의 염려에도 아랑곳없이 술을 들이켰다.

“저 두 사람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재겸이 턱짓으로 신지혜와 윤태희를 가리켰다. 재겸이 가리킨 쪽에 힐끔, 시선을 주었던 박상준이 말했다. “글쎄. 며칠 안 됐어.”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상준이 슬쩍 물었다.

“왜? 질투 나?”

술잔을 쥐고 있던 재겸의 손이 짧게 멈칫할 때였다. “어쩐지, 너 지혜한테 사심 있구나.” 박상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겸의 귀에 소곤소곤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그래도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걸.”

“왜?”

“지혜는 스타일이 확실해. 넌 지혜 스타일이 아니야.”

“스타일이 뭔데?”

“음, 그러니까 넌 지혜의 취향에서 거리가 멀다는 거지.”

박상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게다가 지혜는 변덕이 심한 편이라서 사심 품으면 너만 손해야. 어떤 상대라도 딱 일주일 데리고 놀면 차버리거든. 저 둘이 만난 거 오늘로 사흘 째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어.”

상준이라는 남자의 말에 따르면 신지혜는 주말마다 클럽에 가서 마음에 드는 남자 한 명을 고르는데, 딱 일주일만 데리고 논 뒤 가차 없이 번호를 차단한다고 했다.

“지혜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싫어해. 그래서 절대로 진지하게 만나지 않아. 아마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난 지혜 친구니까 알지. 지혜는 딱 일주일만 진심이야.”

신지혜가 이번에 데리고 온 남자도 역시 클럽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박상준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신지혜와 원래부터 알고 지내고,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 무리였다. 이들은 신지혜를 잘 알고 있으므로, 신지혜가 데려오는 사람이 그 누구든지 초면에도 곧잘 허물없이 어울리고는 했다. 어차피 술 먹고 노는 사이에 깊은 친분은 필요 없었다.

“아, 지혜 팬이라는 애한테 내가 별소리를 다 했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줘.”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겸은 조소를 흘렸다. 며칠 뒤에 윤태희가 신지혜한테 차일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잠깐 통쾌했으나, 한순간이었다. 또다시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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