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재겸은 먹구름이 드리운 얼굴로 연신 술을 홀짝였다.
“7번, 노래 불러봐. 7번 누구야.”
재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술자리를 흥겹게 만끽하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는 단발머리가 나서서 게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단발머리가 제안한 게임은 왕게임이었다.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뽑힌 사람이 무작위로 번호를 골라 맘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명령은 다양했다. 폭탄주 마시기, 춤추기, 노래 부르기 등 여러 가지 명령이 있었는데, 명령을 수행하기 싫으면 그 벌로 독한 술을 마셔야 했다.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재겸만은 홀로 섬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잔뜩 취한 재겸은 술자리 게임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술기운이 뜨끈하게 올라와서, 재겸은 퍼진 떡처럼 소파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 사이, 새 판이 시작되었다. 이번 판의 왕은 신지혜였다.
“1번이랑 8번이랑 뽀뽀해.”
남녀가 뒤섞인 술자리인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자 짓궂은 벌칙이 튀어나왔다. 그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와, 1번 누구야?”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호명된 번호를 찾았다. 그때, 재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상준이 숨을 들이켰다.
“내가 1번이야.”
박상준이 제비뽑기 종이를 펼쳐 보이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1번이 상준이래! 그럼 8번은? 8번 누구야?”
그러나 몇 번을 물어도 8번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 신지혜가 테이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번호표를 확인했다. 재겸은 급격히 올라오는 술기운에 순간 꾸벅 조느라 제비뽑기에 적힌 번호를 살펴보지도 않은 참이었다. 신지혜가 재겸의 번호표를 확인했다.
“네가 8번이네!”
남자 둘이 벌칙에 걸린 것을 알게 되자, 폭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박상준은 비식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재겸의 어깨에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뭐야?”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재겸이 인상을 쓰며 박상준을 쳐다보았다.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 할까?”
“뭘?”
“뽀뽀.”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재겸이 흠칫하며 낯을 굳혔다.
“우리 둘이 걸렸어. 벌칙으로 뽀뽀해야 돼.”
재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윤태희의 손끝이 셔츠 위를 소리 없이 긁었다.
“싫어. 내가 왜, 안 해.”
“왜? 혹시 뽀뽀 처음 해봐?”
박상준이 놀리듯이 묻자, 사람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 나도 해, 해, 해봤거든.”
술에 취한 재겸이 발끈하며 받아쳤다.
“그래? 그럼 뭐가 문제야?”
“너는 못생겨서 너하고는 하기 싫어.”
재겸의 대답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남자끼리 어떻게 키스를 하느냐, 와 같은 정석적인 반응을 기대했건만 예상 밖의 엉뚱한 답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겸은 언젠가부터 남자끼리 키스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면전에서 까인 박상준이 살짝 시무룩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럼 여기서 네가 보기에 제일 잘생긴 사람이 누군데?”
제일 잘생긴 사람? 그거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재겸은 주저하지 않고 술김에 검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입술에 술잔을 갖다 붙이던 윤태희가 우뚝 굳었다.
“…….”
재겸이 지목한 사람은 바로 윤태희였다. 삿대질과 동시에 윤태희의 등 근육이 움찔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진 못했다. 신지혜가 깔깔 웃으며 윤태희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야, 들었어? 여기서 자기가 제일 잘생겼대.”
재겸은 윤태희를 지목한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두지 않았다. 어쨌든 윤태희가 여기서 제일 잘생긴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짓궂게 웃던 신지혜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제일 잘생긴 사람이 상준이 흑기사 해 줘.”
신지혜의 말에 박상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왕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나는 흑기사 해달라고 말도 안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분위기 망치지 말라는 반응에, 박상준은 뭐라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쓱한 표정을 했다. 신지혜가 키득거리며 윤태희를 재촉했다.
“이것도 팬 서비스야. 내 팬이니까, 나 대신 우리 자기가 찐하게 뽀뽀 한 번 해줘.”
고개를 숙인 채 눈썹 끝을 매만지던 윤태희가 신지혜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가 몸을 일으키자, 박상준이 떨떠름한 낯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박상준을 제치고 재겸의 옆자리에 앉은 윤태희가 마침내 재겸과 얼굴을 마주했다.
“…….”
재겸이 주춤하자, 윤태희가 재겸의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쥐더니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윤태희가 재겸에게 입술을 맞추자마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더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열띤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자기야, 이제 됐어.”
신지혜의 말에 윤태희가 순순히 입을 뗐다. 그에 홀린 듯이 입맞춤을 따라가고 있던 재겸이 눈을 치켜떴다. 제 말은 죽어라 안 듣더니, 지금 윤태희는 신지혜가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끝내 욱한 재겸이 험악하게 말했다.
“누가 그만하래?”
순간 윤태희가 멈칫할 때였다.
“다시 해.”
재겸이 윤태희를 노려보며 낮게 쏘아붙였다. 찰나의 순간, 윤태희의 눈동자에 동요가 휙 스쳤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언젠가 저런 표정을 본 것도 같았다.
“자기야, 뭐 해? 됐다니까.”
신지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에 묘한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자 재겸이 씩씩거리며 윤태희의 셔츠를 꽉 붙잡았다.
“계속하라고.”
만약 이번에도 저를 무시한다면, 재겸은 이대로 윤태희의 멱살을 붙잡고 이곳에서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잠시 굳어있던 윤태희가 제 어깨를 쥔 재겸의 손을 떼어냈다.
“…….”
기어코 손을 우악스럽게 떼어내는 완력에 재겸의 낯이 살벌해졌다. 그대로 멱살을 붙잡으려는데, 윤태희가 대뜸 떼어낸 손에 제 손가락을 얽으며 깍지를 끼더니, 고개를 기울여 재겸에게 키스를 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재겸이 주륵 미끄러졌다. 사람들은 비명 섞인 환호성을 질렀지만, 제멋대로의 행동에, 신지혜의 표정이 살짝 기묘해졌다.
뭐야… 갑자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지?
신지혜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목소리를 냈다.
“됐어, 이제 그만해도 돼.”
그러나 윤태희는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자기야! 그만해도 된다니까…?”
마침내 신지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들려? 그만하라니까!”
신지혜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윤태희가 움직임을 멈췄다. 재겸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눈을 떴다. 취기가 올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코끝이 맞닿은 상태에서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눈으로 재겸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입꼬리를 휘며 중얼거렸다.
“어쩌지, 그만하라는데….”
재겸이 반쯤 풀린 눈에 힘을 줄 때였다. 윤태희가 양손으로 재겸의 뺨을 감싸 쥐더니, 엄지로 눈썹 뼈를 느리게 문지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긴,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네.”
그제서야 신지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낯을 굳혔다. 그때, 윤태희가 재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주르륵 둘러보더니, 이내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쥘부채를 꺼냈다.
“이제 그만하고 집에들 갑시다.”
윤태희가 묘하게 싸늘해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파티룸 안에 커다란 바람이 일어났다.
콰장창——!
알 수 없는 광풍이 테이블 위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며 술병이며 산산조각이 나면서 파티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기저기서 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파티룸을 박차고 나갔지만, 신지혜는 테이블 밑에 숨어 있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쪼그려 앉아있는 신지혜에게 가까이 다가간 윤태희가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췄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신지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풀려 있었던 거야?”
“뭐가 언제부터야?”
“처음 만났을 때 분명히 나한테 홀렸을 텐데….”
신지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설마 처음부터 날 속인 거야?”
“글쎄, 속인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윤태희가 부채를 확 접으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소개는 하지 않아도 돼. 이미 네가 누군지 아니까.”
뭐? 신지혜가 움찔하며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을 홀려 장기를 빼 먹는다는 묘귀….”
신지혜가 황급히 시선을 피할 때였다. 신지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로 신지혜의 발등을 가리고 있는 천 자락을 슬쩍 치웠다. 그러자 샌들을 꿰어신은 맨발이 드러났다. 윤태희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지혜의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신지혜의 발등에는 인간의 것이라 볼 수 없는, 푸른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로 위장한 전설 속의 인어.”
이어진 말에, 신지혜의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정말 애타게 찾았어.”
윤태희는 지난 사흘간, 인어의 행방을 추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