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화창한 아침,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 있던 재겸은 비몽사몽 눈을 떴다. 베개에서 좋은 냄새가 나네. 재겸은 베개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베개며 이불이며 아주 편안했지만, 평소에 쓰던 침구와는 다르게 묘하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눈을 끔뻑거리던 재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잠이 확 깼다. 이곳은 재겸의 방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회색으로 된 푹신한 침구 역시 재겸의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베개가 엄청나게 많았고, 침대 또한 재겸이 쓰는 것보다 훨씬 컸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넓은 방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방 안을 살펴보던 재겸은 일단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방문 앞으로 가서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왜인지 살짝 긴장되었다.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커다란 거실이 보였다. 재겸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거실에 발을 디뎠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거실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책꽂이와 엄청난 수의 책이었다. 책꽂이에는 온갖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색 가죽 소파가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는 전면이 통유리로 된 창문이 있었다. 재겸은 창가로 가서 이마를 붙이고 바깥을 보았다. 탁 트인 창문 너머로 화창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층수가 높아서 그런지 발밑에 깔려 있는 건물이 조그맣게 보였다.
그때, 소파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인 슈트 재킷이 눈에 띄었다.
“…….”
재겸은 재킷을 집어 들고 대뜸 코를 박았다. 킁킁 냄새를 맡았다.
윤태희의 향기다.
그제야 재겸은 이 집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윤태희의 집이었다. 어젯밤, 술집에 있는 윤태희를 만나러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독한 술을 진탕 마셔서 그런지 중간부터 기억이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윤태희가 술에 잔뜩 취한 저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어딜 간 거지?
멀뚱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재겸이 어디론가 시선을 옮겼다. 저기가 욕실인 듯했다.
윤태희는 욕실에서 씻고 있는가 보다.
집주인이 욕실에서 나오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로 하고, 재겸은 주방으로 향했다. 당장은 목이 말랐다. 재겸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냉장고를 열자마자 재겸의 미간이 구겨졌다.
냉장고 안에 든 것이라고는, 다 시들어 빠진 방울토마토 한 팩과 네모난 피자 상자가 전부였다. 피자 상자를 슬쩍 열어보니 안에는 손도 안 댄 피자가 처량하게 굳어 있었다. 마실 만한 것은 소주 몇 병이 전부였다.
얜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마실 물을 찾는 데 실패한 재겸은 개수대에서 물을 틀었다. 손에 수돗물을 받아서 대충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을 해결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재겸은 일단 윤태희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뭘 이렇게 오래 씻어?
어느덧 늦은 오전이었다. 평소라면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상태였다. 눈을 뜰 때부터 허기가 졌다. 기다림에 지친 재겸은 대충 허기를 때울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방을 기웃거렸다. 냉장고 안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곳을 찾아봐야 했다.
재겸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찬장 안에도 별것이 없었다. 개별 포장된 견과류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단백질 보충을 위한 파우더, 젤리와 사탕 등 약간의 군것질거리가 전부였다.
재겸은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견과류를 챙겼다.
견과류를 챙겨 거실로 돌아온 재겸은 소파에 퍼질러 앉았다. 견과류를 야금야금 먹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물소리가 잦아들더니, 욕실 문이 열렸다. 샤워 가운을 입은 사람이 수건으로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왔다.
“자기야, 나 갈아입을 옷 좀….”
재겸의 손에 들려있던 견과류가 후두두 떨어졌다.
“…….”
“…….”
눈이 마주쳤다. 뿌연 수증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온 신지혜를 보고, 재겸은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 사람이 윤태희의 집에 있는 거지?
“자기는?”
“…예?”
신지혜가 재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는 어디 갔어?”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
“허, 넌 아직도 연기하니?”
“…예?”
신지혜가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
“재미없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하지? 너희 둘이 일부러 짜고 치고, 모르는 사이인 척 나한테 접근한 거 다 들켰으니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흉내 내봤자 내가 믿어줄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신지혜가 다다다, 말을 쏘아붙였다. 그에 반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재겸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신지혜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상대하기도 피곤했다. 신지혜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신지혜가 옆에 앉자, 재겸은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
어제 신지혜와 윤태희는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윤태희의 집이었으므로, 재겸은 윤태희가 신지혜와 헤어지고, 저만 이 집으로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신지혜가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재겸이 불편한 낯으로 말없이 신지혜를 힐끔거릴 때였다.
“…어?”
신지혜가 다리를 꼬고 앉으니, 그제야 남들과는 다른 발등과 다리가 재겸의 눈에 띄었다. 어느새 정강이까지 돋아난 비늘은 시선을 빼앗기기에 충분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서 아주 아름다웠다.
신지혜가 뭘 그렇게 보냐는 듯 재겸을 올려다볼 때였다.
“다… 다리가 왜….”
신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뭘 물어? 쓸개 약빨이 점점 떨어져서 그렇지.”
“…약, 약빨이요?”
“그래. 우리는 사람 쓸개를 먹어야 다리가 생기니까.”
뭐? 사람 쓸개를 먹는다고?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아무튼, 나 갈아입을 옷 좀 갖다 줘.”
신지혜가 대뜸 명령을 내리며 손을 까딱거렸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서 모르는데…
재겸은 어영부영 걸음을 옮겼다. 잠시 집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옷방으로 보이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드레스룸으로 향한 재겸은 되는대로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잘 개어둔 옷이 정리되어 있었다. 재겸은 서랍을 뒤적거리며 반바지와 반팔티를 찾아냈다. 드레스룸을 어지럽게 흐트러트린 뒤에야 재겸은 쭈뼛거리며 신지혜에게 다가갔다.
“여, 여기요….”
소파에 앉아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있던 신지혜가 새침하게 옷을 받아들었다. 신지혜의 심부름을 완수한 재겸은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슬쩍 눈치를 보며, 바닥에 떨어진 견과류를 엉성하게 주울 때였다.
“드라이기는 없어?”
이번엔 드라이기…?
드라이기는 재겸에게도 친숙한 물건이었다. 재겸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그러다 침실 화장대에서 드라이기를 찾아냈다. 가져와서 신지혜에게 건넬 때였다. 신지혜가 샤워 가운을 훌쩍 풀었다.
헉.
난데없는 탈의를 목격한 재겸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감싸 쥐었다.
“아, 아니… 외… 외간 사람 앞에서…!! 윗또리를 함부로…!!”
얼마나 놀랐는지 다리 힘이 풀리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재겸이 눈을 감싸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신지혜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인간 남자 새끼들은 이래서 짜증 난다니까."
기가 차서 진짜. 티셔츠를 꿰입은 신지혜가 몸을 일으키더니, 손가락으로 재겸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신지혜가 눈에 불을 켜고 쏘아붙였다.
"야, 너네는 웃통 안 벗어? 원래 우린 웃통 내놓고 다녀. 니들은 맨날 웃통 쳐 벗고 나돌아다니면서, 왜 남의 웃통 좀 본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떨어?”
신지혜가 눈을 부라리며 재겸을 따박따박 궁지로 몰아넣었다. 신지혜가 쥐잡듯이 잡기 시작하자 재겸은 쩔쩔맸다. 양손을 붙잡고 수세에 몰렸다.
“이게 다, 너네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
“애초에 니들 사상이 썩어빠져서 그러는 거라고. 어?”
“…….”
“왜 대답을 안 해? 내 말이 틀렸어?”
“…….”
재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점점 쪼그라들었다. “죄… 죄송… 그, 그래도 남, 남녀가 유별, 한데….” 재겸은 점점 구석에 몰려 공손한 자세가 됐다.
“뭐? 남녀가 유별?”
신지혜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오만상을 썼다.
“야, 지금이 조선 시대니? 어? 너 조선 시대에서 왔어?”
“예에….”
“지금 시대가 21세기….”
따박따박 말을 잇던 신지혜가 멈칫했다.
“…….”
“…….”
“잠깐, 뭐라고?”
신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그에 화들짝 놀란 재겸이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였다. 신지혜가 낯을 굳히며 물었다.
“이건 또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컨셉이야?”
“…….”
“너 조선 시대에서 왔다고? 그게 정말이야?”
재겸이 우물쭈물하자, 신지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만. 일단 나 머리부터 말리고, 다시 얘기해.”
새침하게 말을 내뱉은 신지혜가 드라이기를 손에 쥐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재겸은 양손을 쥐고 서 있었다.
“빗은 없어?”
“예?”
“머리빗.”
“모, 모르겠는데요….”
재겸은 다시 온 집안을 뒤져서 빗을 찾아왔다.
“여기….”
“어, 잠깐만 들고 있어.”
재겸은 빗을 들고 공손한 자세로 기다렸다. 그때, 현관에서 삐리릭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머리에 볼캡 모자를 눌러 쓰고, 검은색으로 된 큼직한 반팔 티셔츠를 입은 윤태희는 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
“…….”
위이잉….
헤어드라이어 소리로 집 안이 시끄러웠다. 윤태희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신지혜와 옆에서 빗을 들고 공손히 서 있는 재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재겸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 자기야, 어디 갔다 왔어?”
그때, 머리를 다 말린 신지혜가 드라이기를 끄고 윤태희를 홱 돌아보았다. 윤태희가 손에 든 봉투를 들어 올리며 간단히 대답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아침 챙겨 먹는 스타일이야?”
“그렇진 않은데, 자기 챙겨주려고.”
어제와 변함없는 꼴값에, 재겸이 낯을 굳힐 때였다.
“나? 나는 아침 잘 안 먹는데?”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은 윤태희가 말했다.
“아니, 너 말고.”
재겸에게 다가온 윤태희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더니, 재겸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주었다. “잘 어울리네.” 재겸의 뺨을 감싸 쥔 윤태희가 말했다.
“우리 자기는 삼시 세끼 다 챙겨 드시는 분이라.”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에 고개를 박았다.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윤태희가 조그맣게 아침 인사를 했다.
“잘 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