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가만히 묘귀의 이야기를 듣던 단주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단주는 문득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시선을 주었다. 단주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시, 네 말이 맞아. 본향은 나의 편이야….
윤태희는 이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돛을 펼친 순간, 어김없이 순풍이 불어오는 느낌이다. 윤태희는 살면서 이와 같은 순간을 몇 번이고 경험했고, 그때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불로불사의 열쇠가 인어에게 있다면, 불로불사를 풀 수 있는 실마리 또한 인어에게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인어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현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인어뿐이었다.
윤태희는 그 즉시 누각을 빠져나와 나례청으로 향했다.
본청으로 향한 윤태희는 제일 먼저 신지혜의 신상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검색 끝에 어렵지 않게 신지혜의 SNS 계정을 찾아냈다.
개인 SNS가 있다면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만약 정말로 인어가 존재한다면, 현대에 이르러 바닷가 근처나 외진 벽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몰래 숨어 있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그러나 윤태희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전설 속의 인어가 주로 활동하는 지역은 서울 한복판, 강남이었다.
SNS 속 신지혜는 아주 쾌활하고 당당해 보였고, 주변에 사람이 넘쳐 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20대 초반까지 모델로 활동하다가 몇 년 전에 그만두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신상 정보를 대충 파악한 윤태희는 그 길로 휴가를 내고 신지혜의 행방을 추적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사람을 꼬신다고 했으니 직접 만나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윤태희는 예상했다.
그리고 윤태희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랑 놀래? 너 좀 잘생겼다?”
윤태희는 단번에 신지혜의 눈에 띄었고, 먹잇감이라는 이름의 ‘데이트 상대’가 되었다.
먹잇감으로 위장하여 직접 거미줄에 날아든 윤태희는 차분히 때를 노렸다. 일주일 동안 신지혜와 함께 붙어 지내다 보면 틀림없이 기회가 오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윤태희는 며칠간 신지혜의 동태를 면밀하게 살폈다.
빠져나갈 수 없도록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리하여 윤태희는 하루하루 속을 쥐어짜는 고통에 시달리며 신지혜와 시간을 보냈다. 신지혜와 함께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고, 차를 마시고, 집에 데려다주느라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모든 연락을 꺼 두고 신지혜에게만 집중했다.
지금의 이 덧없는 순간들은, 앞으로의 모든 순간을 재겸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사흘 내내 한결같이 기장이 짧은 하의를 입었던 신지혜가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긴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긴 치마를 입은 신지혜를 보는 순간, 윤태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악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쓸개를 먹어야만 인간의 다리를 유지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다리에 비늘이 돋아난다고 했답니다.’
마침내 다리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발등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냉정하게 경우의 수를 따져 보았다. 지금 당장 정체를 들추는 건 섣부른 일이다. 비늘이 돋아날 것에 대비하여 아직은 변화가 없었어도, 미리 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루만, 딱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술집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재겸이었다. 재겸의 얼굴을 본 그 순간부터 미친놈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러나 윤태희는 신지혜에게 현재 홀려 있는 상태였다. 아니, 홀린 척 얌전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는 척을 하거나 설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대로 함부로 행동하다간 의심을 받아서 들통이 날 수도 있었다. 인어를 코앞에 두고 허망하게 놓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데.’
그래서 윤태희는 재겸을 모르는 척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윤태희는 절박했다. 일이 잘못되기 전에 재겸이 이곳을 떠나길 바랐다. 그러나 재겸은 어찌된 일인지, 자리를 뜨기는커녕 오히려 비집고 들어오더니 사람들 틈에 눌러앉아 술을 마셔 대는 것이었다.
재겸이 등장하면서 윤태희에게는 여러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윤태희는 그때마다 초조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결국은, 언제나 그랬듯이, 변수로 나타나 판을 엉망으로 어지럽히는 재겸으로 인해서 윤태희는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끝내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묘귀로 위장한 전설 속의 인어. 정말 애타게 찾았어.”
그 시점에 신지혜의 발등에 비늘 몇 개가 돋아나 있는 것은 천운이었다. 속고 속이는 연극은 이걸로 끝이었다.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된 신지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나랑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대화.”
“뭐?”
“인어 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지혜와 윤태희로서.”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데?”
“네가 알고 있는, 인어에 대한 모든 것.”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난장판이 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실례가 안 된다면 장소를 옮겼으면 하는데. 듣는 귀가 있으면 피차 곤란하니 내 집으로 가서 얘기 좀 할까.”
“내가 왜? 이야기하기 싫다면 어쩔 건데?”
신지혜가 윤태희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안타깝지만 그건 선택지에 없는데.”
윤태희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지금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야.”
윤태희가 손에 쥔 부채를 바닥에 쾅, 박으며 말했다.
“귀재 윤태희의 집에 갈 것인가, 나자 윤태희의 집에 갈 것인가.”
“…….”
나자? 그 순간, 신지혜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인어에 대한 건 나례청에서도 아주 드문 정보야. 내가 만약 묘귀를 맞닥뜨린 나자 윤태희였다면, 나례청에 돌아가서 이렇게 얘기하겠지. 사람 장기를 파먹는다는 묘귀를 찾아다녔는데, 잡고보니 전설 속의 인어였어요….”
“…….”
“하지만 네가 묘귀를 앞세운 인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서 접근한 귀재 윤태희라면 그렇게 얘기할 리가 없겠지.”
윤태희는 본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비열해지고, 교활해질 수 있는 인간이었다. 윤태희는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으로 아주 유리하게 본인 위치를 선점할 줄 알았다.
신지혜가 싸늘하게 낯을 굳혔다.
“하, 너 이 쓰레기 새끼…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글쎄, 따지고 보면 협박은 당신이 먼저 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윤태희는 턱을 매만지며 ‘김짱돌’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짱돌…!!!”
마침내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신지혜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가 귀여우면 다야? 내가 지를 얼마나 귀여워해 줬는데!”
홀로 분개하던 신지혜가 입술을 꽉 깨물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나를 이용하겠다는 거야?”
“아니, 나는 그냥 당신이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뭐?”
“나한테 걸린 걸 다행으로 생각해. 다른 나자였다면 너를 나례청에 넘기거나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거든.”
윤태희가 땅에 박았던 부채를 촤르륵 접으며 눈썹을 슥 들었다.
“다행? 어이가 없네. 일부러 건수 잡으려고 접근해 놓고, 다행?”
“그래, 일부러 접근해서 건수를 잡은 건 맞아. 하지만 애초에 건수 잡힐 만한 짓을 한 건 당신이지. 사람들의 쓸개를 빼 먹었으니까.”
“어차피 쓸개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잖아. 쓸개 없어도 잘 살고, 요샌 그냥 아프면 떼어내기도 하는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쓸개가 아주 중요한 장기는 아니긴 하지. 그래도 해를 입히는 일이니, 잘잘못을 따지자면 네가 잘못한 거고.”
그에 신지혜가 눈을 치켜뜨고 윤태희를 노려볼 때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야. 묘귀의 짓으로 위장한 이상, 넌 내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례청에 덜미가 잡혔을 거야.”
말문이 막혔는지, 신지혜가 입을 꾹 다물었다.
“…….”
윤태희가 무표정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주기적으로 쓸개를 먹어서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묘귀한테 맡길 게 아니라 아예 확실하게 문명 속에 숨었어야지. 장기 밀매를 하는 브로커나, 아니면 돌팔이 외과 의사 한 명을 수배해서 쓸개를 빼돌리는 전문 조달원으로 삼는다거나… 그게 시간 대비, 노력 대비 훨씬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
“브로커든 돌팔이든, 원한다면 내가 소개해 줄 수 있어.”
“…….”
윤태희가 제시한 대안은 아주 현실적이었으며 만만찮게 비윤리적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왜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했느냐, 라는 지적이었다. 더욱 확실한 불법을 권유받은 신지혜가 황당한 눈을 했다.
“너 진짜 또라이 새끼구나.”
“당신이 너무 안일한 거지.”
마침내 신지혜가 고개를 푹 숙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말했잖아. 장소를 옮겨서 차분히 ‘대화’를 하자고.”
“…….”
“당장 결정 못 하겠으면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말을 마친 윤태희는 소파에 앉아있던 재겸에게 향했다. 재겸은 술기운에 뻗어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재겸아.” 흔들어 깨워 봤으나 만취한 재겸은 대답이 없었다. 그에 윤태희는 재겸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붙이고 이마를 살짝 깨물었다. 앞니로 아프지 않게 야금, 한번 베어 먹었다.
윤태희는 재겸을 아이처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손목 소매를 슬쩍 걷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무감정한 눈으로 신지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결정했어?”
윤태희가 신지혜에게 준 시간은 끽해야 1분 남짓이었다.
“…….”
그렇게 신지혜는 하이펠리스 B동 1402호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