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91)화 (191/348)

#191

간밤에 인어와 재겸을 집으로 데려온 윤태희는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좋았다.

“잘 잤니….”

고작 하룻밤 사이에 황폐하던 윤태희의 영토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삭막하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영토에 봄이 찾아온 데에는, 계획대로 인어를 무사히 포획한 것도 한몫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주인의 덕이 컸다.

누구보다도 자비롭고, 때로는 누구보다도 냉혹한 이 마음의 주인 덕분에 꽝꽝 얼어 있던 영토는 사르르 녹아 있었다. 윤태희는 자신의 집,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재겸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데 없이 충만한 감정을 느꼈다. 베개 속에 파묻혀 자는 재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잠깐 선잠에 들었더니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다.

“어? 어….”

그러나 중간부터 기억이 끊긴 재겸은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속은 좀 어때?”

“…괜, 괜찮어.”

“머리는?”

“머… 머리도 안 아퍼.”

며칠 전에 집 앞에서 다투고 난 후로 윤태희는 연락 한 통 없었다. 어제 술집에 쳐들어갔을 때만 해도 저를 모르는 척하고 쌀쌀맞게 굴었었다. 그런데 지금의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아주 다정하기만 했다.

“…….”

재겸은 제 어깨에 이마를 부비적대는 윤태희를 슬쩍 떼어내며 저도 모르게 신지혜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술집에서 윤태희와 신지혜는 아주 오붓한 사이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신지혜는 지금 윤태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뭘 하든 딱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드라이기를 정리하던 신지혜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지, 게다가 저 비늘 돋은 다리는 뭔지,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한 게 많았다. 잠시 신지혜를 힐끔거리던 재겸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다가 윤태희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며 귓속말을 했다.

“…야, 저 사람 다리가 이상해.”

재겸이 심각한 목소리로 소곤거리자, 윤태희는 신지혜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저 사람은 인어야.”

조그맣게 흘러나온 대답에,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재겸도 인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귓속말이 새어나갔는지 신지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진짜 몰랐던 거야?”

그에 신지혜가 조용히 욕을 뱉으며 “아이, 씨. 나는 또. 나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줄 알았지. 모르는 줄 알았으면 도망치는 건데….”하고 중얼거렸다.

그에 재겸이 훨씬 더 작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인어가 왜 여기 있어?”

그러자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재겸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네 저주를 풀기 위해서.”

속삭이듯 흘러나온 대답에, 재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뭐?”

“네 저주는 인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윤태희는 재겸에게 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줄곧 인어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인어로 추정되는 신지혜를 알게 되었고,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며칠간 신지혜의 곁에 잠입했다는 것이었다.

“…….”

그간의 사정을 전해 듣게 된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불로불사의 저주가 인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니와, 윤태희가 정말로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을 줄은 몰랐다. 죽음을 유예하라던 그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던 것이다.

‘나도 너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죽음을 유예하라는 말에 화를 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그 말을 현실로 이루어내기 위해 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

재겸은 제 의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제멋대로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헤맨 윤태희가 괘씸하게 느껴지면서도,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마음이 묘하게 울렁이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울컥한 재겸이 말을 뱉었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나는 네가 연락도 안 받고 날 모른 척하길래,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네가 이제 나를…….”

발끈해서 쏘아붙이던 재겸이 말을 멈추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내가 이제 너를? 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

네가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으려는 줄 알았어….

순간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말에, 재겸은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뒤에 나올 말이 영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이러면 꼭, 윤태희가 계속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것 같으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재겸이 쓰고 있던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더듬을 때였다.

“야, 너네는 내가 병풍이니?”

신지혜가 재겸과 윤태희를 향해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사람 앞에 앉혀 두고 아까부터 둘이서 뭘 그렇게 속닥거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신지혜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신지혜가 자연스럽게 끼어든 덕분에,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재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밖에서 뭐 사 왔어?”

재겸은 애써 태연한 척 종이봉투를 뒤적거렸다. 다행히 윤태희는 더 캐묻지 않고, 우선 밥부터 먹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윤태희가 바깥에서 포장해 온 음식은 죽이었다. 어제 만취했던 재겸이 숙취에 시달릴 것을 우려해서 속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일부러 죽을 골랐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나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셔놓고도, 재겸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이건 무슨 죽이야?”

식탁으로 다가온 신지혜가 슬쩍 고개를 빼고 물었다.

“전복죽.”

아침을 안 먹는다던 신지혜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재겸은 신지혜가 불편했기 때문에, 윤태희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 비싼 거 샀네.”

신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자, 윤태희가 말했다.

“인어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먹어도 되나?”

장난기 묻어나는 목소리에, 신지혜가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상관없어. 난 어차피 반쪽짜리 인어니까.”

“뭐?”

턱을 괴고 있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신지혜를 응시했다.

“뭘 그리 놀라?”

신지혜가 태연한 얼굴로 수저를 들어 올렸다.

“반쪽짜리 인어라니?”

“인간과 인어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반쪽만 인어지.”

신지혜가 죽을 한술 뜨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는 인어고, 아빠는 인간이거든.”

***

어렸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인어라는 사실을 몰랐어. 엄마아빠가 말을 안 해 줬거든. 우리 집은 아주 평범했어. 그러다가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열 살 때야.

여름에 친가 가족들이랑 다 함께 계곡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사촌 언니들이랑 누가 제일 오랫동안 물속에서 있는지 잠수하는 시합을 했었어. 그런데 물속에서 저절로 숨이 쉬어지는 거야. 너무 신기해서 곧바로 엄마한테 가서 말했지. 근데 엄마가 그러는 거야.

‘지혜야, 넌 사실 인어야.’

엄마는 원래 바다에 살던 인어였는데, 뱃사람이던 아빠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대. 아빠가 본인 쓸개를 내어 주면서 프러포즈를 했고. 엄마는 아빠 쓸개를 먹고 평범한 사람이 됐대.

그때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어.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바닷가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왜냐면 엄마가 바다를 아주 싫어했거든. 근데 사실은 내가 바다에 들어가서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챌까 봐 일부러 못 가게 했던 거였어. 계곡은 바다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했었대. 아무튼,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됐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나 혼자만 알고 있었어.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열아홉 살 때였어.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리에 비늘이 돋아 있었어. 너무 놀라서 바로 엄마한테 가서 말했지. 근데 엄마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도 그날 검은색 스타킹 신고 학교에 갔다?

이건 딴 얘기고. 아무튼, 엄마가 주변을 수소문해서 다음 날 사람 쓸개를 구해다 줬어. 엄마는 내가 쓸개를 먹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나 봐. 나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사람 쓸개를 먹었어. 진짜 먹기 싫었는데 다시 평소처럼 살 수 있다니까 역겨웠지만, 꾹 참고 먹었지. 그걸 먹었더니 정말로 다리에 돋았던 비늘이 싹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왔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며칠이 지나니까 또다시 다리에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한 거야.

그때 깨달았지. 나는 이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는 몸이라는 걸…….

새침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신지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 열 받아. 진짜.”

신지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에 재겸이 흠칫하며 신지혜를 보았다가, 윤태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윤태희는 식탁 한쪽에 놓여 있던 각 티슈를 신지혜의 앞에 옮겨 주었다. 재겸도 윤태희도 왜 우느냐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신지혜가 티슈 몇 장을 뽑아 코를 팽! 팽! 풀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모델이 꿈이었어. 열일곱 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는데, 다리에 비늘이 생기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처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닥치는 대로 쓸개를 먹었는데 소용없었어. 쓸개를 먹고 나서 며칠 지나면 다시 비늘이 돋았거든.

평범한 다리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사흘 정도고, 사흘이 지나면 발등에서부터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정강이, 무릎, 허벅지, 점점 올라오기 시작해. 그러다 일주일이 지나서 다리가 전부 비늘로 뒤덮이면, 그때는 양다리가 붙어서 인어처럼 변하는 거야.

한 마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쓸개를 먹지 않으면 나는 결국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없게 되는 거야. 완전히 물고기의 하체가 되는 거지. 모델 일은 몇 년 못 가 그만뒀어. 다리에 비늘이 돋아나는 걸 막으려면 삼 일에 한 번은 쓸개를 먹어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일한 꿈이 사라지니까 매일매일 술이나 퍼마시며 한량처럼 살게 되더라.

“날 때부터 멀쩡하게 다리가 있는 너희는 내 마음 모르겠지.”

신지혜는 눈가에 티슈 조각을 덕지덕지 묻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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