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그래서, 너 예전에 뭐 잘못 먹은 적 있어?”
가만히 신지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재겸은 난데없이 날아든 질문에 눈썹을 모았다. 케케묵은 과거를 헤집어 보았으나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고, 묘정과 함께한 세월이 하도 오래 전이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일단 인어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어.”
인어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인어를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인어의 피와 살을 직접 취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신지혜의 말에 따르면 인어의 피와 살을 먹고 불로불사가 되려면, 인어와 사랑에 빠진 상대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재겸은 태어나서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없었다.
“어렸을 땐 자주 아팠어. 그래서 그때마다 탕약은 자주 먹었는데….”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재겸이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릴 때였다. 그에 윤태희가 작게 멈칫하는가 싶더니, 재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렸을 때 자주 아팠어?”
“응.”
“왜?”
“몰라. 어릴 땐 이유도 없이 자주 쓰러졌어. 가슴이 불타는 것처럼 아프고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고 그랬어. 그때마다 묘정이 약을 지어다 줬는데 그걸 먹으면 괜찮아졌어. 근데 주로 탕약이었지, 환 같은 건 거의 안 먹었어.”
가만히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대뜸 손을 들어 재겸의 뒤통수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담백하고도 다정한 손길에, 재겸은 순간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빼며 윤태희의 손길에서 달아났다.
그때, 신지혜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인어를 만난 적이 없다고 그랬으니까 그럼 네 불로불사는 인어랑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네. 그럼 남은 건 영생환인데. 어쩌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생환을 먹었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
생각에 잠긴 눈을 하던 신지혜가 턱을 괴었다.
“영생환에 대해선 나도 아는 게 없어서 더 말해 줄 게 없네. 근데 그냥 말이 영생환인 거지, 꼭 ‘환’의 형태일 거라고 단정 지을 순 없는 거잖아? 물에 개거나 녹이거나, 음식 속에 몰래 집어넣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않을까?”
신지혜가 어깨를 으쓱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자, 윤태희가 물었다.
“인어의 피와 살을 먹어서 불로불사가 됐다면, 되돌리는 방법이 있어?”
“내가 알기로는 인어랑 똑같아. 사랑하는 사람의 쓸개를 먹으면 돼.”
사랑하는 사람의 쓸개를 먹은 인어는 인간처럼 두 다리를 얻고, 인간처럼 노화하기 시작하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늙어 죽을 수 있는 몸이 된다.
“그럼 영생환을 먹어서 불로불사가 된 경우는?”
“글쎄… 영생환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똑같지 않을까? 인어가 가진 속성을 넘겨받아서 불로불사가 된 거니까.”
“그래?”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개수대로 향했다. 서랍을 열더니 날붙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날붙이를 손에 쥔 윤태희가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여기서 바로 내 쓸개를 먹어보면 알겠네.”
윤태희가 내뱉은 태평한 말에, 신지혜와 재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
“……”
윤태희가 고개를 내려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더니 비어 있는 손으로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었다. 쓸개가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가늠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야, 쟤 진짜 또라이 아니니?”
신지혜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재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재겸은 윤태희의 손목을 잡으며 낯을 굳혔다.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윤태희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어쩌면 내 쓸개가 통할지도 몰라.”
이 와중에 흘러나온 태연한 고백에 재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머, 웬일이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신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그래서 여기서 지금 칼을 쑤셔 넣겠다고?”
“다치는 건 상관없어. 동자님한테 치유해달라고 부탁하면 돼.”
“제정신이냐?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처럼 죽지 않는 몸도 아니면서, 약해빠진 몸뚱이를 칼로 쑤시겠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정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재겸은 점점 화가 났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쓸개 떼어내는 게 어떻게 밑져야 본전이야?”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신지혜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고향에 있는 우리 엄마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는 건 어때?”
그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신지혜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네 불로불사의 원인이 인어 때문인지, 아니면 인어로 만든 영생환 때문인지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인어한테 가서 직접 확인을 받는 수밖에 없어. 우리 엄마 말로는 인어들은 인간한테 나는 냄새만 맡아도 인어를 먹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댔어. 나는 반쪽짜리 인어라 잘 모르지만. 그리고 우리 엄마는 영생환에 관해서 나보다는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을 거고.”
가만히 신지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윤태희가 물었다.
“인어들의 고향이라면… 거문도?”
윤태희의 말에, 신지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예전엔 거문도에서 살았는데, 인간한테 하도 시달려서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옮겼어. 거문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거여도라는 섬이야.”
신지혜가 새침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베베 꼬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없으면 쉽지 않을 거야. 아주 깊은 바닷속에 있으니까 너네 둘이서는 절대 못 찾아. 그러니까 내가 바다로 내려가서 엄마를 뭍으로 데려올게.”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신지혜는 어느덧 다리의 절반 이상이 비늘로 뒤덮인 상태였다. 이 상태로 하루 이틀이 지나면 다리가 붙고, 완전한 인어의 하체를 갖게 될 것이었다. 바닷속에 들어가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적합한 몸 상태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어제 나한테 브로커든 돌팔이든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 소개해 줘. 그리고 앞으로 나 좀 지켜 줘. 나례청이 영영 내 존재를 모르게끔.”
신지혜가 또렷한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
“약속해 준다면, 내가 너희 둘을 섬까지 직접 안내해 줄게.”
“좋아, 그렇게 할게.”
윤태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여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배가 잘 뜨지 않으니까, 섬에 들어가서 엄마를 데려오려면 최소 하루 이틀은 걸릴 거야. 그동안 너네는 섬에서 기다려야 해. 그리고 다른 인어들한테는 들키면 안 되거든. 인간한테 아주 적대적이라서 너희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나 혼자 몰래 내려가서 엄마를 데려올게.”
“그래, 알겠어.”
윤태희는 신지혜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
속전속결이었다. 그에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제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윤태희 혼자 독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이 상황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재겸이 윤태희의 손목을 험악하게 확 잡아끌었다.
“야. 잠깐 얘기 좀 해.”
***
윤태희를 끌고 방으로 들어온 재겸은 문을 닫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왜 전부 너 혼자서 결정하는 거야?”
재겸은 싸늘하게 눈을 치켜뜨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내 저주가 인어 때문인지 아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런데 지금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인어를 만나러 가겠다고?”
욱한 재겸이 살벌한 기세로 쏘아붙였으나,
“그러니까 직접 가서 물어보자는 거야.”
윤태희는 무감한 표정으로 말을 받아쳤다.
“이제 곧 있으면 목패를 훔쳐야 하잖어. 만약 갔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그리고 나는 네 말을 따를지 말지, 아직 아무런 결정도 안 했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 의사는 상관없어.”
그에 재겸의 낯이 매섭게 굳을 때였다.
“걱정하지 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너는 목패를 되찾아서 내게 이름을 돌려줄 거고, 나는 나례청을 무너뜨리고 방상시의 탈을 빼앗을 거야.”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윤태희가 재차 말했다.
“그리고 너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거야.”
“……..”
“하지만 그게 두 달 뒤는 아니야.”
“…….”
결국은 제자리를 맴도는 도돌이표와 같은 대화였다. 재겸이 어젯밤 윤태희를 찾으러 간 것은 어쨌든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통하지 않는 상태로 떨어져 있어봤자 시간만 허비하는 셈이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했다. 저주를 풀 방법은 어떻게 찾을 건지, 방법을 찾는다면 약속은 어떻게 할 건지,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어떡할 건지….
재겸이 아는 윤태희는 겉으로는 느긋해 보이지만 사실은 몹시 집요하고 치밀한 인간이었다. 복수를 위해 10년의 세월을 기다릴 만큼,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움직이던 놈이 갑자기 몸에 칼을 들이대고,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왜 자꾸 네 멋대로 구는 거야?”
재겸이 입술을 꾹 깨물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내가 언제 저주 풀어 달랬어?”
“아니, 이건 네가 원해서가 아니야.”
윤태희가 무표정한 낯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원해서야.”
거리낌 없이 흘러나온 말에 날카롭던 재겸의 기세가 확 꺾였다. 윤태희는 아주 당당하게 이기적이고, 뻔뻔하게 자기중심적이며, 거침없이 사랑을 운운한다.
“…….”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네가 다치면 내가 아파서 그래.’
재겸이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윤태희가 대뜸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재겸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리자, 윤태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제 나 왜 찾으러 왔어?”
“…….”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이던 재겸이 애써 태연하게 대답을 쥐어짜 냈다.
“그, 그건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연락이 안 됐잖어.”
그때, 윤태희가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는가 싶더니, 뺨을 감싸 쥐고 있는 재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깊숙이 파고드는 향기가 순간 아찔했다.
윤태희가 눈을 천천히 내리뜨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뿐이야?”
“…….”
재겸의 속눈썹이 정신없이 나풀거렸다.
“정말 그것뿐이야?”
“…….”
마침내 코끝이 맞닿은 상태에서, 윤태희가 물었다.
“그럼 어제 왜 나한테 키스해 달라고 했어?”
그 순간, 재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키스해 달라고 했다고?
재겸은 어젯밤의 기억이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그런데 윤태희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번쩍 기억이 났다. 이렇게 코를 맞대고 있는 상황에 기시감이 들었다. 어제 진짜로 윤태희와 키쓰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당황한 재겸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건…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고, 술주정이었어.”
윤태희는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재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
말없이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그대로 이마를 미끄러트렸다. 재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주정이었더라도 상관없어….”
재겸의 목덜미에 이마를 박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제정신 아닌 셈 치고, 나랑 같이 갈까….”
마지막으로 떠나는 짧은 여행처럼, 그 머나먼 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