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재겸은 정오가 지난 무렵에야 세 식구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재겸아, 어제 어떻게 된 거야? 하루 종일 전화도 안 받고.”
지난밤 말도 없이 외박을 했던 재겸이 집에 돌아오자 정주와 메산이는 한달음에 현관 앞까지 달려 나왔다. 재겸은 일이 바빠서 야근했다는 핑계를 대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주야, 나 배낭 하나만 갖다 줘라.”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재겸이 말했다.
“갑자기 웬 배낭?”
뜬금없는 부탁에, 정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내일 어디 가기로 했는데 미리 짐 좀 싸 놓게.”
“뭐? 어딜 가는데?”
재겸은 말없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제정신 아닌 셈 치고, 나랑 같이 갈까.’
윤태희의 제안을 뿌리칠 명분을 찾지 못한 재겸은 결국 떠밀리듯 두 사람과 함께 거여도로 가게 되었다. 배편을 알아보던 윤태희는 오늘은 안 되겠다며 내일 출발하자고 했다. 거여도로 가는 배편은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하루에 두 번뿐이라 당장 출발해도 오늘 안에 섬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자 짐을 챙겨서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재겸은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노라 둘러댔다.
“출장? 이제 출장도 가는 거야? 무슨 일 때문에?”
“…….”
지긋지긋한 이 영생이 정말로 인어와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재겸은 “그냥 뭐… 조사할 게 있다나 봐.” 하며 질문을 대충 무마했다.
“어디로 가는데?”
“어? 어… 어디 섬이라는데….”
“위험한 일은 아니지?”
재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주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주가 배낭 가방을 꺼내서 갖다 주었다. 방에서 옷 몇 벌을 가져온 재겸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재겸이 며칠 동안 집을 비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메산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유남생은 그런 메산이의 머리통 위에 엎어져, 짐을 챙기는 재겸의 모습을 구경했다.
“나리, 그럼 언제쯤 오셔요?”
“…….”
“나으리?”
메산이가 침울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으나, 심사가 복잡한 재겸은 메산이의 말이 귀에 닿지 않는 상태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마음이 번잡했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윤태희에게서 저주를 풀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겸은 몹시 화가 났었다. 두 달 뒤에 삶을 끝낼 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차에 윤태희가 제멋대로 약속을 비틀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사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저주를 푼다는 선택지가 크게 와닿지 않았고, 윤태희가 정말로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윤태희는 재겸의 품에 범위 바깥의 문제를 안겨 주었다.
불로불사의 저주가 인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로 인어와 연관이 있다면, 어쩌면 불로불사가 된 몸을 되돌리는 방법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태희가 말한 대로 저주를 풀고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뿌연 가정이 실재하는 가능성이 되어 현실로 다가오자 재겸은 심란해졌다. 이제는 윤태희가 말을 바꾼 것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심사가 복잡하기만 했다.
만약 정말로 저주를 푸는 게 가능하다면….
옷가지를 차곡차곡 접던 손이 점점 느려졌다. 두 달 뒤에 당장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재겸은 아직 찾지 못했다. 유남생은 살아가는 데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재겸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앞날을 살아가는 데 이유가 없다는 답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했지만, 한편으로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막연했다.
저주를 풀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재겸아, 너 혹시 무슨 고민 있어?
그때, 곁에서 짐 싸는 것을 도와주고 있던 정주가 재겸의 어깨를 짚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짐을 챙기다 말고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의 어깨가 움칫 튀었다.
“어? 어… 아니….”
그제서야 재겸의 시야에 옹기종기 모여 저를 바라보는 세 얼굴이 보였다. 정신을 빼놓고 있던 재겸은 머리를 슥슥 누르듯이 매만지며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질문을 흘려보냈다.
“고민은 무슨… 없어.”
“근데 요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그냥 일 때문에 좀 피곤해서 그래.”
며칠 전 재겸이 돌연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에, 그때부터 정주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재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괜히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재겸은 평소에는 아주 솔직하고 거침없으면서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아끼는 타입이었다.
뭐든지 터놓고 말해주기를 바랐으나 재겸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고 결단을 내렸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소년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스스로를 강인하게 만들었지만, 정주는 그 강인함 속에서 소년의 고독을 읽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재겸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정주도 더 캐묻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든 둘러봐 주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잠시 집을 떠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왕 섬으로 출장 가는 김에 머리도 식히고 좀 쉬다가 와.”
그렇게 말하며, 정주는 재겸의 어깨를 두어 번 주물러 주었다.
“가서 너무 열심히 일만 하지 말고, 쉬엄쉬엄 바람도 쐬고 그래. 골치 아픈 생각들 전부 내려두고 휴가 다녀온다고 생각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것도 많이 보고 와.”
재겸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정주를 쳐다보았다.
“재겸아, 너 섬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
“어? 어….”
“낯선 곳에 가면 이전과 달라지는 느낌이 들잖아. 바다 보면서 한숨 돌리다 보면 새롭게 눈에 보이는 것도 있을 거야. 직접 경험하고 겪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
“그러니까 머릿속은 전부 비우고! 사진도 많이 찍어 오고!”
재겸은 말없이 배낭끈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재겸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의 말이 맞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하는 생각들은 전부 번뇌일 뿐이다. 확실히 알고 나서 앞날을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 섬에 가면 뭐든 답이 나올 테니까.
그러니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
재겸은 배낭 가방을 질끈 동여맸다.
***
다음 날 아침, 재겸은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배낭 가방을 등에 업고 현관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골목에는 이미 윤태희의 세단이 와서 대기 중이었다.
“안녕.”
보닛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윤태희가 언제나처럼 인사를 건넸다가, 재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끄러미 훑어보았다. 남색과 빨간색이 섞인 체크무늬 긴 팔 셔츠에 안에는 흰 티를 받쳐 입고, 청바지를 주워 입은 재겸은 앳된 대학생처럼 보였다.
윤태희가 얼굴을 찡그리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입으니까 새내기 대학생 같네.”
“너도 학생 같어.”
윤태희는 차콜색으로 된 브이넥 반팔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앞머리를 내린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느슨하고 산뜻해 보였다. 평소엔 보통 서로 정장을 입은 상태에서 만났는데, 둘 다 평상복을 입고 밖에서 만난 건 거의 처음이었다.
“나야 학교 다닐 나이는 지났지.”
“누군 안 지났냐?”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받아쳤다.
“오, 시간 맞춰 나왔네? 어서 와.”
뒷좌석 창문 밖으로 상체를 걸치고 있던 신지혜도 인사를 건넸다.
재겸이 배낭을 메고 있는 것을 본 윤태희는 곧바로 담배를 떨어트리고 발로 비벼 끄더니, 제 얼굴 근처로 손을 휘적거리며 재겸에게 다가왔다. 재겸에게서 배낭을 넘겨 받은 윤태희가 “가방이 좀 무겁네.” 하며 중얼거렸다. 가방 안에는 메산이가 만든 약수 몇 병이 들어 있었다. 위험한 일이 아니라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수차례 말을 했음에도 메산이는 울먹울먹하며 재겸을 붙잡고 고집을 부렸다. 그에 재겸은 어쩔 수 없이 약수를 챙겼다.
윤태희는 배낭을 싣기 위해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신지혜가 가져온 작은 캐리어와 윤태희가 가져온 적당한 사이즈의 백팩, 그리고 제구와 잡동사니가 한데 엉켜 뒤죽박죽 굴러다니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때, 재겸의 눈에 한쪽에 접어놓은 휠체어가 보였다.
“이건 뭐야?”
재겸이 휠체어를 가리키며 묻자, 윤태희가 뒷좌석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
“다리가 거의 붙은 상태라서 걷기가 힘들 거야.”
뒷좌석에 앉은 신지혜는 윤태희의 세단이 제 안방이라도 되는 양 팔자 편하게 누워 있었다. 윤태희의 발대로 양쪽 발이 붙어 있었고, 인어의 비늘이 온통 뒤덮여 있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신지혜의 하체는 인어의 형상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