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95)화 (195/348)

#195

차가 출발했다. 재겸은 조수석에 앉았다. 매끄럽게 골목을 빠져나온 검은 세단은 금세 큰 도로로 나왔다. 윤태희는 전방을 주시한 채 간략히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여수로 가야 해. 차 안 막히면 아마 4시간 좀 넘게 걸릴 텐데, 여수에 도착하면 바로 여객선 터미널로 가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거야.”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신지혜가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차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때, 고개를 끄덕이던 재겸이 물었다.

“야, 근데 나 말없이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야?”

윤태희는 본청에 휴가를 냈지만, 재겸은 미리 말도 안 하고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게 된 상황이었다. 저번에도 무단결근을 해서 강이빈에게 혼났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윤태희는 왜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어쨌든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제법 좋은 감투를 쓰고 있는 윤태희의 말이니 믿을 만했다.

“나는 좀 잘게. 도착하면 깨워 줘.”

그때, 뒷좌석에서 뒹굴뒹굴하던 신지혜가 미리 챙겨 온 안대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신지혜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목베개까지 한 채, 두 다리를 뻗고 잠 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재겸은 태평하게 잠을 청하는 신지혜가 부러웠다. 하긴 본인 일이 아니니까 저럴지도 모른다.

신지혜와 달리 재겸은 어쩔 수 없이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정말 이 저주가 인어와 관련이 있다면….

재겸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인어를 만나서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제부터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신지혜가 잠에 빠지자, 차 안이 몹시 조용해졌다. 재겸은 아무 말 없이 긴장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윤태희는 고개를 돌려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치 중요한 면접을 앞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해 있는 모습이었다.

“…….”

윤태희의 손끝이 핸들 위를 톡톡, 두들겼다.

그때,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춰섰다. 기어를 바꾸고 신호를 기다리던 윤태희가 대뜸 팔을 슬쩍 뻗었다. 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라디오를 틀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라디오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재겸은 힐끔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채널을 바꾸던 윤태희는 마침내 원하는 주파수를 찾아냈다. 그러나 윤태희가 찾아낸 채널은 원래 듣던 클래식 채널이 아니었다.

[쑤훅~ 대~ 머리….]

윤태희가 튼 채널은 국악 채널이었다….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 난 것이 임~ 뿐이라….]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명창의 한 맺힌 판소리가 울려 퍼졌다.

“…….”

“…….”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듯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그에 재겸은 눈꼬리를 샐쭉 올리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반대쪽 손으로는 팔꿈치를 창틀에 기댄 채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 윤태희는 언뜻 보기에 아주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역시 일부러 시비 걸려고 튼 게 맞는 것 같다.

“너 지금 나 놀리냐?”

“제가요? 그럴 리가요…….”

윤태희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취향 생각해서 튼 건데.”

“취향 같은 소리 하네.”

씨알도 안 먹히는 핑계였다. 윤태희의 눈에서는 장난기가 꿀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야, 오래 살면 다 판소리만 듣는 줄 아냐? 너 그거 편견이야. 까불지 말고 다른 거 틀든지 노래를 끄든지 해.”

“그럼 평소에 무슨 노래 듣는데?”

“나도 요즘 사람들 노래 들어.”

“누구?”

잠시 눈을 굴리던 재겸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최백호.”

“…….”

윤태희는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7080 음악을 듣는 건 재겸의 기준으로 충분히 세련된 것이었다….

“최백호 노래는 어디서 들었어?”

“테레비에서.”

무심한 얼굴로 대꾸하던 재겸이 말을 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9번에서 <열린음악회> 하는데 거기에 가끔 나와. 그리고 얼마 전에는 <가요무대>에도 나왔어. <가요무대>도 9번에서 하는데 여기 좋은 노래 많이 나와.”

“…….”

“너는 <가요무대> 안 보냐?”

“아… 제가 집에 티비가 없어서….”

윤태희의 말에, 재겸이 미간을 모았다. 그랬지. 생각해보니 어제 처음으로 윤태희 집에 갔을 때 테레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테레비는 없고, 별의별 책들만 수두룩빽빽했다.

“야, 근데 너는 왜 집에 테레비가 없냐?”

“그러게.”

재겸의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윤태희가 적당히 대꾸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앉아 있던 재겸의 자세는 어느새 한결 편하게 풀려 있었다.

“넌 돈도 썩어나면서 테레비도 안 사고 뭐 했냐?”

“나도 테레비 하나 살까?”

“사.”

“그럼 테레비 사면 우리 집 놀러 올래?”

“…뭐?”

윤태희가 정면을 응시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비 살 테니까 나랑 같이 살래?”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조수석 창문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 우리 집에도 테레비 있는데 내가 왜.”

윤태희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조용히 웃으며 라디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평범한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며 차 안의 정적을 적당히 메꿨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재겸은 불현듯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어제 윤태희가 본인 쓸개를 내주겠다며 칼을 들고 설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고 보니 만약 저주를 풀고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게 된다면, 윤태희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지금처럼 지내게 되는 걸까?

윤태희는 쓸개를 빼줄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그때, 빨간불이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핸들에 상체를 반쯤 엎드린 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윤태희가 대뜸 허락도 없이 재겸의 손을 가져갔다. 재겸의 손에 깍지를 끼고 기어를 잡았다. 그에 재겸이 움찔하며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겹쳐진 두 사람의 손이 기어를 함께 앞으로 밀었다.

“갈까요.”

멈춰 서 있던 차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한 이후 2시간이 흘렀다. 평일 오전이라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어느새 목적지인 여수까지 절반쯤 남은 상태였다.

재겸과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며 운전을 하던 윤태희는 휴게소 표지판을 보고 차를 틀었다. 바람도 쐴 겸 점심을 앞두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윤태희가 뒷좌석에 있던 신지혜를 깨웠다. 그에 잠에 빠져 있던 신지혜가 비몽사몽 몸을 일으키더니 “나가기 귀찮아. 자기들끼리 다녀와.” 하며 다시 편하게 자세를 잡고 누웠다.

“올 때 호두과자랑 따듯한 라떼 한잔 사와.”

몸을 뒤척이던 신지혜가 당당하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에 재겸과 윤태희는 신지혜를 뒤로 하고 차에서 나란히 내렸다. 차에서 내린 재겸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휴게소를 구경했다. 휴게소에 온 건 처음이었다. 휴게소 뒤편으로 산자락이 펼쳐져 있어 경치가 꽤 좋았다.

“재겸이 뭐해요.”

앞서 한두 걸음 걸어나가던 윤태희가 손을 뒤쪽으로 뻗으며 장난스레 손가락을 팔랑거렸다. 그에 휴게소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재겸은 한 박자 늦게 윤태희를 졸졸 쫓아갔다.

휴게소에 입장하던 차량 몇 대가 두 사람 앞을 줄줄이 지나갔다. 휴게소 주차장에는 신호등 같은 것이 없고, 횡단보도 같은 게 없다 보니 눈치껏 길을 건너야 했다.

주차된 차량들을 지나 휴게소로 향할 때였다. 멀리서 다가오던 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앞서 걷는 윤태희를 들이받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야, 조심해.” 그에 윤태희의 뒤에서 걷던 재겸이 깜짝 놀라서 앞으로 확 튀어나갔다. 윤태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저 씹…….”

윤태희를 제 뒤로 물린 뒤, 재겸이 운전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운전자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미안하다는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열 받은 재겸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험악한 눈으로 집요하게 운전자를 노려보았다.

“씨발 운전을 저따구로 해.”

그에 윤태희가 픽 웃으며 “괜찮아.” 하더니 재겸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얼떨결에 윤태희에게 어깨를 안긴 재겸은 어영부영 몇 걸음 따라가다가, 휴게소에 이르러 슬쩍 몸을 뺐다.

휴게소 건물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겸은 줄줄이 늘어선 스낵코너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재겸의 시선이 핫바를 팔고 있는 가게에 고정되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윤태희가 재겸의 손바닥 안쪽을 손끝으로 할퀴듯이 긁으며 조용히 말했다. “사줄까?” 오묘한 감각에 재겸의 어깨가 움찔했다.

재겸은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윤태희는 그 외에도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휴게소를 돌아다니며 어묵 핫바 두 개와 맥반석 오징어, 통감자, 호두과자 한 봉지를 샀다. 이쯤 되니 손에 봉투가 잔뜩 들려 있었지만, 신지혜의 심부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직 들를 곳이 남아 있었다.

신지혜가 주문한 라떼를 사기 위해 두 사람은 건물 안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온 김에 재겸과 윤태희도 각자 마실 것을 사 가기로 했다. 윤태희의 질문에 재겸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온갖 난해한 말이 적힌 메뉴판을 보자,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뭐 마시고 싶어?”

재겸이 반쯤 입을 벌리고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 재겸은 사실 카페 음료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윤태희에게 물어보려는데, 때마침 윤태희가 재겸에게 다정하게 귓속말을 했다.

“근데 카페 메뉴는 아시는지?”

“…….”

그에 살짝 발끈한 재겸은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나도 다 알거든.”

“대신 골라줄까?”

“됐어. 내가 고를 거야.”

윤태희가 웃음을 꾹 참고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카페라테 한 잔에 밀크티 한 잔, 둘 다 따듯한 거로 주세요. 그리고….”

일단 자신의 음료를 주문한 윤태희가 재겸을 돌아보았다. 다 골랐느냐는 뜻이었다. 그에 메뉴판을 뚫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살짝 흠칫하더니, 이내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저는 딸기. 요거트. 수무디. 주세요.”

윤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

과카몰리 연어 샐러드를 말했다가 쥐잡듯이 욕먹은 게 얼마 전의 일이었다….

“마셔 본 적 있어?”

윤태희가 재차 물었다.

“진짜로?”

그에 오기가 생긴 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카페 몇 번 가 봤어.”

사실 방금 건 뻥이다. 카페에 가 본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때마다 강이빈이 대신 주문을 했고, 강이빈이 임의대로 골라주어서 재겸은 카페 음료의 종류를 몰랐다. 그러다 메뉴판에 적힌 난해한 이름들 가운데 ‘딸기’라는 글자가 눈에 띄어서 대충 고른 것일 뿐이다.

어차피 마시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때, 주문을 받은 직원이 포스 기계를 띡띡 누르며 메뉴를 다시 한번 읊었다.

“밀크티 하나, 카페라테 하나, 두 잔은 따뜻하게 드리고.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한 잔, 총 세 잔 맞으시고요?”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윤태희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낼 때였다.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재겸이 슬쩍 끼어들어 의사 표현을 했다.

“저도 따듯한 거로 주세요.”

직원과 윤태희의 시선이 동시에 재겸에게 향했다.

“네?”

말이 잘 안 들렸는가 해서, 재겸이 다시 말했다.

“제 것도 따듯하게… 더운 거로요.”

“…….”

“…….”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윤태희를 스윽 쳐다보았다. ‘당신 일행이니까 당신이 좀 해결해라’라고 말하는 듯한 직원의 눈빛에서는 노동자의 피로함이 엿보였다. 그에 잠시 당황해서 굳어 있던 윤태희는 살짝 휘청이는 걸음으로 카운터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수무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윤태희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큭큭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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