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만 웃어.”
재겸과 윤태희는 간식거리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 차로 돌아오는 내내 윤태희가 웃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 큭큭거려서, 재겸은 가자미눈을 떴다.
‘손님. 스무디는 찬 음료라 따듯하게가 안 돼요…….’
스무디가 뭔지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 재겸의 손에는 차가운 딸기 요거트 스무디가 들려 있었다. 애초에 윤태희가 놀리듯이 ‘카페 메뉴는 아시는지?’ 하고 도발하듯이 성질을 긁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윤태희는 큭큭 웃어 대고 있었다.
아니, 쟤는 무슨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재겸은 괜히 약이 올랐다. 어깨까지 떨면서 웃어 대는 모습이 몹시 얄미워서, 재겸은 씩씩거리며 주먹을 쥐고 윤태희의 팔뚝을 퍽 때렸다.
“그만 웃으라고.”
아퍼. 윤태희가 팔뚝을 감싸 쥐며 장난스레 엄살을 피웠다.
“내 것도 사 왔어?”
그때, 뒷좌석에서 누워 있던 신지혜가 안대를 벗으며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재겸은 봉투 안에 있던 간식거리와 캐리어에 담아온 음료를 내밀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난 호두과자만 있으면 되는데.”
“나머지는 내가 먹을라고 산 거야.”
재겸이 볼따구를 긁적거리며 작게 대꾸했다.
“이걸 전부 다? 혹시 며칠 굶었어?”
“아니, 안 굶었는데….”
“뭔… 너 장래희망이 푸드파이터니?”
“그게 뭔데….”
재겸의 일격으로 남은 웃음기를 털어낸 윤태희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배편에 늦지 않으려면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검은 세단이 휴게소를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안정적인 승차감 속에서, 재겸은 일단 알감자부터 시작했다. 재겸과 몇 마디 말을 나누던 신지혜는 다시 안대를 쓰고 코를 골고 있었다. 재겸은 일회용 포크로 알감자를 쿡 찍었다. 한 입에 통째로 넣었다. 버터 바른 알감자는 풍미가 아주 좋았고, 고소했다.
“맛있어?”
“응.”
“나도 먹어 볼래.”
윤태희의 말에 재겸은 적당한 크기의 알감자를 골라 포크로 쿡 찍었다. 포크째로 윤태희에게 건네는데, 윤태희가 입에 넣어 달라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에 포크를 쥐고 있던 재겸의 손이 움찔했다.
하긴, 운전 중이니까 먹여 주는 게 낫겠지….
살짝 남사스러웠지만, 재겸은 윤태희에게 알감자를 먹여 주었다.
“어때?”
“응, 맛있네.”
재겸은 윤태희의 저작근이 움직이는 것을 은밀히 훔쳐보았다.
“하나 더 줘?”
“아니, 괜찮아.”
역시 윤태희는 입이 짧다.
알감자를 몽땅 해치운 재겸은 이번엔 핫바를 꺼내 들었다. 사 올 때부터 케첩을 미리 뿌려서 가져온 핫바는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재겸은 핫바를 노려보다가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쫄깃하게 튀긴 어묵과 케첩의 조화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맛있어?”
“응.”
재겸은 자신이 먹던 어묵 핫바를 윤태희의 입가 근처로 갖다 댔다. 먹어 보라는 뜻이었다. 윤태희가 입을 살짝 벌리고 한입 베어 물려고 할 때였다. 순간 차체가 흔들렸다. 동시에 핫바를 쥐고 있던 재겸의 손이 휘청하면서, 핫바를 윤태희의 입가에 뭉개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재겸을 보았다. 핫바에 케첩이 잔뜩 뿌려져 있던 탓에, 윤태희의 코와 턱에는 케첩이 잔뜩 묻어 있었다.
“…….”
“…….”
윤태희의 맹한 표정과 입 주변에 케찹이 묻은 꼴을 바라보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트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보면 볼수록 너무 웃겨서, 재겸은 핫바를 손에 쥐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에 윤태희는 웃음이 터진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웃는 소년은 그 나잇대처럼 보였다.
“닦아 줘.”
“아까우니까 그냥 핥아먹어.”
“네? 뭘 핥아먹어요….”
황당해하던 윤태희도 마침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겸이 웃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둘은 서툰 소년들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아까는 윤태희가 계속 웃었으나, 이번엔 재겸이 내내 웃고 있었다.
결국, 윤태희는 물티슈를 찾아서 턱에 묻은 케첩을 손수 닦아 냈다.
연신 킥킥거리던 재겸은 얼굴에 웃음을 그치기 위해 조수석 창문을 살짝 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속에는 이름 모를 산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기분 좋게 밀려들었다.
일부러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는데도 자꾸 비식비식 웃음이 나왔다. 휴게소에서 윤태희가 웃을 때만 해도 별것도 아닌 거로 왜 저렇게 웃나 싶었다. 그러나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윤태희가 왜 그렇게 웃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람결을 느끼던 재겸은 불현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기분이 붕 뜨고 설렜다.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이 감각은 익숙하면서도,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것은 ‘즐겁다’라는 감각이었다.
재겸은 지금 좀 즐거웠다.
***
한참을 달리고 달려 마침내 여수에 도착했다.
전라남도 끝자락에 있는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희미한 바다 냄새가 났다. 푹 자고 일어난 신지혜는 어느새 눈을 말똥말똥 뜨고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신지혜는 창문을 내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바다 냄새를 맡았다. 눈빛에서는 묘한 생동감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윤태희는 곧장 여수 연안여객선터미널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배편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여수항 주차장에 차를 세운 윤태희는 트렁크에서 짐가방과 휠체어를 꺼냈다. 차를 끌고 섬에 갈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주차장에 며칠간 차를 놓고 섬에 다녀와야만 했다.
바다가 코앞이라 갈매기가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고,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선명했다.
윤태희는 뒷좌석 문을 열고 휠체어를 펼쳐 가깝게 붙여 주었다. 그러자 신지혜가 차 문손잡이를 잡고 휠체어 위에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다리는 담요로 꼼꼼히 가려둔 상태였다.
세 사람은 배를 타기 위해 터미널 안으로 향했다. 짐은 몽땅 윤태희가 들었다. 짐가방 두 개를 들고 캐리어까지 끄느라 무거울 법한데도 윤태희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재겸은 신지혜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앞장선 윤태희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거여도로 향하는 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거여도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섬을 거쳐야 했는데, 두 시간가량 걸린다고 했다. 커다란 선박을 실제로 보는 것도, 배에 타는 것도 처음인 재겸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우우——
우렁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페리호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육지가 점점 멀어진다. 재겸은 선상 난간에 서서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언제나 잔잔하던 마음속으로 기묘한 울림이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어느새 재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던 재겸이 어느 순간 시선을 돌렸다.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러운 쪽을 쳐다보니, 일행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반대쪽 난간에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것은 새우 맛 과자였다. 팔을 쭉 뻗어 과자를 내밀면, 페리호 주변을 맴돌던 갈매기들이 과자를 휙 낚아채 갔다. 사람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갈매기에게 부지런히 과자를 내밀었다.
재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해 볼래?”
그때, 신지혜와 함께 있던 윤태희가 다가와서 다정하게 물었다.
“됐어.”
재겸은 금세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윤태희는 별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새우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어디서 났나 했더니 선내에 매점이 있다고 했다. 그에 재겸은 못 이기는 척 새우과자를 한 주먹 끄집어냈다.
재겸은 새우 과자를 쥐고 난간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갈매기가 순식간에 과자를 뺏어 갔다. 재겸이 어어! 하며 눈을 크게 뜨더니, 방금 봤냐는 듯이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어어! 어! 손에 부리 닿았어!”
재겸은 제 손을 붙잡고 드물게 큰 목소리를 냈다.
늘 무기력하고 심드렁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재겸의 모습을, 윤태희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살짝 상기된 낯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년 같았다. 생동감 넘치는 소년의 모습은 윤태희에게 알 수 없는 감명을 안겨 주었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 바닷바람에 네 부드러운 머리칼이 나부낀다. 윤태희는 불현듯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때, 재겸이 윤태희를 향해 후다닥 달려왔다. 잽싼 몸놀림으로 윤태희의 정수리 위에 새우 과자를 덩그러니 올렸다. 그러자 먹이를 포착한 갈매기가 휙 날아들었다. 윤태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젖히며 놀란 눈을 하자, 재겸은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 땜빵 생겨.”
“숯으로 칠하면 되지.”
재겸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배에 타는 것도, 섬에 가는 것도, 갈매기에게 밥을 주는 것도, 바다 한복판에 있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처음이었다. 집에 가서 애들한테 전부 말해 줘야겠다. 다음에도 또 배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메산이랑 정주랑 해서 다 같이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다음에는.
다음에도.
어느 순간, 재겸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