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출항한 지 30분이 지난 무렵, 윤태희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야, 너 괜찮어?”
윤태희의 낯빛이 좋지 않음을 눈치챈 재겸이 물었다.
“쟤 멀미하는 것 같은데?”
신지혜의 말에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거리 운전에도 멀쩡하던 윤태희는 배에 탄 지 삼십 분도 안 돼서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재겸은 내심 신경이 쓰였다. 저렇게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약해빠진 몸뚱이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모를 일이다.
윤태희는 선내 객실에 들어가서 잠깐 쉬어야겠다고 했다. 재겸은 윤태희를 졸졸 따라갔다. 그러자 윤태희가 휴게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겸의 손바닥을 할퀴며 조용히 말했다.
“나 괜찮으니까 나가서 바다 구경해. 잠깐 눈 좀 붙일게.”
배려 섞인 말에도, 재겸은 객실 안으로 향하는 윤태희를 졸레졸레 따라갔다.
윤태희는 비어 있는 객실 좌석에 가서 앉더니, 배 위에 손을 가지런히 겹치고 눈을 감았다. 재겸은 그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윤태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단정한 얼굴선을 바라보던 재겸은 근처에 있던 담요 하나를 가져와서 윤태희를 슬쩍 덮어 주었다.
그에 윤태희가 고개를 젖히더니,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재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왠지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재겸은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토할 것 같으면 불러. 등 두드려 줄게.”
신지혜를 밖에 혼자 둘 순 없어서, 재겸은 다시 객실 밖으로 나왔다.
***
선상으로 나오니, 휠체어에 앉아 먼바다를 응시하는 신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갈매기 떼가 끼룩거리며 신지혜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신지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어.”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재겸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 쓸, 쓸개는 먹을 만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신지혜가 눈을 흘겼다.
“미쳤니? 말도 못 하게 역겨워.”
재겸이 멋쩍은 낯으로 이마를 긁적거렸다.
“너무 힘들었어. 쓸개를 구하는 일도, 역겨운 쓸개를 먹는 것도, 계속 다리를 숨기며 살아야 하는 것도, 전부 다. 그래서 그냥 인어로 살까 생각도 해 봤었어.”
예전에 한 번 고향에 갔다가 쫓겨난 적이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구르고 구르다 보면 언젠가는 받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인어들로부터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으며 배척당하는 처지이긴 했으나 어쨌든 인어인 모친이 있는 이상 여지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왜?”
잠시 침묵하던 신지혜가 묘하게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지혜는 인간 남자를 싫어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적이 없다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설마….
“혹시 윤태희….”
긴가민가하던 재겸이 머뭇거리며 운을 띄우자,
“뭔 소리야? 관심 없어.”
신지혜가 곧바로 정색하며 재겸의 말을 잘랐다.
“그, 근데 왜 윤태희한테 ‘자기’라고 부르는 거야?”
“난 원래 다 자기라고 불러. 일주일만 놀고 버릴 건데, 이름 외우기 귀찮으니까.”
“…….”
“아무튼 관심 없으니까 걱정 마. 걔랑 너랑 그거인 거 아니까.”
“그… 그거라니?”
신지혜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들더니, 검지와 중지를 교차해 보였다.
“둘이 눈 맞았잖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재겸은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귀에 열기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윤태희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아니야. 걔 혼자 그러는 거야.”
재겸은 난색을 보이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나, 나는 걔처럼 남색가도 아니고….”
재겸의 변명에 신지혜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윤태희와 며칠간 데이트를 한 입장에서, 신지혜는 진작부터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스파크가 튀는 느낌. 한쪽만 일방적으로 마음이 있는 관계에서는 절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재겸 또한 윤태희를 의식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지난 며칠간 윤태희는 저에게 매우 다정했지만, 눈앞의 소년을 대할 때와는 아예 결이 달랐다. 소년 앞에서 윤태희는 필사적이고, 절박했으며, 어딘지 연약한 모습이었다.
신지혜가 기지개를 켜며 말을 늘어뜨렸다.
“그래, 잘들 해 봐라.”
“…….”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던 재겸이 더듬거리며 말을 돌렸다.
“그, 그럼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네가 인어인 걸 모르는 거야?”
“당연히 모르지.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어.”
신지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짝사랑이거든. 나 혼자 몰래 좋아하고 있어. 어차피 이 사랑은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는 사랑이라서. 그래서 지금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왜 이뤄질 수가 없는데?”
“같은 여자니까.”
뭐?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신지혜를 쳐다보았다.
“너도 엊그제 봤잖아. 은경이.”
은경이? 은경이가 누구지?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할 때였다.
“단발머리 여자애 말이야.”
“아….”
그날 멋대로 술자리에 끼어든 재겸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줬던 사람이었다.
“은경이랑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어. 그때부터 가장 친하게 지내는 단짝 친구야. 너무 오랫동안 많은 일을 함께했어. 이젠 그 애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신지혜는 머나먼 바다를 응시했다.
“나는 은경이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곁에 있어 줄 거야.”
재겸은 신지혜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은경이랑 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그건 내 욕심이니까. 하지만 은경이가 없으면 난 안 돼.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사람 쓸개를 먹을 거야.”
어느덧 신지혜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냐면 나는 은경이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래서 은경이가 나중에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날, 두 다리로 가서 은경이의 부케를 받아 줄 거야….”
결국, 신지혜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신지혜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자 재겸은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때, 코를 훌쩍이던 신지혜가 말했다.
“역시 하등한 인간 남자 새끼들은 사람이 앞에서 쳐 울고 있어도 휴지 한 장 갖다 줄 줄을 몰라요. 이래서 인간 남자 새끼들이 싫다니까.”
“…….”
얼어 있던 재겸은 그제야 바지 주머니며 셔츠 앞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눈물을 닦을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진 나머지, 객실 안에 들어가서 휴지를 가져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하던 재겸은 대뜸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이, 이걸로 닦어.”
흰색 반팔 차림이 된 재겸은 입고 있었던 셔츠를 신지혜에게 내밀었다. 똘똘 뭉쳐서 건넨 셔츠를 바라보던 신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웃겨 진짜. 내가 네 옷에 코라도 풀면 어떡하려고?”
셔츠를 건네받은 신지혜가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잠시 신지혜의 눈치를 살피던 재겸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 그래서 그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은 안 했어?”
“당연히 안 했지. 아니, 못 하지. 그걸 어떻게 말해.”
“왜 못 해?”
“동성한테 고백받으면 거부감 드는 게 당연하잖아.”
하긴 그렇긴 했다. 저 역시 윤태희의 마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스럽고 난감했었다. 재겸의 눈에는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신지혜가 아주 어른스럽게 보였다.
반면에 윤태희는 신지혜와 정반대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신지혜와 비교하면 윤태희는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다. 서슴없이 고백을 해대서 툭하면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
그런데, 그 은경이란 사람도 신지혜를 좋아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쨌든 동성끼리라도 서로 좋아할 수는 있는 거니까, 라고 재겸은 불현듯 생각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재겸의 사고방식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만약 내가 고백을 하고, 은경이랑 내 마음이 같아서 연애를 한다고 해도, 거기서 전부 끝나는 게 아니잖아. 끝이 있는 관계니까 언제든지 이별하고 헤어질 수 있는 거야. 나는 은경이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고백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잖어. 만약 그 사람이 네 마음을 받아 주고 너한테 쓸개를 빼주면, 너는 앞으로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고… 그리고 널 사랑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한 친구니까 너한테 쓸개를 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말이라도 해 보는 건 어떻냐고, 밑져야 본전 아니냐며 재겸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러자 코를 훌쩍이던 신지혜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 웃긴다.”
“뭐, 뭐가….”
남의 사랑은 응원해 주면서, 소년은 정작 자신의 사랑에는 인색했다.
“됐어, 어쨌든. 딱히 조언은 바란 건 아닌데, 조언 고마워. 하지만 너는 남 일이니까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 거지. 반대로 생각하면 너도 똑같은 거 아니야?”
그에 재겸이 멈칫하며 신지혜를 쳐다볼 때였다.
“네 말이 맞아. 은경이도 나를 좋아하고, 내 마음을 받아 줘서 나한테 쓸개를 내어 준다면 전부 해결될 문제야. 근데 그건 너랑 자기, 아니. 태희도 마찬가지 아니야?”
신지혜는 윤태희에게 대강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저주를 풀어야 하는 사정이 무엇인지 물으며 불로불사를 끝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냐고 했더니, 윤태희는 저주를 풀지 않아도 삶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있지만, 저주를 풀고 소년이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얘기 들었어. 저주를 풀든 못 풀든 간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찾아 놨다며? 그럼 저주를 풀 필요도 없이, 너도 태희의 마음을 받아 주고 함께 살다가 나중에 죽으면 되잖아.”
“…….”
재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역지사지의 효과는 뛰어났다.
“봐, 이게 말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은경이라는 사람이 신지혜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재겸과 윤태희, 두 사람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신지혜의 말처럼, 재겸이 윤태희의 마음을 받아주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어 앞날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면, 죽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전부 해결될 문제였다.
“하, 하지만… 너랑 나는 상황이 다르잖어.”
“그야 물론 상황은 다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나나 태희나,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선택해 주길 바란다는 거야. 나랑 은경이처럼, 너랑 태희도 똑같은 상황인 거지. 제일 중요한 건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은지 아닌지, 그거니까.”
신지혜가 팔짱을 끼며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너는 태희의 마음을 알고도 안 받아 주면서, 은경이가 내 마음을 받아 주면 전부 해결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면 모순이잖아. 안 그래?”
“…….”
“내가 두려운 건 그거야. 만약 은경이한테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면, 은경이와 나는 전처럼 지낼 수 없을지도 몰라. 거기다가 내가 인어라는 사실을 알린다? 어쩌면 네 말대로 나한테 쓸개를 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엄청난 도박이야.”
“…….”
“쓸개를 주거나, 아니면 나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는 은경이가 나를 떠나고,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태희도 마찬가지인 거야. 네가 떠날까 봐 무서운 거야. 좋아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나는 윤태희가 나한테 정확히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원래는 나한테 바라는 게 없다고 했었어. 그러다가 갑자기 나한테 걸린 저주를 풀고 나중에 죽으라고 한 거야. 지금은 그게 전부고,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어.”
윤태희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언제는 바라는 거 없다며 밥 먹고 차 마시면 된다고 하더니, 또 언제는 두 달 뒤에 죽지 말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으라 하고….
재겸은 윤태희의 마음을 좀처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태희가 너한테 뭘 바라는지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네 마음이야.”
그때, 신지혜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남의 마음을 신경 쓸 게 아니라 네 마음이 어떤지를 생각해야지. 나는 그 사람에게 뭘 바라는지, 앞으로 그 사람과 뭘 어쩌고 싶은지,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멈춘 신지혜가 또렷한 눈으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넌 태희 어떤데?”
단도직입으로 날아든 시원시원한 질문에, 재겸이 멈칫 굳을 때였다.
“태희 좋아해?”
신지혜가 보다 확실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싫, 싫지는 않어. 근데 나는….”
“그런 게 어딨니? 뒷말도 필요 없어.”
신지혜가 인상을 쓰며 딱 잘라 말했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둘 중에 정하는 거지.”
엄격한 양자택일에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
잠시 주저하던 재겸이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 건데?”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냐니? 그건 그냥 아는 거야.”
“사실 나는 누굴 좋아한다는 게 뭔지 잘 몰라.”
작게 중얼거리던 재겸이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
“누구를 좋아하거나 사랑해 본 적이 없었어.”
신지혜는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소년의 짧은 머리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는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면서, 알맹이는 그대로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어리다는 소리야.”
웃음을 흘리며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신지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직은 혼란스럽고 헷갈릴 수 있어. 하지만 각오는 해 둬.”
흔들림 없이 또렷한 눈동자가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헷갈리지 않는 순간이 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