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99)화 (199/348)

#199

“독채로 쓸게요.”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윤태희 멋대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재겸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재겸은 윤태희가 한방을 쓰자고 하면 어쩌나 내심 신경이 쓰였던 참이다.

당연히 한방을 쓰느니 방이 두 개인 독채로 가서 널찍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게다가 각자 방 하나씩 쓰는 편이 훨씬 편할 거고, 남의 눈치 안 보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황토집까지 안내해 주겠다며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재겸과 윤태희는 주인집 할머니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경사진 골목을 올라갔다. 돌담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담벼락 너머로 황토로 지은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칠이 반쯤 벗겨진 양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낡긴 혔는디 지낼 만할 것이여.”

노인이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나무와 흙으로 지은 아담한 시골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옛 정취가 물씬 풍겼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낡고 오래된 집이었지만 주기적으로 보수를 하였는지 관리가 제법 잘 되어 있었고, 허물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성인 어깨높이만 한 돌담, 마당 한가운데 놓인 널찍한 평상, 햇살이 잘 내리쬐는 마당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 그 옆에는 갖가지 채소를 심어놓은 작은 텃밭도 보였다.

이런 집은 실로 오래간만이라, 재겸은 묘한 향수를 느꼈다.

노인은 필요한 게 있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는 말을 남겨놓고 주인집으로 돌아갔다. 식사는 때가 되면 주인집에 내려가서 먹기로 했다. 재겸과 윤태희는 마루에 짐가방을 내려놓고 집 내부를 살펴보았다. 창호지 문을 덜컹 열자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작은 마루가 나왔다. 안방과 작은 방은 마루를 사이에 놓고 마주 보는 형태로 있었다.

“세탁기도 있네.”

화장실 문을 열어보던 윤태희가 말했다.

“테레비도 있어.”

안방을 들여다보던 재겸도 목소리를 냈다.

“있을 건 다 있네.”

집 구경을 마친 두 사람은 툇마루로 나와서 털썩 앉았다.

경사진 언덕에 있는 집은 지대가 높아서 마루에 앉아 있어도 선착장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적하고 나른한 정경이었다. 그에 두 사람은 멍하니 풍경을 눈에 담았다.

모처럼 여백의 시간이었다.

신지혜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윤태희는 이렇게 편히 쉬어본 적이 얼마 없었고, 재겸 또한 하는 일이라곤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게 전부였기에 이 고요가 퍽 낯설기만 했다.

윤태희는 산책 겸 섬을 한 바퀴 둘러보자고 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재겸은 흔쾌히 윤태희의 뒤를 따라나섰다. 집 뒷마당과 이어지는 언덕을 따라 오솔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꽤 근사한 자연림이 펼쳐졌다.

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걸으며 재겸은 설렁설렁 산책했다. 그런데 이렇게 윤태희와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새로운 사실을 하나를 알게 되었다. 천성이 느긋한 윤태희는 걸음이 꽤 느린 편이었다. 각자 속도대로 걷다 보면 어느샌가 재겸이 훨씬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에 답답해진 재겸은 몇 걸음 뒤에서 걷던 윤태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넌 왜 이렇게 느려 터졌냐? 빨리 좀 걸어.”

뒷짐을 지고 재겸을 따라오던 윤태희가 대답했다.

“이럴 땐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줘야지.”

말이나 못 하면. 재겸은 마뜩잖은 눈으로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하긴 그랬다. 생각해 보니 묘정은 저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는데도 함께 걸을 때면 늘 걸음을 맞춰 주었고, 거리가 벌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서 저를 기다려 주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청신한 숲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편백나무 숲이네.”

그때, 울창한 숲을 둘러보던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재겸이 의외라는 얼굴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너 꽤 잘 안다?”

“어렸을 때 절에서 자랐으니까.”

맞다. 윤태희는 절에서 컸다고 했었다. 절은 대부분 산에 있으니 나무나 꽃에 대해서 잘 알 법도 했다. 재겸은 문득 윤태희가 여태껏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너 그럼 그때 머리도 빡빡 밀었냐?”

엉뚱한 질문에, 윤태희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출가한 건 아니라서 머리는 안 밀었어.”

스님과 똑같은 생활을 했지만, 처사 신분으로 지냈다고 했다.

“그래?”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랫지방이라 그런지 서울보다 기후가 훨씬 온난하여 덥게 느껴졌다. 재겸이 티셔츠를 펄럭거리다가 겉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그에 윤태희가 “주세요.” 했다. 뭘 이런 거까지 대신 들어주려나 싶었지만 재겸은 셔츠를 건넸다. 그러자 윤태희가 셔츠 소매를 쥐더니 재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당황한 재겸이 반사적으로 뒤로 상체를 물릴 때였다.

윤태희가 재겸의 허리에 셔츠 소매를 두르더니 매듭을 묶어주었다. 손에 들고 다니기 성가실까 봐 허리춤에 매어준 것이었다. 재겸이 살짝 굳어 있으니 윤태희가 웃으며 물었다.

“놀랐어?”

“…….”

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울창한 숲길을 지나자, 능선을 따라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아,

어느 순간 재겸의 눈에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야트막한 평지에는 샛노란 달맞이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장관이었다. 무리 지어 자란 들꽃이 들판 가득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수평선과 섬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잔잔한 바다 위로 황혼의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사아아——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따라 꽃이 눕듯이 한 곳으로 흔들렸다.

재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불현듯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이토록 광활한 자연,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순간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늘 똑같은 풍경에 지쳐있던 재겸은 처음 맞닥뜨린 장대한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 깊은 속에서 무언가 샘솟아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생명력’이었다.

‘행복한 일도 다 끝나고 다시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요.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이제 저는 견딜 수 있습니다요. 살아서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습니다요. 때를 기다리면 살아서 좋은 날은 반드시 올 겁니다요.’

언젠가 유남생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살아서 좋은 날이 온다는 것. 재겸은 불현듯 생각했다. 살아서 좋은 날이 있다면 그날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재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흐드러진 꽃밭 속에서 윤태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마주한 채 수평선에 걸쳐져 있는 윤태희는 홀로 고요했다. 재겸은 그런 윤태희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바람에 앞머리가 흩날리며 드러난 이마, 빚은 것처럼 반듯한 얼굴 옆선, 그리고 긴 속눈썹. 재겸은 윤태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 속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광막한 세상 속에 오로지 단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재겸은 문득,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삶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윤태희가 스르륵 눈을 뜨더니 옆에 선 재겸을 바라보았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 윤태희가 슬쩍 허리를 숙이더니 발치에 있는 들꽃 한 송이를 꺾었다.

윤태희가 재겸에게 달맞이꽃 한 송이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널 볼 때마다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해.”

그 순간, 재겸은 심장이 욱씬 조여드는 듯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처음 받아쓰기를 했을 때 윤태희가 냈던 문제 중의 하나였다. 어쩐지 그때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책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멋대로 문제를 낸 게 맞았구나. 걸음이 느린 윤태희는 뭐든지 재겸보다 빨랐다.

윤태희가 꽃줄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안녕? 널 좋아해…….”

윤태희와 재겸 사이를 잇는 한 떨기 들꽃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작게 흔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윤태희는 언제나 제멋대로 문제를 내고, 제멋대로 앞서가서 저의 답을 기다린다.

‘너는 태희의 마음을 알고도 안 받아주면서.’

‘태희는 네가 떠날까 봐 무서운 거야.’

윤태희는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줘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속도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윤태희는 줄곧 내색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열고, 재겸은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양극단에 서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헷갈리지 않는 순간이 올 거야.’

신지혜는 그렇게 말했지만, 재겸은 아직 헷갈렸다. 문득 저 꽃은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재겸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저도 모르게 꽃을 받아 들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받아주지 않기엔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예쁘네….”

재겸은 건네받은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윤태희에게 손을 뻗었다. 윤태희의 귀 옆에 샛노란 달맞이꽃을 꽂았다. 그에 윤태희가 멈칫하더니, 살짝 커진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잠시 굳어 있던 윤태희는 제 귓가에 꽂혀 있던 꽃을 빼더니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손에 든 꽃을 입에 넣고, 그대로 씹어먹기 시작했다.

“미쳤냐? 갑자기 그걸 왜 먹어?”

난데없는 행동에, 재겸이 눈을 번쩍 뜨며 벌컥 목소리를 냈다.

“네가 좋아서.”

어이가 없었다. 가끔 윤태희는 정말이지 미친놈 같다.

“그래서 꽃 먹으니까 좋냐?”

“아니, 쓰고 떫어.”

윤태희가 인상을 쓰며 하관을 움켜쥐었다.

“넌 진짜 이상해.”

나를 좋아해서 꽃을 먹는다는 이상한 애.

“넌 씨발 진짜 등신 새끼야…….”

재겸은 순간 사랑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쓸개를 내어주고,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닿은 꽃을 거리낌 없이 씹어먹는 것.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쓰고 떫은 것. 그것이 바로 윤태희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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