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피워보고 싶다며, 담배…….”
난데없이 다가온 얼굴에 재겸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직접 피워보고 싶다고 한 거지, 직접 연기를 옮겨달라는 게 아니었다. 덜 마른 머리에서 풍기는 축축한 샴푸 향과 담배 냄새가 섞여 어딘지 야릇한 향기가 났다.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며 코끝이 닿을 때였다.
재겸이 홀린 듯이 눈을 내리깔 때였다.
쾅쾅쾅——!
“보소, 총각들. 벌써 자는가?”
그 순간, 대문이 쾅쾅 흔들리며 주인집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재겸이 어깨가 화들짝 튀어 올랐다. 놀란 재겸이 뒤로 몸을 확 물렸다.
재빨리 담뱃불을 꺼트린 윤태희가 대문으로 다가갔다. 대문을 열자, 주인집 할머니가 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술과 간단한 안줏거리가 들어있었다.
노인이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젊은 양반들이 촌구석에서 할 일도 없을 것인디 술이나 한잔허라고.”
노인은 구멍가게에서 팔던 술을 챙겨서 온 모양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 뭘 이런 걸 다 가져오셨어요.”
봉투를 받아든 윤태희가 내용물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담금주는 몸에 좋응께 싹 비워도 돼야.”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편히 주무시고요.”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한 윤태희는 노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던 재겸은 평상에 앉아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윤태희한테 어영부영 끌려가서 하마터면 또 키쓰할 뻔했다. 차라리 할머니가 나타난 게 다행이었다. 재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척 했으나, 귀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술 갖다 주셨는데.”
윤태희가 어떡할까? 하고 묻는 듯한 눈으로 재겸을 돌아보았다.
“뭐… 주, 주셨는데 마셔야지.”
윤태희와 함께 있다 보면 자꾸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지니, 재겸은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고 얼른 취해서 일찍 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근데 나 술 잘 못 하는데.”
“그럼 넌 적당히 마셔.”
재겸은 부엌에 굴러다니던 개다리소반과 술잔을 가져왔다. 평상 정중앙에 소반을 놓고 술상을 차렸다. 가까이 붙어 있느니 둘 사이에 상이라도 놓여있으면 나을 것 같았다. 봉투 안에 든 것은 피처 맥주 두 병과 알 수 없는 약초가 들어있는 담금주, 안주는 반건조 문어포와 김, 다시마 부각이었다.
담금주를 살펴보던 윤태희가 말했다.
“이건 먹으면 그냥 갈 것 같은데… 한 잔씩 가볍게 맛만 볼까?”
하수오 같기도 하고, 더덕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약초로 담근 듯한 담금주는 한눈에 보기에도 도수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일단은 몸에 좋다고 하니 담금주를 한 잔씩 마셔보기로 했다. 술잔에 입술을 붙였던 윤태희가 금세 낯을 찌푸렸다. 재겸도 오만상을 썼다.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뭔 술이 이렇게 쓰냐?”
문턱이 높은 담금주는 잠시 미뤄두고, 우선은 맥주나 마시기로 했다. 재겸은 입에 남은 극악한 쓴맛을 떨쳐내기 위해 서둘러 맥주를 꺼냈다.
“맥주 마셔본 적 있어?”
윤태희의 질문에, 재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에 정주가 마시던 것을 한 번 뺏어서 마셔본 적이 있었다. 물론 무슨 맛으로 먹는지는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아예 못 먹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태희가 맥주를 따라주었다. 곧바로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재겸은 심드렁한 얼굴로 건배를 받아주었다.
재겸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탄산이 식도를 짜릿하게 긁고 내려갔다. 왜인지 그간의 체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속이 후끈거렸다.
둘은 소반을 사이에 두고 술을 홀짝거리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어느 순간, 머나먼 밤바다를 바라보던 재겸이 불쑥 질문을 꺼냈다.
“야. 근데 넌 본관이 어디냐?”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윤태희가 픽 웃었다.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은 오랜만에 듣는다. 윤 노인의 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 글쎄… 파평 윤씨였던가.”
그에 재겸이 심각한 표정을 했다. 파평 윤씨라 하면 조선 시대 때 5명의 왕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던가? 옛날로 따지면 파평 윤씨는 명문 세족이다.
“양반 출신이라 네가 그렇게 걸음이 느린가?”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가 튀자, 윤태희가 황당해했다.
“네? 21세기에 그런 게 어딨어요….”
조용히 웃던 윤태희의 표정에 어느 순간 장난기가 떠올랐다.
“나으리, 쇤네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해괴한 사극 투를 흉내 내며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그에 재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재겸이 곧바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오냐, 이 미천한 놈아. 어디 한 번 주둥이를 놀려 보아라.”
“…….”
윤태희가 웃음을 꾹 참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말씀 올리기 외람되오나 나리께서는 본관이 어디십니까?”
“본관? 나는 족보 없는 상놈이라 그런 거 없다.”
“…….”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윤태희가 표정 관리를 했다.
“아… 몰랐습니다. 나으리는 족보 없는 상놈이셨군요.”
제 입으로 직접 말하긴 했지만 남의 입으로 옮겨 들으니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재겸이 주먹을 쥐고 윤태희의 어깨를 뻑 때렸다. 윤태희가 어깨를 감싸 쥐며 “손이 험하신 걸 보니 정녕 상놈이 맞으시군요….” 했다가 한 대 더 맞았다. 그러다 재겸도 웃겼는지 푸흑, 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뱉었다.
큭큭 웃던 윤태희가 평소의 말투로 되돌아와 물었다.
“진짜로? 본관 몰라?”
“몰라. 길바닥 김 씨야.”
“근데 왜 하필 김 씨를 붙였어?”
“그냥 그땐 김씨가 제일 좋아 보였어.”
“그랬구나.”
재겸도 윤태희도, 그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못한 삶이었다.
“야, 맥주 한 잔 더 줘 봐.”
그때, 재겸이 턱짓을 했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윤태희는 아직도 맥주 반 잔에 머물러 있는데, 재겸은 물처럼 콸콸 마셔대서 벌써 석 잔째 비우고 있었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같은데.”
“너나 잘해.”
재겸은 윤태희의 손에 들린 맥주병을 갈취하듯 뺏었다. 새로 꽉 눌러 담은 맥주잔을 벌컥이던 재겸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차츰 열기가 올랐다.
“하늘에 별이 많네.”
김 한 장을 입에 물고, 재겸은 머나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이지러진 달이 다정하게 빛나는 밤이다. 섬이라 그런지 별이 아주 잘 보였다. 은하수가 쏟아질 듯하고 멀리서 쏴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있잖어. 나 섬에 처음 와 봐.”
다시 맥주를 들이켠 뒤, 재겸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런 데서 살면 근심 걱정 없이 좋겠다.”
양쪽 무릎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술집에서 만취한 재겸을 보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매사에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재겸이 술을 마시면 평소에 비해 말이 훨씬 많아지고, 감정 표현에 좀 더 솔직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재겸은 평소에도 솔직하고 거침없는 편이긴 했으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밀한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았다. 그래서 윤태희는 가끔 저 머리통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이래도 되나 싶은 하루였어.”
쏟아질 듯한 별을 올려다보던 재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코앞에 두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나 무탈하고 평안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모든 할 일을 접어놓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태평하게 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정주의 말대로 ‘휴가’를 온 것 같았다.
나자도, 귀신도, 묘정도, 저주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느낌.
머나먼 섬에 와 있으니 모든 고민과 번뇌에서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윤태희와 함께 머나먼 섬에 틀어박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번 그랬다. 윤태희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났다. 그것이 자꾸만 재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다음에는 메산이와 정주도, 유남생까지 같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이 조용한 곳도 시끌벅적해지겠지.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식구들의 얼굴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러다 끝에 가선,
기어코 묘정 생각이 나는 것이다.
“…….”
맥주잔을 다 비운 재겸은 이번엔 담금주를 한 컵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대로 뒤로 벌러덩 누웠다. 손깍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으니, 슬슬 취기가 올랐다. 머나먼 별빛이 눈을 깜빡이듯이 이따금 점멸하기 시작했다.
스승이랑 팔도를 돌아다녔지만 섬에 오는 건 처음이다. 아주 오래전 묘정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달빛 아래서 수련을 끝내고 풀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별이 무수하게 많았다.
묘정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눈을 꿈뻑거리던 재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묘정도 너처럼 술이 약했는데….”
재겸을 향해 구부정한 등을 내보인 채, 양쪽 무릎에 팔을 걸치고 느슨히 앉아 있던 윤태희가 재겸을 돌아보았다.
“묘정?”
“응, 내 스승이야.”
윤태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소 재겸은 과거에 있었던 일, 특히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던 데다가, 옛날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매번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재겸이 스승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게 취중 진담일 것이다.
“어렸을 때 나도 술을 마셔보고 싶다고 했더니, 묘정이 나가서 탁주 한 동이를 사 왔었어. 술을 마시려면 주도(酒道)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면서….”
추억을 더듬던 재겸의 입술에서 불현듯 웃음이 새었다.
“대작하자고 해놓고 자기가 먼저 곯아떨어졌지.”
묘정은 술이 약해서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눈 밑이 붉어지곤 했는데, 서너 잔 마시고 나면 금세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쥐죽은 듯이 잠을 잤었다.
“…….”
가만히 재겸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윤태희가 쓰러지듯 풀썩 누웠다. 옆으로 누워 재겸을 빤히 바라보던 윤태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뭐지, 나한테 관심 있나.”
밤하늘을 응시하던 재겸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또 뭔 소린가 싶었다. 옆으로 누운 탓에 윤태희의 풍성한 머리칼은 반듯한 이마 위에 흘러내려서 눈을 찌를 듯했다. 윤태희가 눈을 좁혀 뜨며 말했다.
“남색가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를 함부로 막 하네.”
“뭐?”
“일부러 나 질투하라고.”
“…….”
재겸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쟤는 머릿속에 든 게 남색밖에 없나?
이젠 하다 하다 묘정 얘기에 대고 딴지를 건다.
“넌 정신 나간 남색가 새끼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더 욕할 기운도 없었다.
“나 농담으로 말한 거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윤태희의 말을 묵살한 재겸은 손깍지를 풀고 만세를 하듯 팔을 뻗었다. 기지개를 켜자 온몸이 나른해져서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와 닿는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던 재겸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술상을 사이에 두고, 재겸과 윤태희를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웠다.
“질투할 필요 없어.”
재겸이 힘이 풀린 눈을 꿈뻑거리며 윤태희에게 말했다.
“왜?”
상 밑으로 덩그러니 놓인 재겸의 손에, 윤태희가 손끝을 톡 갖다 대며 물었다. 그에 재겸은 맞닿은 서로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묘정은 내 원수니까…….”
재겸이 눈동자를 스르륵 치켜뜨며 윤태희의 눈을 쳐다보았다.
“묘정이 내 부모를 죽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