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깊은 밤이었다.
“켁. 켁.”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들쑤시고 있던 소년이 기침을 뱉었다. 비가 와서 장작이 축축해진 탓인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젖은 장작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자욱하여 눈이 아주 매웠지만, 소년은 가녀린 불씨에 대고 숨을 후후 불어넣었다. 그래야 오늘 밤이 따듯할 것이었다.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렸고, 묘정이 집을 비운 지 이틀째다.
묘정과 휘림이 해후한 이후로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재회한 날을 계기로 다시 왕래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묘정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주일씩 여행을 떠나곤 했다. 여행의 목적인즉슨 지우인 휘림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사이 제법 장성한 티가 났다.
처음에 묘정이 저를 두고 혼자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을 때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저는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언제까지고 어미 새를 뒤쫓는 새끼 새처럼 묘정을 쫓아다니며 모든 일을 함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년은 묘정이 없는 동안 홀로 고독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법을 배웠다.
묘정이 집에 없어도 할 일은 많았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미리 장작도 패놓고,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말려 놓기도 하고, 몰래 마을에 내려가서 잡귀를 떼어 주고 은밀히 쌈짓돈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온종일 이렇게 비가 작신 내리고 있으니, 꼼짝없이 발이 묶인 신세였다.
이 밤이 지나고 나흘 뒤면 묘정이 온다.
어느새 불씨가 제대로 옮겨붙었다. 아궁이에 지펴놓은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안정적으로 타올랐다. 소년은 방에 들어와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누였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부적이나 몇 장 써 놓기로 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소년은 바닥에 엎드려 부적을 그렸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부적을 쓰고 있으려니 몸이 노곤해져서 깜빡 졸기도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붓을 들 때였다.
부스럭….
불현듯 바깥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소년의 시선이 창호지를 덧댄 문으로 향했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산중 깊은 곳에 있는 초가집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근처를 지나던 들짐승이 비를 피하러 잠시 들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혹시, 묘정이 며칠 일찍 돌아온 건가?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소년이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어두운 마당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낯선 인영이 보였다. 묘정이라기엔 체구가 훨씬 작았다. 상대는 짚으로 엮은 비옷을 어깨 위에 걸쳐 입은 채, 머리에는 고깔 모양의 우모를 쓰고 있었다.
처음엔 귀신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소년의 눈동자에 곧바로 경계심이 떠올랐다. 소년은 정체불명의 객을 노려보았다.
“당신누구야?”
소년이 물었다. 그러자 깊게 눌러쓴 우모 아래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객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바로 ‘그 아이’로구나…….”
조그만 혼잣말은 소년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빗소리에 묻혔다. 조용히 미소를 짓던 객은 우모를 슥 들어 올리며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년은 곧바로 손을 뻗어 근처에 있던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어쩐지 기백이 심상치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직감이 섰다.
검을 손에 쥔 소년이 낮게 물었다.
“당신 누구냐고.”
“눈빛이 아주 좋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객이 소년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에 소년의 손이 검집을 철컥, 여는 순간이었다. 처마 밑에 선 객이 우모를 벗으며 말했다.
“되바라진 것을 보아하니 과연 묘정의 제자가 맞아.”
객의 말에, 형형하게 드리웠던 소년의 기세가 멈칫했다.
“…묘정을 알아? 당신 누군데?”
“알다마다. 나는 수향이라 한단다.”
마루에 선 소년을 올려다보며 객이 미소를 지었다.
“묘정의 오랜 벗이지.”
수향은 묘정의 또다른 지우였다.
“그리운 지기를 만나러 왔단다.”
자신을 소개한 객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롱이를 벗으며 마루에 털썩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은 검을 쥔 손을 슬쩍 내렸다. 묘정의 벗이라고 하니 경계심이 한풀 꺾였다.
“묘정은 일을 보러 나가서 지금 이곳에 없어.”
그러자 수향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어긋나다니….”
수향은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소년을 올려다보다가 묘정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다. 며칠 뒤에나 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하자, 수향이 깊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리 어려울 줄이야….”
수향이 허탈하게 웃었다. 수향의 말씨는 아주 부드러웠지만,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해 보였고, 비범한 강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잘은 몰라도 심지가 곧은 인물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천진하지만 심연처럼 깊은 눈빛에서는 무언의 힘이 실려 있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수향에게 일단 초가집 안으로 들어와서 비를 좀 피하라고 했다. 빗줄기가 거셌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그때 가라고 했더니, 수향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소년의 뒤를 따라 방 문턱을 넘었다.
그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던 수향이 물었다.
“헌데, 저기 나무 밑에 밥 한 덩어리가 담긴 주발이 있던데.”
문을 닫던 소년이 “아, 그거?” 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배고픈 객귀들 지나가다가 먹으라고 묘정이 놔둔 거야.”
“…….”
잠시 말이 없던 수향은 혀를 차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굶주린 인간들이 천지이건만….”
소년은 수향에게 물기를 닦을 무명천을 가져다주었다. 수향은 몸가짐과 자세가 무척 발랐으며, 행동 하나하나에서 묘한 격식과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무명천으로 빗물을 닦아내는 사소한 손길에서마저도 예법을 깨우친 반가의 자제라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리 보느냐?”
곁눈질하는 시선을 들켰는지 수향이 물었다.
“아니, 그냥….”
소년이 어색하게 말을 흐릴 때였다. 그때,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던 수향의 눈에 소년이 쓴 부적이 들어왔다. 그에 수향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적을 가리켰다.
“네가 쓴 부적이냐?”
“응.”
“도적불침부(盜賊不侵符)로구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쓰고 있던 부적은 집에 도둑이 들지 못하게 하는 부적으로, 술식이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곧바로 알아보는 것을 보니, 수향 역시 제법 걸출한 귀재임이 틀림 없었다. 하긴 묘정의 친구니까.
“헌데… 경면주사만 쓴 것이 아니구나.”
부적을 바라보던 수향이 어느 순간 눈썹을 모았다.
“어떻게 알았어? 피를 좀 섞었어.”
“피? 누구의 피를 섞었단 말이냐?”
“내 피. 원래 피를 섞으면 부적이 더 강해지잖아.”
“…….”
부적을 바라보던 수향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떴다. 순간 수향의 눈동자 위로 경멸과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묘정이 그러든?”
“아니, 그냥 나 혼자 깨쳤어.”
잠시 말이 없던 수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부적을 술술 쓰다니 훌륭하구나.”
갑자기 날아든 칭찬에 소년은 내심 쑥스러워졌다. 얼마간 말없이 목 뒤를 매만지던 소년은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해서 괜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러자 수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인간을 수호하는 나자란다.”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소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확히 말하면 나자였지. 지금은 나례청이 해산했으니 말이다.”
마침내 소년의 눈빛이 일변했다.
“이곳에서 나가.”
수향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응?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냐?”
수향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에 어느덧 희미한 적개심이 실려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묘정이 해 줬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자 따위와 상종하고 싶지 않아.”
소년의 대답에, 수향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자를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수향이 물었다.
“연유가 무엇이냐?”
소년은 언젠가 묘정이 제게 해 주었던 말을 고스란히 옮겨 주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무자비하고 잔혹하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선하고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자기 자식마저 제물로 바치는 인간이 바로 나자다.’
소년의 말에, 수향은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왜 웃지? 소년은 점점 기분이 불쾌해졌다.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수향을 노려볼 때였다.
“허면, 네 스승과도 상종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묘정도 나자였으니까 말이야.”
뭐? 소년이 눈을 커다랗게 뜰 때였다.
“설마 그것조차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소년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이자 수향이 알 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뜨고 얼마간 소년을 응시하던 수향이 조용히 혀를 찼다.
“어리석은 것….”
누구를 겨냥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소년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묘정은 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고, 과거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곧장 말을 돌리곤 했으므로, 소년은 묘정과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묘정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소년은 불현듯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묘정이 나자였다니… 본인도 나자였으면서 왜 나자에 대해서 안좋게 말을 한 걸까? 무엇보다 본인이 나자였다는 사실을 어째서 말해 주지 않은 거지?
그때, 수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정을 너무 믿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