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그때, 수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정을 너무 믿지 말거라.”
소년이 멈칫하며 수향을 바라보았다.
“…….”
그래도 묘정이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또렷한 눈으로 수향을 노려보았다.
“묘정의 친구라고 했으면서 왜 묘정을 믿지 말라고 하는 거야?”
“오랜 벗이니 그만큼 묘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웃기네. 오늘 처음 만난 당신을 믿을 바엔 내 스승을 믿겠어.”
소년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자, 수향이 미소를 지었다.
“해서, 넌 묘정의 무엇을 믿느냐?”
“뭐?”
“묘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묘정을 믿는다?”
수향은 방금 소년의 마음속에 생겨난 실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하며 묘정을 믿고 따르면서도 아는 것은 없으니,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소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의구심과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수향은 노련하게 그 균열을 파고들었다.
“묘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다. 묘정이 네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느냐?”
“…….”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초대도 없이 찾아온 때아닌 밤중의 불청객은 사정없이 소년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수향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쐐기를 박았다.
“너는 묘정에게 정인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그 순간, 소년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그런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뭐?”
“거 보아라, 너는 묘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
소년의 동요를 알아차린 수향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묘정은 오랜 세월 마음에 품은 정인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 하고자 결심이 선다면, 묘정은 훗날 너를 버리고 그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소년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안 그래도 소년은 언젠가 묘정에게 저를 떠나 혼인도 하고, 애도 낳고 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묘정은 그럴 일이 없다고 했었다.
‘나는 평생 혼인할 일이 없으니, 어리석은 우리 제자는 허튼 생각 말고 이 스승님의 수발을 들도록 하여라. 나는 평생 네게 금이야 옥이야 수발을 받다가 네가 끌어주는 상여를 타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묘정은 나랑 평생 함께 살겠다고 했어.”
잠시 말이 없던 수향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애초에 묘정이 너를 왜 거두었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느냐?”
소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묘정이 저를 거둔 이유. 그 질문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소년을 괴롭혀 왔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언젠가 묘정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나름의 해답을 얻은 상태였다.
‘겸아, 인연이란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연이란다. 꽃잎 한 장이 땅 위에 떨어지는 사소한 일조차도 인연이 빚어낸 결과지.’
“묘정과 나는 인연이 닿아 있으니까.”
묘정과 내가 만난 이유는 우리가 인연이기 때문이다.
“꽤 그럴싸한 대답이구나. 허나…….”
수향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혹, 인연 중에 악연도 있다는 것을 아느냐?”
소년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어쨌든 묘정이 나를 두고 떠날 일은 없어. 묘정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화 한 번 낸 적이 없어. 그리고 묘정은 언제나 나를 위해서…….”
그때, 수향이 소년의 말을 자르며 고요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묘정이 왜 너를 거두었는지 안다.”
마침내 소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나를 거둔 이유가 뭔데?”
“그냥 알려줄 순 없지.”
수향이 능청스레 웃으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네가 무엇을 해도 묘정이 네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겠다.”
“……”
“허면, 나와 내기라도 해보겠느냐?”
“…뭐?”
“정녕 네 말이 맞는지, 어디 한 번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수향의 날카로운 눈이 소년의 앳된 낯을 샅샅이 훑었다.
“진정 네 말이 맞다면 묘정이 너를 거둔 이유를 알려주마.”
***
수향이 떠나고, 홀로 남은 소년은 잠자리에 들었다.
수향이 떠나고 나서야 계속 긴장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신경이 곤두선 탓에 어깨와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수향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혹여라도 자고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했으나, 다행히 수향은 금세 자리를 떴다. 빗길 속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
어둑한 방 안에서 몸을 뒤척이던 소년은 수향과 나눈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나와 내기를 하겠느냐? 정녕 네 말이 맞는지 어디 한 번 증명해 보거라. 네 말이 맞다면 묘정이 너를 거둔 이유를 알려주도록 하겠다.’
‘…내기라니,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야?’
‘혹, 묘정이 아끼는 물건이 있느냐?’
‘…아끼는 물건?’
수향은 장난을 꾸미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소곤거렸다.
‘그래, 평소 손도 못 대게 할 정도로 감싸고 도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한 번 숨겨보자꾸나. 네가 무엇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으니, 네 말대로 묘정이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으면 네가 이긴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것이 있었다. 언젠가 휘림이 묘정을 찾아왔을 때 건네주었던 행낭이었다.
저번 날 휘림은 묘정에게 맡겨두었던 물건을 돌려주겠다며 낡은 행낭을 하나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 행낭 안에는 희귀한 물건이 많았다. 묘정에게 물려받은 활도 그때 받은 것이고 하늘을 난다는 귀마, 비마(飛馬)를 불러낸다는 마패도 있었으며, 그밖에도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이 많았다. 헌데 그중 딱 하나. 베일에 싸인 정체 모를 물건이 있었다.
그건 보자기로 둘둘 싸서 말아놓은 물건이었다. 그게 어떤 물건인지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묘정이 열어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관심을 보였더니 묘정은 작은 자개함을 구해와서는 그 안에 물건을 넣고 부적을 붙여 봉인까지 해두었다. 대체 뭐길래 보여주지도 않느냐고 떼를 썼지만, 묘정은 별것 아니라는 말로 소년의 호기심을 밀어냈었다.
묘정에게 정인이 있다고 했으니, 혹시 정인이 준 물건인 걸까….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마음이 서거든, 그걸 들고 사흘 뒤 자시에 산 너머 서낭당 앞으로 나오렴. 내가 물건을 맡아두고 있다가 묘정이 돌아오면 너와 작당을 했노라 사실대로 털어놓고 물건을 돌려주도록 하겠다.
수향의 제안한 내기인즉슨, 묘정이 아끼는 물건을 숨겨 묘정을 시험해보자는 것이었다. 묘정이 화를 내지 않는다면 소년의 승리였다.
“…….”
그것은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제안이었다.
소년은 불현듯 가슴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게 왜 묘정은 내게 아무 이야기도 해주질 않아서 저를 이런 시험에 들도록 만드는가, 내심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것은 묘정을 시험하는 일인 동시에 소년 자신이 제 스스로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묘정은 대체 왜 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걸까? 나는 모든 걸 알려줬는데 묘정은 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까? 나자였다는 걸 왜 숨긴 거지?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한 정인이 있다고 왜 얘기해주지 않았지? 묘정은 대체 왜 나를 거뒀나…….
저를 거둔 뚜렷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 까닭이 몹시 궁금해졌다.
아무렴 묘정이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무용했다. 또다시 마음이 금세 흔들렸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그 ‘이유’는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민이 이어졌다.
사실은, 언젠가부터 소년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불씨가 있었다.
수향은 소년조차 스스로 알아보지 못하고 꼭꼭 숨겨두었던 불씨에 숨을 불어넣고 불을 지폈다. 그렇게 힘을 얻은 불씨는 어느새 뱀처럼 똬리를 틀고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불씨란 바로 묘정을 향한 ‘불신’이었다.
“사흘 뒤 서낭당…….”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소년은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사흘의 시간은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지난 사흘 간 소년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했다. 묘정을 믿어야 한다고, 묘정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지난 사정을 털어놓으며 직접 물어보자고 생각하면서도, 묘정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또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다.
아직 결심이 서지도 않았는데 수향과 서낭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고민 끝에 일단은 작은 행낭 안에 묘정의 물건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동그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이었다.
산 고개를 지나 서낭당에 도착하니 커다란 신목(神木)에 걸린 오방색의 천자락이 휘장처럼 드리워 있었다. 잘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돌무더기도 곳곳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오며 가며 치성을 드리고 손을 빈 흔적이었다. 서낭당은 신격을 모신 곳인 만큼 묵직하고도 차분한 기운이 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년이 손에 쥔 땀을 문질러 닦으며 주변을 살필 때였다.
“왔구나.”
서낭당 뒤편에서 수향이 기척 없이 슥 모습을 드러냈다. 갓을 쓰고 점잖은 도포 차림을 한 채 나타난 수향이 만족스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이 선 모양이구나. 물건은 가지고 왔느냐?”
소년은 대답 없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밤이 지나면 묘정이 돌아올 테지.”
수향이 뒷짐을 지더니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운 지기를 만나볼 생각에 모처럼 가슴이 설레는구나. 나도 묘정을 본 지가 오래되었어. 물건은 잃어버렸다고 하거라. 그리고 내가 내일 물건을 들고 나타난다면, 아마도 묘정은 깜짝 놀랄 테지. 어쩌면 나보다도 아끼던 물건이 돌아온 것을 더 반길지도 모르겠구나.”
소년은 등에 짊어진 행낭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차피 묘정이 직접 부적까지 써서 봉인을 걸어두었으니, 수향에게 하루 동안 자개함을 맡기더라도 안을 열어보거나 물건을 망가트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리 주렴.”
수향이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
소년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도 마음의 결심이 서지 않았다. 묘정이 저를 거둔 이유가 뭘까 나흘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문득,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까닭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저를 거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 내심 두렵기도 했다. 이유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어쨌든 묘정이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해 주었고, 설사 세월이 흘러 마음이 바뀌어서 저를 떠나 정인의 곁으로 가서 가족을 꾸린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음 아프고 섭섭한 일이지만, 묘정의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아니야.”
행낭 끈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제법 의연한 결심을 내렸다.
“마음이 섰어. 그냥 없던 일로 하겠어.”
마침내 소년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