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마음이 섰어. 그냥 없던 일로 하겠어.”
소년은 마침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줄곧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수향이 서서히 웃음기를 지웠다.
“…….”
어느덧 이를 데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된 수향이 소년을 싸늘하게 응시할 때였다. 소년이 어깨에 멘 행낭 끈을 단단히 고쳐 쥐며 말했다.
“묘정이 오면 직접 물어볼 거야. 만약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묘정은 나와 평생 함께 살겠다고 했어. 나는 그 말이면 충분해.”
수향이 천천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비틀린 표정이었다. 수향은 소년을 향해 내민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이거 참 눈물겹구나.”
수향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돌이킬 수 없겠지. 그래도 여기까지 끌어낸 것이 용한 셈이었다. 이대로 놓아줄 순 없었다.
“아주 충직한 개가 따로 없어.”
소년은 수향의 빈정거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용건이 사라졌으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수향이 근처에 내려온 나뭇가지로 손을 뻗었다. 제법 굵은 가지였는데도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손에 쥔 수향이 기척 없이 다가와 소년의 목을 겨누었다.
“…….”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힐끔, 눈동자를 굴려 목에 겨눠진 나뭇가지에 시선을 주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나뭇가지에는 아주 잘 단련된 귀기가 실려 있었다.
“뭐하자는 거야?”
귀기를 실은 나뭇가지를 목에 겨누었으니 잘 벼려진 검을 겨눈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향의 태도가 난데없이 돌변했음에도 소년은 두려워하지도, 딱히 놀라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에 수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묻잖아. 지금 뭐하자는 짓거리냐고.”
“보면 모르겠느냐? 너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뜻이지.”
소년이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째서?”
수향은 별다른 대답 없이 부드럽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묘정의 벗이라고 했으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마침내 소년이 살벌한 눈빛으로 수향을 노려보았다.
“내 소중한 벗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니, 바른길로 인도해 주려는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길? 수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년이 눈가를 구길 때였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까.”
수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잘못된 믿음은 사람을 아둔하게 하고, 사특한 신념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묘정이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을 등지게 된 것은 너 같은 버러지에게 미혹당하여 우둔해진 탓이다.”
작게 중얼거리던 수향이 소년을 향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오더니, 소년의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아주 무례하고도 과격한 손길이었다.
불시에 다가온 손길에, 소년은 피할 겨를도 없이 서낭당 앞에 쌓여있던 돌무더기를 쓰러트리며 넘어졌다. 돌에 몸이 긁힌 탓에 살갗이 쓰라렸다. 수향은 돌무더기 위에 넘어져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수향의 스산한 눈동자가 소년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수향의 낯에는 짙은 혐오감과 경멸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때, 수향이 귀기 실린 나뭇가지로 행낭 끈을 툭 잘라냈다.
“이건 내가 가져가마.”
공격해 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뜻밖에도 수향이 노린 것은 행낭이었다.
어젯밤, 묘정과 소년의 집을 찾아갔을 때 소년은 하필이면 도적불침부를 쓰고 있었다. 도적불침부는 집에 도둑이 드는 것을 예방하는 부적으로, 소년의 피가 섞인 탓에 강력했다.
그 상황에서 강제로 물건을 빼앗거나 갈취했다간 그대로 살을 맞거나 액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게다가 소년을 억누를 수 있는 이는 오직 묘정뿐이었으므로,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부러 집 밖으로 유인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틈을 노려야 했다.
“무슨 짓이야. 내놔.”
행낭을 빼앗기자, 소년의 등 뒤에서 살기 어린 귀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귀기에는 붉은색이 섞여 있었다. 수향에게 성큼성큼 다가설 때였다.
“내놓으라고. 죽여버리기 전에.”
수향이 나뭇가지를 휙 집어 던지더니 대뜸 도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생각해 보니, 내 손에 너 같은 것의 더러운 피를 묻히고 싶진 않구나.”
수향이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짚으로 엮은 제웅이었다. 그가 꺼낸 짚인형은 총 세 개로,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수향은 제웅에 부적을 붙이더니 뭐라 주문을 외우며 제웅을 흙바닥 위로 휙 내던졌다. 손바닥만 하던 제웅은 땅에 닿자마자 꿈틀거리며 몸집을 불리더니, 순식간에 우람한 장정의 모습으로 변했다. 짚인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장한 병사가 나타났다.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난생처음 보는 요사한 광경에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그때, 제웅 병사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고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놀란 것도 잠시, 소년이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수향과 마찬가지로, 근처에 내려온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있는 힘껏 귀기를 실었다. 쏜살같이 날아든 병사의 검을 나뭇가지로 튕겨내듯 막아냈다.
수향은 눈매를 갸름하게 좁힌 채 병사들의 전세를 관망했다. 그때, 소년의 나뭇가지와 병사들의 검이 한 번 더 부딪쳤다. 제웅 병사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단숨에 잘려나갔다.
수향이 낯이 덜컥 굳었다.
‘과연 괴물이구나.’
저쪽의 귀기가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이지가 없는 제웅 병사들은 무기를 잃고 우왕좌왕했다.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붉은 귀기를 너울거리며 나뭇가지를 크게 휘둘러 한 번에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뎅강 잘려나간 병사들의 머리가 데구르르 떨어졌다. 흙바닥을 나뒹구는 것은 사람의 머리였으나 출혈은 없었다. 잘린 목 안에는 지푸라기가 빼곡했다.
목이 날아간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내놔.”
소년은 손에 쥔 나뭇가지를 고쳐잡으며 수향을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
소년의 등 뒤에서 붉은 귀기가 험악한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소년이 수향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수향이 멈칫하며 딱딱하게 낯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때였다. 소년이 대뜸 낯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쓰러져 있던 병사들이 꿈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썅. 뭐야.”
제웅의 기척을 느낀 소년이 시선을 딴 데로 돌린 사이, 수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휘둘렀다. 귀기로 일으킨 거센 바람이 소년을 덮쳤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날아든 난데없는 강풍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소년이 붕 날아가듯 쿠당탕, 굴러서 넘어졌다.
수향이 소년을 날려 보낸 방향은 서낭당 안쪽이었다.
서낭당의 당(堂)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문 대신 흰색 종이와 오방색으로 된 헝겊 조각을 묶어 놓은 금줄이 쳐져 있었다. 금(禁)줄이란 새끼줄을 꼬아 만든 것으로, 부정한 것을 막고 털어내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금줄은 신성한 결계이자, 정결한 영역에 대한 ‘금기’의 일종이었다.
금줄을 끊으며 제단 안으로 자빠진 소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갑자기 다리 힘이 풀리며 서 있기가 힘들었다. 이상했다. 금줄을 끊고 이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현기증이 일었다. 바윗덩이만 한 커다란 힘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소년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마침내 수향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소년을 서낭당, 그중에서도 산에 있는 서낭당으로 불러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만일의 상황이 일어날 때 소년을 억누르기 쉬우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예상대로였다.
서낭당은 흔히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이 자리 잡은 공간이지만, 산에 있는 서낭당은 그보다 더 높은 신격인 산신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부정한 것이 금줄을 끊고 신의 공간을 침범했으니 저렇게 압제당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속엣말을 삼키며 수향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소년은 아직 제 안에 깃든 존재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아, 으… 흐윽….”
원인 모를 고통이 엄습했다.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던 소년이 머리를 감싸 쥐며 끙끙 신음을 뱉었다. 붉은 귀기가 불안정하게 너울거리기 시작하더니, 눈에 피눈물이 차올랐다.
어느 순간, 검은자위가 뒤로 스르륵 돌아가더니 소년이 저주를 퍼부었다.
“찢어 죽이리라! 내 반드시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던 소년이 비틀거리며 울컥, 피를 토했다. 소년은 어느덧 흰자위만 남은 섬뜩한 눈으로 수향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잔뜩 핏발이 선 눈은 몹시 기괴했다.
“너는 훗날 네 후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소년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고, 시간이 갈수록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쿨럭쿨럭, 정신없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져 땅을 긁었다. 눈과 코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소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기필코 그리해주마…….”
소년의 진력이 다 할 때까지 기다리던 수향은 어느 순간, 소년의 뒷덜미를 휙 집어 들더니 당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당 안에서 괴로워하며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던 소년과 달리 수향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소년은 덫에 걸려 다친 짐승처럼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왔다. 수향은 소년의 가슴팍 언저리를 발로 콱 짓밟으며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금기를 깬 반동으로, 소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넘겨 주었으니, 묘정이 너를 거둔 이유를 알려주마.”
수향이 소년의 뺨을 콱 잡아 쥐며 저를 보도록 했다. 당을 벗어나자, 줄곧 흐릿하던 소년의 눈에 점차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흰자위만 보이던 섬뜩한 눈이 원래대로 자리를 잡을 때였다. 마침내 또렷하게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수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묘정이 네 부모를 죽였다.”
난데없는 말에, 소년의 눈이 커졌다.
“네 부모는 죄인이었다. 너는 죄인의 아들이며, 원래는 네 부모와 함께 죽었어야 했지.”
소년이 반쯤 입을 벌린 채 수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뭐?”
“나는 자비를 말했으나 묘정은 자비 따위 없었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라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인 너를 찾아내서 죽이고자 했지.”
싸늘한 낯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수향이 말했다.
“그, 그게… 무, 무슨 말이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범람하는 잔혹한 이야기에, 소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소년은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때가 되면 죽일 생각으로 너를 곁에 둔 것이다.”
끝내 아찔한 추락감이 들면서 시야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서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누군가가 칼로 명치를 도려내는 듯했다.
“묘정이 스스로 나자였던 사실을 숨기고, 네가 나자를 멀리하게끔 만든 이유는 혹시라도 네가 다른 나자를 만나서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게 될까 우려하여 계략을 꾸민 것이지.”
수향이 삐뚜름히 입술을 끌어올리며 덧붙였다.
“알겠느냐? 이것이 너와 묘정의 ‘인연’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