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07)화 (207/348)

#207

“윤태희.”

밤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재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 속이지 마.”

“…….”

“아니, 속여도 상관없어. 속일 거면 들키지만 마.”

“…….”

윤태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절대로 속이지 말라. 단호한 경고 같으면서도 쓸쓸한 부탁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숨기는 것과 속이는 것의 차이’를 떠올리는 인간이었다.

윤태희는 말없이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살짝 마른 듯한 등. 불거져 나온 날개뼈. 사슴처럼 긴 목.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

“…….”

누워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품 안에 무릎을 세워 안고, 양팔로 가볍게 둘러 안았다. 머나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 무수한 별빛이 아름답게 흩뿌려져 있었다.

심연을 닮은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토록 짧은 순간에도 윤태희는 빠져나갈 구멍을 계산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지, 실리를 따져보았다. 한순간 동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윤태희는 순간의 감성에 휘둘리지 않았다.

윤태희는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불현듯 시선을 돌리니, 재겸은 잠이 든 건지 저를 등지고 누운 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자니?”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재겸은 묵묵부답이었다.

“…….”

윤태희는 손바닥으로 평상을 짚으며 재겸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재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듯, 빼꼼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울어?”

재겸이 험악한 표정으로 도끼눈을 떴다.

“씨발 울긴 누가 울어.”

생생한 반응에, 윤태희의 얼굴이 확 흐트러졌다.

“네? 아니 왜 갑자기 욕을….”

윤태희가 푸스스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흐렸다. 그에 험악한 낯으로 윤태희를 흘겨보던 재겸이 입술을 짓씹었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했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윤태희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묘정에 관한 기억으로 잠시 울적해졌던 기분이 금세 휘발되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감정의 허들이 평소보다 훨씬 낮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흠. 재겸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다시 윤태희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급격히 취기가 올랐다.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웃던 윤태희는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술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을 정리한 뒤 평상으로 돌아온 윤태희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서 잘까?”

그 사이, 깜빡 졸았던 재겸이 귀를 긁적거리며 웅얼거렸다.

“난 그냥 여기서 잘래.”

파도 소리도 좋고, 날도 선선해서 바깥에서 노숙하기 딱이었다.

“이제 쌀쌀해져서 안 돼.”

“안 쌀쌀해.”

취기에 잠긴 재겸이 귀찮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올리더니, 재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어르신.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재겸이 살벌한 낯으로 눈을 치켜떴다.

“뭐? 어르신?”

“얼으신… 얼으시니까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재겸이 윤태희의 손을 떨쳐내며 몸을 돌렸다.

“싫어. 여기서 잘 거라고.”

“왜 자꾸 고집을 부리지?”

윤태희가 평상을 짚고 재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마에 쪽, 입술을 맞췄다. 재겸이 움찔할 때였다. 윤태희가 이어서 입술을 반쯤 벌리더니 재겸의 이마를 야금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살갗에 이가 박히는 느낌이 왠지 묘해서, 재겸은 고개를 홱 옆으로 뺐다.

“이젠 아주 그냥 네 맘이냐?”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으며 옆으로 스르륵 누웠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자야겠다.”

“뭐?”

재겸이 낯을 구기며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자면 불편할 거다. 구태여 좁은 평상 위에서 같이 누워서 잘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야, 넌 들어가서 자.”

“왜?”

“너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바깥에서 재우자니 내심 신경이 쓰였다.

“입은 저만 있나요?”

공손하고 싸가지 없는 대꾸에, 재겸의 눈꼬리에 날이 섰다.

하여간 씨발 말을 해도 꼭….

“좋은 말로 할 때 방구석에 들어가서 자라.”

“왜? 남색가랑 같이 자려니까 불편해?”

재겸이 멈칫했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지만 일단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넌 몸뚱이가 약해빠졌잖어.”

재겸이 매우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 여기서 자면 풍 와.”

풍? 머리를 비스듬히 괴고 있던 윤태희가 팔에 얼굴을 묻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에 재겸이 인상을 쓰며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왜 웃어?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 같냐? 진짜야.”

재겸은 윤태희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오래전, 어느 마을에 갔다가 입 돌아간 사람을 보았던 일화를 얘기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가만히 되짚어 보다가, 재겸의 머릿속에 번쩍 섬광이 스쳤다. 아, 예전에 꿈에서 이런 상황을 겪었다. 그때 꿈속에서 윤태희한테 똑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윤태희가 꿈에 나왔었고,

‘매일 네 꿈을 꿨어…….’

덩달아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야.”

먼저 운을 띄워놓고도, 재겸은 이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윤태희는 재촉하지 않고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재겸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왜 좋냐?”

술주정처럼, 흘리듯이 나온 질문이었다. 그에 밤하늘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멈칫했다. 잠시 굳었던 윤태희가 재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

돌아누운 등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나 사랑한다며.”

돌이켜보면 특별히 잘해준 기억은 없었다. 얼굴만 맞대면 허구한 날 주먹질하고 욕하고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빴다. 그래서 재겸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네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너는 내 뭐가 좋은지. 그리고 내 마음이 뭔지, 왜 네가 날 속이지 않았으면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었어. 그래서 나한텐 네가 너무 이상해.”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소년은 이후 삶을 비관하며 오랫동안 속세를 등지고 살았다. 사람이 지나는 길은 피해 다녔고,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를 적대하고 증오하며 살았다. 사람이고 귀신이고 전부 다 싫었다. 귀재고 범인이고 누가 됐든지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이 지옥 같아서 누구에게든 정을 주지도, 받지도 못했다.

“너는 날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술주정이라 자각은 하면서도, 재겸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꾸 아팠어. 그래서 알았어.”

윤태희가 한참 만에 조용히 대답했다.

자꾸 아팠어. 그래서 알았어.

자꾸 아팠어. 그래서 앓았어.

재겸은 곰곰이 말을 곱씹었다. 알았다. 앓았다. 정확히 어느 쪽인지 헷갈렸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긴가민가했다. 그건 그냥 아는 거라고, 신지혜가 해주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대답인 듯했다

“…….”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어느 순간, 불쑥 입을 열었다.

“연락할 거냐?”

“뭐를?”

“할머니가 번호 알려줬잖어.”

재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화제가 튀어나오자 윤태희는 멈칫했다. 재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윤태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신경 쓰였어?”

그에 재겸의 등이 살짝 움찔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까칠하게 대꾸했다.

“토 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안 해요. 왜 해요.”

그러자 윤태희가 얌전히 대답을 꺼내놓았다.

“할머니가 연락 꼭 하라고 그랬잖어.”

“젊은 남자니까 괜히 그러시는 거 같은데.”

태평한 말에, 재겸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어. 너한테만 했지.”

“그건 내가 연상 좋아한다고 그래서.”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다.

“그게 아니라 네가 마음에 든 거야.”

윤태희가 별 감흥이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가. 내가 왜 마음에 들었을까….”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거야 네가 잘생겼으니까 그런 거지.”

순간, 윤태희의 단정한 손끝이 짧게 꿈틀했다.

“…….”

재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되새기듯이, 혹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잠깐 사이에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윤태희는 평상을 짚고 상체를 기울이더니,

“나 잘생겼어?”

재겸을 향해 고개를 빼꼼 기울이며 물었다.

“…뭐?”

재겸은 떨떠름한 낯으로 시야에 침입한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뭘 또 물어.

언짢은 기색을 비치던 재겸은 윤태희를 향해 돌아누웠다. 윤태희와 정면으로 마주한 재겸이 무표정한 낯으로 불쑥 손을 뻗었다. 윤태희의 턱을 가볍게 잡고, 윤태희의 얼굴을 양옆으로 홱, 홱,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사람처럼, 꼼꼼히 따져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검사를 마친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뒤지게 잘생겼어.”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재겸은 ‘됐냐?’ 하는 표정으로 윤태희의 턱에서 손을 떼더니, 양팔을 베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편하게 누웠다.

“…….”

멍하니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픽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윤태희도 재겸을 따라 누웠다.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말없이 이지러진 달을 올려다보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야,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키스해 줄래?”

재겸이 슬쩍 가자미눈을 뜨고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마치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라 윤태희가 피식 웃었다.

쏴아아——

멀리서 풀벌레가 울고,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선선한 바람결에 다가오는 계절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재겸의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짙은 밤하늘을 감상하던 윤태희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윤태희가 스르륵 눈을 떴다. 곁에서 기척을 느낀 탓이었다. 팔 하나 떨어진 거리에 나란히 누워 있던 재겸이 문득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왜?”

잠든 줄 알았는데, 화장실에 가려나 싶었다.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바른 자세로 앉은 재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재겸이 평상을 손으로 짚더니, 윤태희의 몸 위에 올라탔다.

“…….”

순간,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윤태희의 허리춤에 올라앉은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태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양손으로 윤태희의 머리칼을 헤집듯 움켜쥐었다.

재겸이 눈을 반쯤 감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

마침내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일 때였다.

“뭐 해.”

재겸이 눈을 반쯤 내리뜬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뭐?”

“키쓰해 달라며.”

코끝이 닿은 순간,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 감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