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안녕.”
윤태희가 안경을 콧대로 내리며 다정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평상에 걸터앉아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스르르, 쓰러지듯 옆으로 몸을 누였다. 모로 누운 자세에서 물끄러미 재겸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쪽 뺨에 볼우물이 생겼다. 환한 아침 햇볕 속에 있는 윤태희는 나른해 보였다.
“잘 잤니.”
눈이 마주치자, 재겸의 시선이 어색하게 미끄러졌다.
“어? 어….”
한쪽 어깨를 접어 비뚤게 누운 윤태희가 물었다.
“속은 괜찮아?”
“어, 어어….”
윤태희는 재겸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끔찍한 숙취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메산이의 약수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약수가 없었다면 지금쯤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다는 말에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각시는 술도 잘 마시네….”
오랜만의 각시 타령에 재겸의 어깨가 움찔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은 애써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너, 너는.”
“뭐가?”
“너는 속 괜찮냐고.”
“나는 어제 많이 안 마셔서 괜찮아.”
그래 보이긴 했다. 남몰래 숙취에 시달린 재겸과는 달리 윤태희는 아주 멀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 재겸이 맥주 네 캔에 독한 담금주까지 콸콸 들이붓는 동안 윤태희가 마신 술은 기껏해야 맥주 반 캔 정도에 불과했다.
“둘 다 괜찮아서 다행이네. 걱정했는데.”
햇볕을 쬐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평상에 누워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코에 걸치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벗어 책 옆에 올려두었다.
“그럼, 씻고 내려가서 밥 먹을까?”
윤태희가 안경 없이 맨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
재겸은 이번에도 윤태희의 시선을 피해 달아났다. 재겸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마당을 떠돌았다. 하도 망측한 꿈을 꿨더니, 윤태희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꿈 내용이 떠올라서 심장이 펄떡거렸다.
그 빌어먹을 꿈이 너무도 생생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어제 평상에서 술을 마신 건 확실했다. 술에 취해서 맨정신에는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마 묘정에 관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키쓰를 한 것 같긴 한데. 아니, 진짜 키쓰를 하기는 했나?
눈앞의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주 태연해 보였다. 윤태희의 태도가 평소와 같아서 재겸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꿈 내용에 골몰하면 할수록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꿈이라고 확신했건만 이제는 뭐가 뭔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재겸은 단서를 찾아 추리하는 탐정처럼, 조각조각 꿈속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재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태희를 떠보기로 했다.
“야. 그 있잖어. 어, 어제….”
“응.”
다시 책을 펼치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평상에서 술 먹었잖어.”
“응.”
“네가 나 방으로 옮겨놨냐?”
“응. 술 취해서 잠들었길래.”
“왜?”
“아니, 그냥.”
재겸이 애써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며 태연하게 말을 흐렸다. 사실 대하기 껄끄러워서 뭐라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지만, 일단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야. 근데 혹시.”
재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어젯밤에.”
“응.”
“…….”
표정은 심드렁했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어제 뭐?”
“어, 어제….”
노력해봤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더듬게 됐다.
“응.”
“별일 없었지?”
책 페이지를 넘기려던 윤태희의 손이 멈췄다. 윤태희는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 끝이 빨갛네… 윤태희가 책으로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별일 있었는데.”
뭐? 재겸의 낯이 아연해졌다.
“뭐… 무, 무슨 별일.”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툭, 대답했다.
“키스했어요.”
재겸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
키쓰. 키쓰한 건 맞구나. 거기까지는 현실의 기억이 맞았다. 키쓰야 뭐 어차피 한 두번 해보냐? 재겸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키쓰 정도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그, 그거 말고는?”
재겸이 괜히 황토집 기둥을 만지작거리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없었어요.”
“없었다고?”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키스한 게 끝인데.”
아, 씨바 다행… 재겸은 순간 다리 힘이 풀릴 뻔했다. 그 이후부터는 전부 꿈이었던 거다. 하긴 생각해보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건 말도 안 됐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그런 건 현실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확신을 얻은 재겸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자, 윤태희가 물었다.
“아냐.”
그에 재겸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나 씻는다.”
재겸은 도망치듯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천만다행으로 꿈이라는 결론을 얻었지만, 꿈 내용이 워낙 그렇고 그런지라 윤태희와 함께 있는 게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십년감수 했네. 어쨌든 꿈이라는 걸 알았으니 마음이 놓였다.
화장실에 들어온 재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썅, 술을 처먹질 말아야지.”
황토집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없어서 그냥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서 세수를 해야 했다. 쪼그려 앉은 재겸은 세숫대야에 찬물을 가득 받기 시작했다.
콸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꿈 생각이 났다.
떠오르는 장면은 희뿌연데, 감각은 선명했다. 뒤통수에 와닿던 딱딱한 평상. 발목에서부터 맨다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던 손길, 종아리에 걸쳐져 있던 단단하고 넓은 어깨의 감각. 손아귀에 휘감기던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팔을 둘러 안았을 때 느껴진 탄탄한 등.
그리고 몽롱한 시야에 보이던, 윤태희의 오른 가마.
재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제 바짓가랑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대야 가득히 물이 넘치고 있었다.
“……”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생생하다고 해도 어쨌거나 꿈은 꿈일 뿐이다. 예전에 윤태희가 꿈에 나왔을 때도 지금처럼 생생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어서 빨리 해괴망측한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머리를 비워야 했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깬 것이 틀림없었다. 재겸이 냅다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남색가도 아니고, 그런 꿈은 잊어버려야 한다.
재겸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어푸푸 세수를 했다. 꿈의 잔향을 씻어내듯이, 거창하게 세수를 한번 하고 나니 정신이 한결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평정심을 되찾은 재겸이 치약을 짜서 양치질을 할 때였다.
응?
어느 순간, 화장실 구석에 놓인 세탁기가 보였다. 정신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이제 보니 세탁기가 쿵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윤태희가 돌려놓은 건가? 재겸은 칫솔을 물고 화장실 문을 슬쩍 열었다.
“야, 빨래 네가 돌린 거냐?”
그러자 마당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어제 갈아입은 옷.”
“왜?”
“한 번 입었던 옷 다시 가방에 넣기 싫어서.”
재겸이 미간을 모았다. 어차피 집에 가져가서 빨면 될 것을, 하여간 까탈스럽긴. 윤태희는 가끔 필요 이상으로 깔끔을 떨었다. 그에 반해 천성이 무던한 재겸은 어제 샤워하고 갈아입은 옷을 대충 접어 가방에 넣어둔 참이었다.
양치와 세수를 끝낸 재겸이 수건으로 얼굴을 빡빡 닦을 때였다. 개운하게 다 씻고 나니 때마침 세탁기가 다 돌아갔는지 삐리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겸은 소음이 멈춘 세탁기를 바라보다가, 선심 쓰듯이 윤태희의 세탁물을 꺼냈다.
윤태희의 빨랫감이었지만 꺼내다 주는 것쯤은 해줄 수 있었다. 젖은 빨래를 품에 안고 나온 재겸은 고무로 된 슬리퍼를 꿰어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벌써 다 씻었어?”
어느새 마당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쳐다보았다. 때마침 담배를 피우려던 참이었는지,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있었다.
“야, 빨래 다 됐어.”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상 위에 빨랫감을 툭 던져놓았다.
“고마워.”
“구겨지기 전에 널어.”
정주가 하던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빨래가 다 되면 바로 꺼내서 널어야 주름이 안 진다고, 정주가 하도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재겸도 그 습관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네에.” 대답만 하고는 돌담 위로 팔을 걸쳤다.
윤태희는 돌담에 팔을 걸친 채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파도 내음을 품은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재겸은 바다를 바라보는 윤태희의 등짝을 은밀히 훔쳐보았다. 품이 커다란 흰 티셔츠 자락이 펄럭이고, 풍성한 머리칼을 휩쓸고 지나갔다. 시선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윤태희가 재겸을 돌아보았다.
“왜?”
재겸이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아냐.”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서 괜히 뻘쭘해졌다. 문득 어색한 기분이 들어 이리저리 딴청을 피우던 재겸은 평상에 던져둔 빨래를 집어들었다.
“놔두세요. 내가 널게요.”
그러자 라이터를 꺼내 들던 윤태희가 말했다.
“됐어. 나 빨래 잘 널어.”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빨랫감도 몇 벌 되지 않았다. 옷이 구겨지게 놔두느니 후딱 널면 끝날 일이었다.
재겸은 흔쾌히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젖은 옷가지를 집어 들고 탁탁 털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하나하나 반듯하게 옷을 널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
남은 빨랫감을 내려다보던 재겸이 멈칫했다. 이 세탁물은 전부 윤태희가 어제 입었던 것이다. 방금 윗도리 하나 널었고, 바지도 하나 널었으니 이제 남은 건 양말과 속옷이었다. 의아한 것은 널어야 할 속옷이 세 개나 있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는 재겸의 속옷이었다. 재겸이 입는 속옷은 일괄 검은색 드로우즈였다. 정주가 헷갈린다고 몽땅 통일해서 사 왔기 때문이다.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니, 왜 내 빤스가 여기 있지? 어제저녁에 샤워하고 갈아입은 빤스는 가방에 넣어놨는데? 그리고 윤태희는 왜 빤스를 두 번이나 갈아입은 건지….
뭐지? 나는 갈아입은 기억이 없는데….
제 속옷을 바라보던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
어? 잠깐, 이거 설마….
번쩍 떠오른 생각에,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야.”
재겸이 저도 모르게 벌컥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입에 장초를 물고 담뱃불을 붙이려던 윤태희가 라이터를 켜다 말고 재겸을 돌아보았다.
“네?”
재겸이 흔들리는 눈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키, 키쓰만 했다며, 근데 왜….”
“아.”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이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진짜 키스만 한 거 맞는데.”
“…뭐?”
“근데,”
말을 멈춘 윤태희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덧붙였다.
“입술 말고 다른 곳에도 했어요.”
재겸이 목석처럼 굳을 때였다.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태희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깊숙이 담배를 빨았다. 이내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담배 연기가 천천히, 자욱하게 흘러나왔다.
마침내 재겸의 손에 들려있던 속옷이 툭 떨어졌다.
“…….”
“…….”
한 차례 연기를 삼킨 윤태희가 콧잔등을 찌그러트렸다.
“꿈인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