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꿈인 줄 알았어?”
윤태희가 콧잔등을 찌그러트리며 웃었다.
“…….”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모든 사고가 일시에 정지했다. 재겸은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웃기지 마, 장난치는 거지.”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재겸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럴 리가 없다. 윤태희가 필시 저를 골려 먹으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재겸이 아연한 낯으로 현실을 부정할 때였다.
“장난?”
윤태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가 싶더니, 이내 검지를 툴툴 튕겨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껐다. 한 모금밖에 피우지 않은 장초가 아깝지도 않은지,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장난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윤태희는 재겸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윤태희가 가까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움찔한 재겸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가, 이내 뒤에 있던 평상에 부딪혔다. 방해물에 가로막힌 재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평상 위에 털썩 주저앉을 때였다.
“누가 그런 장난을 치지….”
가까이 다가온 윤태희가 혼잣말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릴 때였다. 윤태희가 평상에 앉은 재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윤태희는 재겸이 발치에 떨어트린 속옷을 줍더니, 속옷을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내가 장난으로 남의….”
…사람으로 보이나?
그렇게 말하며, 윤태희가 고개를 들고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상스러운 말에 재겸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상한 투로 내뱉은 단어는 매우 천박하였다.
“너, 너는 미, 미친 새끼야.”
그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벌컥 욕을 뱉을 때였다.
“나 아까 머리 감는데 머리카락 엄청 빠졌어…….”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치고 재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윤태희가 태연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머리 다 뽑히는 줄 알았다고, 윤태희가 덜 마른 머리를 헤집으며 덧붙였다.
“…….”
유구무언이라는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일 거다. 살짝 젖어 있는 윤태희의 머리카락에서 축축한 샴푸 향이 났다. 그때, 윤태희가 주워든 속옷을 어깨에 훌러덩 걸치며 말했다.
“내가 널게요.”
재겸은 아주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한 번 갈아입은 옷은 가방에 넣기 싫다고 세탁까지 하는 주제에, 저렇게 깔끔 떠는 윤태희가 절대로 그럴 일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재겸의 희망은 보기 좋게 빗겨나갔다. 재겸이 서둘러 제 속옷을 확 잡아챘다.
“내, 내놔.”
현실 부정 끝에 찾아온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수치심이었다. 재겸의 낯은 어느새 확연히 붉어져 있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날 때까지 진탕 마실 걸 그랬다.
어쩐지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싶더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인제 와서 기억이 안 난다고 시치미를 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윤태희가 먼저 조르긴 했지만 아무리 술김이었다고 해도 분명히 제 의지로 윤태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던가?
“왜요? 부끄러우세요?
그때, 윤태희가 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
뭐? 부끄러워? 재겸은 울컥했다. 이건 부끄럽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재겸은 할 수만 있다면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그냥 애초에 키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 시끄러워. 없, 없던 일로 해.”
“있었던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해?”
“다 너 때문이잖어.”
이건 순전히 윤태희에게 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겸은 후회가 막심했다.
스킨십에 익숙지 않은 재겸은 키스를 잘하고 못하는 차이를 몰랐다. 그러나 항상 윤태희와 키스를 하다 보면 어느새 홀린 듯이 따라가고 있었다. 윤태희와 입을 맞추다 보면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숨결, 감각만 남았다. 윤태희가 묘하게 몸을 만져대기도 했고, 입맞춤이 농밀했으니 그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윤태희는 키스를 아주 잘했다.
“네, 네가 남색가 짓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혹시 남색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신지?”
그때, 재겸의 말을 끊으며 윤태희가 픽 웃었다.
“…….”
수치심이 다음에 찾아온 것은 자기합리화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뭐가?”
재겸이 윤태희를 노려보며 항변했다.
“그, 그럴 땐 나도 남자니까, 그게 당연한 거야.”
윤태희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래요.”
그렇게 말하던 윤태희가 팔을 쭉 뻗었다. 제 손이 물건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뒤집으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에 재겸의 시선도 자연히 윤태희의 손으로 향했다. 길고 곧은 손가락, 더러운 것이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선비 같은 손, 손등에 불거져 나온 힘줄, 늘 정리된 단정한 손톱. 마디가 툭 튀어나온 손을 홀린 듯이 바라볼 때였다.
“근데 제가 그걸 모를까요?”
그 말과 동시에, 윤태희의 손이 갑자기 재겸의 발목을 삭, 말아쥐었다. 그 상태로 다리를 훑어 올리더니 종아리 안쪽을 주무르듯이 가볍게 쓸었다. 무릎을 반쯤 덮고 있던 통 넓은 반바지 사이로 슬쩍 들어온 손이 무릎뼈와 오금을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재겸이 흠칫하며 무릎을 확 들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미친, 미친 새끼야.”
윤태희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재겸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속옷 주세요. 다시 빨게.”
문득, 재겸은 바다를 헤엄쳐서라도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졌다.
***
두 사람은 뒤늦은 식사를 하러 주인집으로 향했다.
어제는 일찍 가서 주인집과 함께 식사를 했지만, 지금은 어느덧 아침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식사 때를 놓쳤기 때문에 두 사람만 밥상을 받았다.하필이면 단둘이 겸상이라, 재겸은 시선을 내리깔고 묵묵히 밥만 먹었다.
재겸은 한참이 지나도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얼핏 보면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겠지만, 자신이 대체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재겸과 달리 윤태희는 차분하기만 했다. 윤태희는 씹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한때 절간에서 살았다더니 식사하는 몸가짐이 아주 정적이었다.
아니, 절에서 살았다는 애가….
밥을 먹다가 무심코 마주앉은 윤태희를 바라보면, 자꾸 망측한 장면이 떠올랐다. 키가 큰 윤태희와 재겸에게는 높이가 낮은 밥상이라 밥을 먹을 때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그때마다 윤태희의 오른 가마가 보였고, 재겸은 음식을 삼키다가도 자꾸만 숨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절에서 살았다는 애가, 저 입으로….
문득 재겸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이런 기분으로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니 분위기가 몹시 어색하고 미묘해서 힘들었다. 그나마 윤태희가 밥을 먹을 때 말을 잘 안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다행이었다.
“뭐째 입에는 맞는가?”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주인집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겸에겐 구세주의 등장과도 같았다. 상 옆에 한쪽 다리를 세워 앉은 할머니가 윤태희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더니,
“그려서 생각은 해봤는가?”
어느 순간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핵심인즉슨 자신의 딸과 선을 볼 마음이 생겼느냐는 것이다. 그에 재겸이 힐끔,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윤태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
밥을 한술 뜨던 윤태희가 외마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어제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응?”
“제가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던 윤태희가 입에 숟가락을 넣으며 재겸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덫에 걸린 듯 시선이 마주쳤다. 국을 뜨던 재겸이 코를 컹, 삼켰다가 지독한 사레에 들려버렸다.
쿨럭, 쿨럭, 쿨럭…….
“아이고, 아가. 괜찮여?”
할머니는 재겸에게 물을 떠주며 등을 슬슬 쓸어 주더니,
“그라면은 임자가 있다는 거시여?”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붙였다.
“…….”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윤태희가 별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아예 장가도 들 판여?”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할머니가 못내 아쉬운 듯이 물었다.
“그럴까 생각 중이에요.”
재겸은 결국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재겸은 재빨리 방 안으로 대피했다.
황토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 묘한 기류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재겸은 이 정적을 깨기 위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후다닥 테레비를 틀었다.테레비를 보지 않는 윤태희는 아까처럼 평상에서 책을 읽을 테니, 저도 뭐라도 보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때울 작정이었다.
윤태희에게서 떨어지자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숨을 쉰 재겸이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을 때였다.
“뭐 해?”
그때, 뒤에서 방문이 벌컥 열렸다.
“티비 봐?”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
아 씨바, 깜짝아…….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재겸이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혼자 말도 없이 방 안에 들어갔으니 뭐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거겠지. 재겸은 윤태희가 어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겸의 바람과는 달리, 윤태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테레비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
재겸의 어깨가 다시 굳기 시작했다.
윤태희를 피해야 하는데, 이곳은 좁은 섬인 데다가, 할 일도 없고, 이 집에는 딱 둘만 있었다. 애초에 독채를 잡은 게 문제였다. 그냥 혼자 단칸방 하나 내어달라고 할 걸 그랬다.
“보, 보고 있어.”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재겸은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왔다. 평상에 앉아 이마를 긁적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윤태희가 나타났다. 방에서 나온 윤태희가 마루에 앉았다.
윤태희는 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재겸을 구경하고 있었다.
“…….”
마침내 참다못한 재겸이 벌컥 쏘아붙였다.
“야, 왜 자꾸 졸졸 따라와?”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같이 있고 싶으니까.”
거리낌 없는 솔직한 대답에, 재겸이 움찔했다.
“굳, 굳이 같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왜?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은데.”
순간 말려 들어갈 뻔했으나, 재겸은 지지 않고 맞섰다.
“모, 모든 일을 같이할 순 없는 거야. 독립적으로 좀 살어.”
난데없는 훈계에, 윤태희가 작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왜 자꾸 나 피해?”
“내, 내가 언제.”
재겸이 시선을 홱 돌리며 말했다.
“이젠 눈도 피하고.”
“안 피했어.”
“피했어.”
“안 피했다고.”
유치한 실랑이가 이어졌고,
“그럼 왜 마당에 나왔어?”
아니나 다를까 윤태희가 정곡을 찔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재겸은 윤태희처럼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책도 읽지 않았기에 조용한 마당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테, 테레비도 재미없고, 심심해서 나온 거야.”
재겸이 심드렁한 낯으로 짐짓 시치미를 뗐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둘러댔다. 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턱을 괴며 재겸을 빤히 바라보다가,
“심심해?”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랑 데이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