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이제 시작이야.”
삶의 경이 속에서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질 때였다.
“그러니까 우린 돌아가야 해.”
재겸이 흔들림 없는 낯으로 윤태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래….”
마침내 윤태희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사아아,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이제 전초(前哨)는 끝났다. 어느덧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 할 일이 많았다. 거여도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면 목패를 빼앗아 나례청을 무너트려야 하는 시간이 온다.
육박하는 운명과 맞서 싸워야 하는 투쟁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재겸은 불로불사라는 짐을, 윤태희는 복수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낡고 녹슨 사슬을 잘라 낼 때였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윤태희와 재겸은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푸르고 드넓은 망망대해를 바라보기로 했다. 다가올 멸망을 예고하는 평화의 순간.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윤태희와 재겸은 아름다운 해변에 나란히 앉아 광활한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박제된 것처럼, 두 사람은 고요했다.
재겸은 다리를 세우고 무릎에 팔을 얹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윤태희의 어깨와 제 어깨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몸을 옆으로 물리지는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갈까?”
“가자.”
그러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섬 날씨는 손바닥을 뒤집듯 금세 변덕을 부렸다.
어깨를 맞대고 바다를 감상하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은 사색이었다. 사색이 끝났을 때는 어느샌가 푸르고 화창한 하늘 저 멀리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닷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윤태희와 재겸은 차례대로 샤워를 했다. 모래사장 위를 뒹굴며 놀았더니 머리칼이며 옷이며 모래를 잔뜩 두르게 된 탓에 온몸이 지걱거렸다.
윤태희 다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재겸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마루를 슬쩍 내다보았더니 제법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고, 파도가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바다가 몰고 온 무거운 먹구름은 온 하늘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낮에만 해도 맑고 쾌청하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둡고 흐리게 변해 있었다.
어느샌가 바깥 공기는 한결 차가워져 있었다.
“태풍이 오려나.”
잠시 밖을 내다보던 재겸은 으슬거리는 몸을 감싸며 안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니 윤태희는 벽에 몸을 푹 묻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미리 보일러를 틀어놓은 것인지 방에는 따끈한 훈기가 돌고 있었다. 재겸이 방 안에 들어서자 윤태희가 코에 걸친 안경을 내렸다.
윤태희가 맨눈으로 재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벌써 다 씻었어?”
“응.”
재겸은 방바닥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 무릎에 상처 났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상처?”
재겸의 말에, 반쯤 눕다시피 허술하게 앉아 있던 윤태희가 벽에서 등을 확 뗐다. 책을 던지듯이 치우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재겸의 무릎을 살펴보았다. 정말 상처가 나 있었다.
“언제 다친 거야?”
재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라. 썅, 아까 바닷가에서 긁혔나 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재겸은 자신이 다친 줄도 몰랐다. 그러다 샤워하는 도중에 자꾸 무릎이 따끔거리기에 그제야 상처가 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까 모래사장에서 넘어지고 뒹굴거리던 과정에서 모래 속에 섞여 있던 작은 유리 조각 따위에 스친 듯했다.
“괜찮아?”
상처를 보자마자 윤태희의 낯이 굳었다.
“응. 괜찮어.”
재겸이 심드렁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종이에 베였을 때와 같이 얇게 베인 상처였다. 피가 조금씩 스며 나오고는 있었으나 금방 멎을 것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신경이 곤두선 낯을 했다. 윤태희는 몸을 일으키더니 재겸의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재겸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혹시라도 유리 조각이 박히거나 살 속에 파고든 것은 아닌지 손끝으로 상처 주변을 조심히 건드려 보았다.
“아프니?”
윤태희의 오른 가마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말했다.
“아니. 별로 안 아퍼.”
그럼에도 윤태희는 재겸의 무릎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사소한 생채기였으나 고작 이 정도의 상처만으로도 윤태희의 마음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
어느 순간, 줄곧 침묵하던 윤태희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윤태희의 입술이 상처에 닿았다. 불시에 찾아든 푹신한 감각에, 재겸의 어깨가 불에 덴 듯 움찔 튀어 올랐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윤태희는 먼 길을 걸어온 정중한 순례자처럼, 혹은 오랜 항해를 끝마치고 돌아와 대지에 입 맞추는 노쇠한 선원처럼, 혹은 신 앞에 복종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열렬한 신도처럼, 그렇게 재겸의 무릎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재겸이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어깨를 붙잡을 때였다. 상처에 와닿은 입술에서 따스하고 축축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윤태희가 재겸의 상처를 느리게, 개처럼 핥았다.
그 순간, 재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
섬뜩한 전율과 묘한 쾌감이 재겸의 등골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윤태희의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져나갔다. 윤태희가 재겸의 종아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윤태희는 어느새 무표정한 낯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눈매가 재겸을 명료하게 응시했다.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야.”
“나는 이런 작은 상처도 싫어요.”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재겸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바닷가에서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던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에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눅진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
재겸은 윤태희의 손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윤태희는 별말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차 트렁크에 있던 약수랑 연고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윤태희는 날이 선 눈매로 이마를 매만지며 혼잣말을 뱉었다. 정화부의 약수나 연고를 챙겨왔다면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나을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윤태희는 차선책으로 집 안에 있는 서랍과 선반 등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상비약이 있는지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다행히 TV 선반 아래에 있던 상비약이 담긴 작은 상자를 찾았다.
“이리 와. 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자.”
윤태희가 상비약 상자를 열자, 재겸이 미묘한 낯을 했다.
사실 재겸은 약수를 소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정화부에서 받아온 약수가 아니라 메산이가 직접 챙겨 준 약수였다. 재겸은 평소 몸에 상처가 나든 말든 무감한 편이었지만, 윤태희가 고작 이런 작은 상처에도 저렇게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니 메산이의 약수를 먹을까 잠시 갈등이 되었다. 그러나 재겸은 잠시 고민 끝에 메산이의 약수를 아껴 두기로 했다. 정화부의 약수라면 모를까, 이런 하찮은 생채기 따위에 메산이의 약수를 마시기엔 아까웠다.
“됐어. 이 정도는 내버려 두면 금방 나아.”
재겸의 말에, 윤태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약 상자를 들고 온 윤태희가 새끼손가락에 연고 소량을 짜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겸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숨을 참았다. 상처가 따끔거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왠지 소름이 돋고, 발바닥이 간지러워서였다.
그때, 윤태희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아프니?”
재겸은 얼마간 말없이 발가락을 꿈질거리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니… 안 아퍼….”
불현듯 지나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학교에 갔던 날, 그러니까 도서실에서 윤태희와 처음 만난 날의 일이다. 그날 재겸은 발치에 우글거리던 자벌레를 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자벌레를 보고 질겁했던 재겸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손에 피를 내서 부적을 썼다. 손에 잡히는 책을 꺼내 종이 한 장을 찢어 급한 대로 만든 간이 부적이었다. 그 부적으로 자벌레를 전부 없애 버렸다.
자벌레를 없앤 직후, 재겸은 사서 선생이었던 윤태희와 처음으로 마주쳤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처음 만난 윤태희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선생치고는 꽤 젊었던 데다가, 윤태희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법한 눈에 띄는 외모였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접혀서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있었고,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런 첫인상과는 별개로 인간 불신이 뿌리 깊던 재겸은 본능적으로 윤태희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윤태희는 지금처럼 재겸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었었다.
재겸은 아직도 그 반창고의 색상과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던 노란색 반창고. 그때도 몇 번이나 됐다고 거절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아랑곳없이 재겸의 손에 직접 반창고를 붙여 주었고, 살갗에 반창고가 잘 접착되도록 손가락을 매만져 주었었다.
사실, 그때부터 재겸은 윤태희를 생각했었다.
이상하고 향기로운 애, 라고.